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전쟁 (4)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아주 곱게 성 하나를 접수했다는 소식은 곧 세리아나에게도 전해졌다.
이번만큼은 세리아나도 정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부에서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수도와 가까울수록 귀족의 격이 떨어진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리 처참한 수준일 것이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던 탓이었다.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그 마음, 이 치아린도 절절히 이해할 것 같아요.”
말을 잃은 주인과 종은 수도까지 남은 두 개 성도 이번과 마찬가지라는 추가적인 소식엔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세리아나가 전쟁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쯤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치아린.”
“네, 라누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좀 웃길지도 모르겠는데…….”
“말씀하세요.”
“처음에 국경을 넘었을 때…… 그냥 라젠을 정복해 버리는 편이 좋았던 게 아닐까?”
“라누아께서 그런 격한 말씀을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하지만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그때 차라리 수도까지 전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면 바이샤가 원하는 싸움을 한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이다지도 허무한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처지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바이샤가 이런 일을 겪지는 않아도 되었을 테니 상관없지 않을까? 세리아나는 허탈함에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는 제 남편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쿠드라께선 어찌하고 싶으시대?”
“이런 상황이면 헬라임께서도 굳이 삼일의 규칙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어요.”
“바로 수도로 향하겠다는 말씀이시구나.”
“네, 라누아의 허락을 원하세요.”
도망쳐 간 귀족들은 제외하고 그곳엔 진짜로 싸울 줄 아는 기사들이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라젠의 왕이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영토를 포기하며 불러들인 이들이었다.
그곳에서라면 바이샤가 원하는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쿠드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 전하렴.”
“명을 받습니다.”
거친 싸움이 일면 다치는 이가 생기고 죽는 이가 나온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바이샤와 그의 전사들의 영혼이 꺾여버릴지도 몰랐다.
몸에 난 상처는 치유할 수 있지만 영혼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바로 세리아나였다.
‘부디 다치지만 마세요. 꺾이지도 마시고…….’
제 남편이 제대로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아마 그들을 내려보고 있을 헬라임도 몰랐을 것이다.
“죽은 이의 항아리를 담을 자리가 많이 비었다고 했지?”
“……빈 수준이 아니라 이럴 거면 마차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을 정도예요.”
“식량은 넘치고?”
“오아시스로 나르는 것도 이제 한계라 남은 것을 도리어 정복한 땅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줘야 할 정도인걸요.”
“……좋아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는 상황이네.”
그 덕분에 헬라임 앞에 서슴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신전을 불태우는 데 앞장서는 라젠의 백성들까지 나타나 본의 아니게 이제 막 정복한 땅에 헬라임의 신도를 늘리는 꼴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치아린은 배를 곯고 있는 라젠의 백성들과 미어터지도록 가득 채워진 정복한 성의 곡식 창고를 떠올리며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어도 라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좋게 생각하세요, 라누아.”
“어떻게?”
“휴식을 취하실 시간이 생기셨잖아요. 이 기회에 모자란 잠이라도 푹 주무세요.”
“하지만…….”
“쿠드라께서 하실 일이 없으니 라누아께서 하실 일도 없는 걸 어쩌겠어요.”
“하아…… 지금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알겠어.”
고개를 저은 세리아나가 치아린의 손길에 따라 간이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웠다.
괜찮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잠을 버텨내기가 조금 힘들었던지라 그 손길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모처럼 만의 휴식인걸요. 한숨 푹 주무시다 일어나세요. 이 치아린이 곁에 있겠습니다.”
“응, 고마워.”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얕은 숨을 색색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 세리아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치아린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맺혔다.
낯선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 위해 분명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치아린은 제 주인의 핼쑥한 안색을 내려다보며 요즘 들어 제대로 식사도 챙기지 못하는 주인을 위해 영양식을 준비하라 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두 개의 성을 무난히 거쳐 수도에 다다른 바이샤는 그곳의 공기가 무척이나 무겁고 날카롭다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잡아당겨 웃었다.
마침내 그가 바랐던 전투를 치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맡은 전장의 향기에 그의 전사들이 흥분한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을 애써 누르고 있는 자신의 전사들을 눈으로 훑은 바이샤가 성벽 위에서 휘날리고 있는 라젠의 깃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얀.”
“네, 쿠드라.”
“저 깃발을 가장 먼저 쏘아 맞히는 녀석에게 상을 내리겠다 전해.”
“가벼운 내기는 흥을 돋우기에 좋죠. 바로 전하겠습니다.”
“첫 화살은 나다.”
“……다른 전사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실 작정이시라면 왜 상은 내리겠다 하시는 겁니까?”
몸이 달아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은 바이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스며든 흥분을 읽어낸 카얀이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누가 누굴 타박한단 말인가? 바이샤는 그의 주인이었고 그의 종인 자신 역시 주인을 따라 몸이 한껏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럼 동시에 쏘는 것으로 하시죠.”
