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5화 (85/110)

#85. 전쟁 (6)

“……바이샤, 놓아주세요.”

“아니, 그대로 있어.”

“쿠드라.”

“…….”

이름이 아닌 ‘쿠드라’라는 부름에 바이샤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그의 품을 벗어났다.

자신을 붙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몸을 빼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세리아나를 다치게 할 리 없는 그의 커다란 손은 결국 그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죠?”

몸을 돌린 세리아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성벽에 매달린 ‘어떠한’ 것이었다.

눈이 좋은 사막의 전사들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나의 눈에는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 그것은 여름임에도 차갑게만 느껴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

성벽 쪽을 한참 노려보고 있던 세리아나는 성벽에 매달린 것이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아니,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기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그것’이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에 불과했다.

녹색 드레스를 입고 성벽에 매달린 사람. 두 팔을 들어 올린 것은 아니니 분명 어딘가를 묶어 저리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어딜 묶은 것일까?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리 흘렀고 녹색 드레스 끝자락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가 ‘그것’의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에 가 닿았다.

“저건 설마…….”

드레스 자락만큼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이제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 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는 금발임을 알아차린 순간, 다시 몸이 되돌려졌다.

다시 바이샤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는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엔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바이샤, 설마 저것…… 저분…….”

“치아린! 당장 네 주인을 모셔라!”

“잠시만요. 잠시만요, 바이샤!”

“죄송합니다, 라누아. 모시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굳은 얼굴을 한 치아린의 손에 이끌려 바이샤의 천막으로 향했다.

이곳에 오기 싫었던 이유,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불안감의 원인이 바로 저기에 있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바이샤는 치아린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세리아나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저것’을 선명하게 보지 않고도 무엇인지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확신과 확인은 다른 문제였기에 자신의 이름을 그리 애타게 불렀을 것이다.

“쿠드라, 성문이 열립니다.”

세리아나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바이샤는 카얀의 목소리에 다시 성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파렴치한 자들이 아닌가? 시체가 매달린 성벽 쪽엔 병사들조차 서 있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바이샤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뒤 열린 성문 사이로 라젠의 병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젠의 국기와 국가의 전령임을 알리는 깃발, 그리고 항복을 뜻하는 하얀 백기를 등 뒤에 매단 채 나타난 그는 말을 몰아 곧장 차이툰의 전사들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라젠의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 전하의 친서를 전하고자 합니다.”

말에서 내린 병사는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화려하게 양각으로 꽃을 조각한 그 상자는 대륙 회의 때 머물렀던 폐궁의 호화스러웠던 테라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 바이샤는 유폐를 목적으로 한 폐궁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라 그것을 비웃었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 멀리 녹색 드레스를 입은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여인의 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박힌 탓이었다.

편지엔 여전히 긴말이 적혀 있었고 여전히 읽는 사람의 속을 뒤집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인지라 상이라도 줘야 하나 고민한 바이샤는 그의 목에 친히 칼을 박아 넣는 것을 상으로 정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이 딸을 시기한 엘라이어 피오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스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전령이 목을 움츠렸다.

자신이 전하기는 했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몰랐던 것이다.

저런 내용이 담긴 줄 알았다면 성 안에서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전령의 역할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저, 저는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 네 역할은 말을 전하는 것이지.”

“그…… 렇습니다.”

“그럼 가서 내 말도 전하라.”

“네, 네.”

“엘라이어 피오르의 시체를 당장 거두어 귀히 모셔두어라. 내가 성 안에 들어 그 모습을 확인했을 때 망자의 시신이 험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성 안에 살아남은 모든 것들을 죽이겠다.”

“그, 그건……!”

“그리고 또 전하라. 이것은 내게 내민 도전장이니 얼마든지 받아주겠다고.”

전령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처음 임무를 받을 때만 해도 이 전쟁을 멈출 왕의 친서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야만의 왕에게 건네는 도전장으로 변한 것인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지금 당장 성으로 돌아가 성벽에 매달린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성 안에 살아남은 것들은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도륙당할 것이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허둥거리며 다시 말에 오른 전령이 있는 힘을 다해 성으로 돌아갔다.

성벽에 매달려 있던 엘라이어의 시신이 끌어올려지고 성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이샤가 자신의 전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른 말은 더하지 않겠다. 내 라누아의 모친을 모욕한 자들이다.”

그의 말에 차이툰 전사들의 눈이 시퍼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여왕을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사막의 전사는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라누아께 승리를 진상하라.”

전사들이 바닥에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모래사막과 달리 단단한 흙으로 이루어진 땅이 울리며 그 소리를 키워 나간다.

어떠한 외침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울림에 성 안의 적들은 몸을 떨고 있을 것이다.

“카얀.”

“네, 쿠드라.”

“이딴 짓을 생각해 낸 짐승을 찾으라 쟈캄에게 전해. 머저리 같은 라젠의 왕이 떠올릴만한 일이 아니야.”

“찾아서 어찌할까요?”

“찾기만 해. 찢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

“명을 받습니다.”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바이샤의 목소리에 카얀은 이딴 짓을 생각해 낸 이가 곱게 죽기는 글렀다고 확신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도 어느 정도 손을 보태고 싶으나 제 주인이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느꼈을 뿐이다.

카얀은 쿠드라의 종이긴 하지만 그 근본은 역시 사막의 전사이고 그들에게 라누아는 목숨을 바쳐 섬기는 여신이자 여왕이었다.

