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4화 (84/110)

#84. 전쟁 (5)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어쩐지 이 길의 끝에 닿고 싶지 않다고.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싫었다.

“왜 싫은 걸까?”

“라누아?”

갑작스러운 혼잣말에 치아린이 되물어왔지만 세리아나는 그것을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 길의 끝에 도달하기 싫은 것일까?

피 흘리지 않고 얻은 두 성은 머무르지 않고 지나쳤다.

자신이 할 일이 없었던 탓도 있고 하루라도 빨리 바이샤의 곁으로 향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탓이다.

물론 그냥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정복지와는 다르게 거친 성향을 지닌 전사들을 그곳의 책임자로 남겨두었다.

차이툰의 전사들은 강자에겐 더욱 강하게 맞서고 약자에겐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었다.

강자와 약자, 두 종류의 인간들을 그들의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들은 다르다.

염치를 모르는 비겁한 자들. 싸우지도 않고 자신들을 섬기기로 한 두 성의 백성들과 남은 귀족 몇몇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세리아나는 일부러 거친 이들을 남겨 강자도 약자도 되지 못한 비겁한 자들에게 복종하는 법을 철저히 가르치라 지시했다.

그렇게 스쳐 온 길이었다.

라젠의 수도에 먼저 도착해 있을 바이샤의 곁에 하루라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 조금 전까지도 마음이 조급해 안달이 났었는데…….

“왜 싫을까?”

단순히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라젠의 수도에 가기 싫어 부리는 투정은 아니었다.

이제 ‘과거’는 세리아나의 발목을 잡아챌 힘이 없었다.

“라누아, 무엇이 그리 싫으세요?”

“치아린…….”

세리아나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조차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감정을 치아린과 공유해도 괜찮을 것인가? 그러나 고민은 잠시였다.

치아린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가기가 싫어져서.”

“어디를…… 설마 쿠드라의 곁에 가기 싫으신 건가요?”

“그럴 리가!”

마차의 지붕이라도 뚫을 듯 펄쩍 뛰어오르며 답하는 세리아나를 보며 치아린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치아린이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려 일부러 던진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세리아나가 아주 조금 원망을 담아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바라보시면 이 치아린은 슬퍼진답니다.”

“치아린도 날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같아.”

“설마요.”

모르는 척 마차 안쪽으로 나부끼는 얇은 덮개 천을 정리하는 치아린을 바라보던 세리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종종 보여주는 얄미운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사람이 치아린이었다.

라젠의 중심으로 향하는 차이툰의 마차 안에 앉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녀 덕분이었으니……. 세리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조금 전 멈춘 말을 이어나갔다.

“쿠드라 곁이 아니라…… 수도의 왕성에 가고 싶지 않아졌어.”

“거기의 사람들 때문인가요?”

“아니, 그냥 기분이…….”

“그럼 멈추겠습니다.”

“응?”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당황한 것은 세리아나였다.

변덕처럼 갑자기 솟아난 마음에 원인을 함께 고민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여기서 바로 멈추겠다는 답이 돌아오는 것일까?

그러나 당황한 세리아나와 다르게 치아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라누아께서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신호가 오간 것인지 마차가 멈추었다.

대륙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찾았을 때와는 다르게 라젠의 마차가 아닌 차이툰의 마차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분명 세리아나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떠한 것으로 신호를 보낸 것이리라. 그게 아니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쥬드겠지.

“다시 마차를 움직여, 치아린.”

“라누아.”

“원치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나는 그곳에서 나의 전사들에게 헬라임의 축복을 전해야 해. 알고 있잖아.”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하고 싶은 일도 있는 걸요.”

“치아린.”

“……네, 알겠습니다.”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는 어쩐지 토라진 얼굴을 한 치아린의 손을 살짝 도닥이며 미소 지었다.

어쩐지 그녀와 자신의 역할이 평소와 반대가 된 것 같아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여전히 이 길 끝에 닿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말처럼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그것이 바로 위에 선 자가 짊어져야만 하는 일의 무게일 것이다.

외면하지 않기로 했고 포기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것 역시 세리아나가 버텨내야 하는 일이다.

세리아나는 불길함에 울렁이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얇은 덮개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라젠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제 곧 수도였다.

* * *

터번 후작은 버티고 있었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정말 간신히,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능력 덕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곳들에 비해 배는 더 튼튼하고 높이 쌓아 올린 외성이 아니었다면 진즉 저 야만인들의 발아래 깔렸었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차이툰의 사나운 전사들은 성벽을 넘기에 충분한 여력을 갖추고도 해가 지자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물러난 것이 아니다.

분명 내일은 더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겠지. 그는 간신히 버텨낸 오늘을 축하하기보다는 또다시 버텨내야만 하는 내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후작님! 왕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고작 반나절의 전투에 지쳐버린 병사들을 바라보던 터번 후작은 왕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재빨리 그를 맞이했다.

버티고만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으니 무조건 버티라 명령했던 왕이다.

드디어 방법을 찾은 것일까? 터번 후작은 그것이 부디 그의 상식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길 기도했다.

“……이게 뭐지?”

그러나 전령을 만나기 위해 그가 성벽에서 내려왔을 때 그 기도는 신에게 닿기도 전 박살이 나 폐허에 뿌려졌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찾아온 전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왕의 명령을 전달하곤 커다란 자루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왕이 전한 명령으로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터번 후작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누구의 생각인가?”

“저, 저는 모, 모릅니다.”

“모른다? 모를 리가! 그 자리에 이런 역겨운 생각을 떠올릴 만한 이가 왕성에 또 누가 있어 모른다고 말하는 건가!”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며,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나는 기사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참담한 명을 내리다니 믿을 수 없다!”

“모, 모릅니다. 소인은 모릅니다! 하, 하지만 명을 따르지 아, 않으시면 왕성에 머무르고 있는 후작님의 가족들에게 아, 안 좋은 이, 일이 생길 거라고……!”

“닥쳐라!”

“히익!”

그의 노성에 놀라 바닥에 엎어진 전령의 목을 당장이라도 잘라버리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터번 후작은 이를 갈았다.

이렇게 멍청하고 역겨운 짓으로 저 차이툰의 전사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인가?

터번 후작은 이 일의 배후에 있을 밀라니안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망할 돼지 새끼의 수작질에 놀아나야 한다니.

“후작님, 어찌할까요?”

뒤에 서 있는 부관의 말에 터번 후작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따질 것도 없이 왕명이 내려온 상황에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예를 아는 자로 차마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가족분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그의 고민을 끊어준 것은 역시나 가족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부관의 입에서 가족을 생각하라는 말이 나온 순간 그는 자신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해가 뜨면 시체를 성벽에 내걸고 성문을 열어 전하의 친서를 차이툰의 왕에게 전달하라.”

“네, 알겠습니다.”

질기고 튼튼해 보이는 자루 안에 담긴 것. 차마 그것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난 터번 후작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라리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라는 명을 받았다면 이처럼 참혹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두운 방 안에 불을 밝힐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나가 수도의 외성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삼일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개운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바이샤를 발견한 순간 세리아나는 가슴 한쪽을 갉아 먹고 있던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의 웃는 낯을 보고 있으니 대체 왜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라누아, 이르게 도착하셨군.”

“쿠드라께서 길을 잘 정리해 주신 덕분인걸요.”

바이샤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린 세리아나는 활기를 띤 사막의 전사들을 눈으로 훑으며 미소 지었다.

이곳에선 제법 그들 마음에 차는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다친 이들은요?”

“제법 있어. 하지만 헬라임의 품에 안길 녀석들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일 전투엔 저를 따라온 전사들도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제 몫이 줄어든다 투정 부릴 놈들이 늘어나겠군.”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대화였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안내를 받아 그의 천막 안으로 들어서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치아린의 말처럼 자신도 사막의 사람이 다 된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아뇨, 내일부터 싸워도 좋다는 말에 밝아지는 전사들의 얼굴을 봤더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네요.”