그런 이가 모욕을 받았으니 갚아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약간의 아쉬움을 내려놓으며 쟈캄에게 날릴 매를 고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편, 치아린의 부축을 받아 천막으로 자리를 옮긴 세리아나는 자신이 눈에 담았던 ‘그것’을 떠올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던 금발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두 손을 마주 잡고 몸을 웅크린 세리아나에게선 해가 뜨기 전까지 보여주었던 강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고 두려웠다.

누군가 나타나 이것이 꿈이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함께 있는 치아린은 입을 다문 채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그림자 속 쥬드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라도 한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세리아나.”

“바이샤!”

그때 바이샤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치아린과 그림자 속에 숨은 쥬드를 쫓아내듯 밖으로 내몬 그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갔다.

“제 생각이 과한 거죠? 그렇죠? 아니에요. 아닐 거야. 그렇죠?”

“세리아나.”

“어, 어머니는 겁이 많으신 분이라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리에 집안 깊숙한 곳에 숨어 계실 거예요. 아, 아니면, 왕성에…… 전하의 곁에! 네 맞아요, 거기에 계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그건 절대……!”

“세리아나, 진정해.”

“바이샤! 제발!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줘요!”

말을 빠르게 이으며 제게 매달리는 세리아나를 바이샤가 끌어안아 주었다.

가느다란 몸이 두려움에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은 아마도 처음이리라. 그것도 그리 처참한 상태를 목격했으니…….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바이샤는 자신의 태도에 아내가 ‘확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세리아나…….”

“어째서 어…… 머니가 그렇게……?”

말끝에 울음이 맺혔다.

흔들리는 목소리가 가여워 그녀를 동정이라도 하게 될까 바이샤는 차마 세리아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당신이 진정하면 알려줄게.”

“바이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우는 게 좋겠어.”

“나, 나는…….”

“참지 않아도 괜찮아.”

바이샤의 다정한 말이 세리아나의 머리 위에 닿은 순간,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 한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후두둑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뜨거운 눈물이 바이샤의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삼키던 울음이 아니었다.

듣는 이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비통한 울음이었다.

바이샤는 몸을 떨며 눈물을 쏟아내는 세리아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체온이 아내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소원했다.

천막 밖에서 세리아나의 울음을 듣고 있는 치아린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분노로 몸이 떨린다는 것은 바로 지금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카얀이 그녀와 함께 천막 밖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치아린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찢어 죽일 거야.”

“쿠드라께서 직접 하겠다고 하셨어.”

“그럼 나는!”

“치아린. 너의 분노가 라누아의 슬픔보다 크지는 않아.”

바이샤가 순서를 넘긴다면 그 사람은 치아린이 아니라 세리아나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카얀의 말에 치아린이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양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했다.

슬펐다.

그녀의 아름다운 주인에게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헬라임께 따져 묻고 싶었다.

“쿠드라께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고 있어.”

“치아린.”

“후우. 알아요, 내 사랑.”

아주 조금 진정한 치아린이 본래의 말투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카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을 위해 침착해지도록 교육받은 신의 종이었다.

다행히 그 가르침이 남아 빠르게 정신을 차린 치아린 곁으로 카얀이 다가왔다.

“쿠드라께서 나오는 즉시 시작할 거다.”

“저는 라누아 곁을 지키고 있을게요.”

“쿠드라께서 네 순서도 생각해 주실지 모르지.”

“……꿈이 너무 커요.”

답지 않게 농담을 건네며 자신을 위로하는 카얀의 모습에 애써 기운을 차린 치아린이 천막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천막 안쪽에선 세리아나의 울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라누아의 눈물 값은 제대로 받아내야겠죠.”

“그럴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길을 열지.”

“믿어요.”

“그래.”

오늘의 전투는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어제보다 치열할 것이고 어제보다 잔혹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그들의 왕은 적들에게 어떠한 자비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땅에서 올라온 열기가 사막에서부터 달려온 전사들의 피부를 달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이툰의 전사 그 누구도 소리 내어 불평하지 않았다.

소리 내는 대신 침묵을 택한 그들은 그들의 왕이 명령을 내리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라누아의 울음은 멎었으나 전사들의 귓가엔 여전히 그 울음이 남아 있었다.

여왕의 눈물값은 너무나도 비싸서 적들의 목숨조차 모자랐다.

그렇다면 그 값을 어떻게 치르도록 해야 할까? 그 답은 그들의 왕이 알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천막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이샤는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전사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담긴 분노를 읽었다.

과연 자신의 전사들이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사막의 전사들은 입이 아닌 눈으로 대답했다.

“우리의 여왕께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적들로 하여 몸으로 깨닫게 해줘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사막의 전사들은 다시 눈으로 답하며 그들의 왕이 명령을 내려주길 기다렸다.

“내가 가장 앞에 설 것이다. 모조리 죽이고 붉은 길을 열어라. 그리하여 헬라임의 분노가 그 붉은 길을 타고 내려와 적들의 영혼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수 있도록 하라!”

“명을 받습니다!”

“명을 받습니다!”

“명을 받습니다!”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이들이 한 입으로 대답하자 공기가 울리고 대지가 요동을 쳤다.

그 커다란 울림에 잔뜩 겁을 먹은 적들이 성 밖의 눈치를 살피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승리를 라누아께!”

사막의 전사들이 라젠의 마지막 남은 성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태양이 하늘의 한가운데 떠오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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