“싸움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니 어쩔 수 없지.”

그들보다도 싸움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다고 말을 하는 걸 보고 있으니 다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세리아나는 볼 안쪽을 살짝 깨물어 웃음을 참아냈다.

그 모습에 바이샤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지만 딱히 그것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세리아나의 검은 베일을 벗겨내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가느다란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안색이 안 좋아.”

“피곤한 것뿐이에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빨리 끝내야겠군.”

“그럼 싱거운 싸움이었다 하실 거잖아요.”

“내 라누아께서 이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군.”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몸을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 앉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낮에 전투를 치르는 동안 끓어올랐다가 식은 피가 다시 뜨거워지는 느낌이었지만 그의 손과 입술은 얌전히 세리아나의 옷 위를 맴돌 뿐이었다.

“움직여야 하나?”

“밤은 제 시간인걸요.”

“헬라임께서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내게서 아내를 빼앗을 생각을 하셨을까.”

“빼앗으신 적 없어요.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뿐.”

헬라임의 제단에 전쟁을 선포하고 낮과 밤을 나누어 가진 쿠드라와 라누아는 같은 침실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한 침대 위에 누울 수는 없다.

헬라임의 규칙이었다.

바이샤는 단순히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자식을 빼앗긴 신의 심술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전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막으려는 조치였을 뿐이다.

“이만 쉬세요.”

“휴식이 필요한 건 세리아나 당신이야. 당신 얼굴을 봐. 피곤이 가득해.”

“낮에 전투를 치른 건 바이샤 당신인걸요. 저는 마차에 실려 아주 편안히 움직였으니 괜찮아요.”

고집스럽게 제 허리를 붙들고 있는 바이샤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어낸 세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천막에 머무르는 한 바이샤는 절대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움직여야지. 당장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은 없었지만 죽은 이는 없어도 다친 이들은 있었으니 그들의 상처를 돌보는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세리아나는 투덜거리는 바이샤를 침대 위에 억지로 눕히고 그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천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카얀과 진한 입맞춤을 나눈 후 제자리로 돌아온 치아린을 마주했다.

고작 며칠을 헤어져 있었을 뿐인데 다시 만난 연인이 반가워 어쩔 수 없었는지 치아린의 아랫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카얀과 시간을 좀 더 보내도 괜찮아.”

“더 붙어 있으면 오히려 갈증만 심해지는 걸요.”

“…….”

“라누아? 왜 얼굴을 붉히세요?”

“……그런 말을 의식도 없이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치아린은 정말 존경스러워.”

“네?”

달아오른 얼굴을 검은 베일로 가린 세리아나가 다친 전사들이 머무는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치아린이 뒤따랐다.

아직 새벽이 밝아오기 전, 세리아나의 뿌리 모를 불안이 얼굴을 드러내기 직전의 밤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침이 찾아왔다.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본 세리아나는 자신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폈다.

이대로라면 기절하듯 잠들 자신이 있었다.

누적된 피로를 제대로 풀지 못한 탓인지 요즘엔 제대로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드물 정도였다.

“라누아, 성벽 쪽에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바이샤의 천막으로 향하려던 세리아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하는 쥬드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부터 소란이 이는 것 같더니 라젠 쪽에서 ‘무언가’를 한 모양이었다.

아주 잠시 고민하던 세리아나가 소란이 난 쪽으로 발을 돌렸을 때 그곳엔 이미 굳은 얼굴을 한 바이샤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세리아나.”

“……바이샤?”

어제저녁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성벽에 뭐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자세히 살피려던 세리아나는 갑작스레 자신의 몸을 당겨 품에 안는 바이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지 마.”

“네?”

“당신의 눈에 담을 것이 아니야.”

성을 등진 채 바이샤의 품에 안겨 있는 세리아나 등 뒤로 싸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상하리만치 차갑고 시린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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