“왜?”
“다른 녀석들에게도 기회는 주어야 하니까요.”
“마음대로 해라.”
라젠의 병사나 기사들은 어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본식 전의 간단한 유흥거리에 불가했다.
저 성벽은 어차피 무너질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 전투를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였다.
카얀의 입을 통해 바이샤가 내건 내기가 전해지고 서로 자신이 활을 쏘겠다 나서는 통에 차이툰의 진영이 시끄러워졌다.
외성의 꼭대기에 올라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터번 후작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 다다르기 전 어떻게든 저들의 힘을 빼놓아야 했다.”
“후작님…….”
“섬겨야 할 왕을 잘못 택한 벌을 이렇게 받게 되는구나.”
그는 과거 지금의 왕이 왕자였을 시절, 그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경쟁자를 제 손으로 직접 제거한 경험이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이곳까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온 차이툰의 사나운 전사들을 상대해야만 하는 임무가 내려졌다는 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성을 버리고 온 자들이라도 처벌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병사들의 분위기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제 성을 버리고 달아난 귀족들이 그 어떤 벌도 받지 않고 왕성 깊숙한 곳에 안전히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은 싸우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도망치더라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 굳이 목숨을 던져가며 싸울 필요가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것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거기다 정복지의 백성들이 차이툰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내려준 곡식으로 배불리 먹고 편안히 생활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딱딱한 빵을 배급받으며 주린 배만 간신히 달래고 있는 성의 병사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적이 자신들을 교란할 목적으로 흘린 소문이라 병사들을 입막음하기는 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터번 후작은 그것이 뜬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였다.
귀족은 도망쳐도 용서받지만 평민은 다르다.
그런 상황에 적에게 항복한 이들이 자신들보다 더 나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제 조국은 저 야만인들의 발에 짓밟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내고 이겨내야만 했다.
그러나 터번 후작은 자신이 그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검을 쥐고도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제 손이 바로 그 증거였다.
“후작님, 적들이 활을 겨눕니다!”
“어, 어떻게 할까요?”
“후작님, 명령을!”
다급한 부하들의 외침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터번 후작이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들이 겨눈 화살이 얼마나 매섭게 날아와 꽂히는지 알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제 손처럼 흔들렸다.
“방패를 들어 날아오는 화살에 대비하라! 그리고 궁수들을 대기시켜라!”
때로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터번 후작에겐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이미 두려움에 먹힌 몸이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버틴다.
그리고 이긴다.
할 수 없더라도 해내야 한다.
그는 불안해하는 병사들과 부하들을 달래며 투구를 고쳐 썼다.
“신이시여! 당신의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소서!”
터번 후작은 날아오는 화살을 바라보며 그가 섬기는 신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라젠의 왕성은 뒤집혔다.
기어코 그 야만인들이 여기까지 밀고 올라온 것이다.
차이툰의 전사들을 막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쳐온 이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전하! 그 야만인들이 코앞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터번 후작이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사신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사신을 보내서 달래야 합니다! 금은보화를 내어주고 여인들을 보냅시다! 야만인들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달랠 수 있을 겁니다!”
도망칠 때는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던 자들이 자신들의 왕 앞에선 서슴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라젠의 왕,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은 그 소란 속에 머리를 부여잡고 앉아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욕심만 많은 돼지 같은 놈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어! 그 야만인 계집의 멍청한 속살거림에 넘어가선 안 되었던 거야!’
라젠의 왕은 억울해졌다.
모든 잘못은 밀라니안 공작과 아눌라의 잘못이다.
제 마음이 약해 아주 조금 흔들린 죄로 이런 악몽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다.
“밀라니안 공작.”
“네, 전하.”
“이 일을 어찌 책임질 것이오!”
“저, 전하!”
“그대의 투기장에 있는 노예가 벌인 일 때문이 아니오!”
“그, 그것은……!”
밀라니안 공작은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왕의 말에 볼살을 푸들거리며 화를 참아냈다.
블루워터에 눈이 돌아 일을 수락했던 주제에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는 꼴이라니! 무능하기로 따지면 라젠, 다르미안 왕실 중 으뜸으로 무능한 자가 이런 때엔 잘도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는 이 나라의 왕이고 자신은 그를 섬겨야 하는 신하인 것을. 어쨌든 자신도 이번 위기를 넘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밀라니안 공작은 제 작위와 재산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야만인 계집에게 책임을 돌려? 아니야. 저들이 쳐들어온 것을 보면 분명 그 계집도 끝난 거야.’
가장 먼저 아눌라를 떠올렸던 밀라니안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이쪽의 거래를 전부 알고 쳐들어온 것이 분명한 야만인들이 그 계집을 살려두었을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불확실한 패는 버려야 자신이 산다.
그는 아눌라에 대한 생각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다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신이 살 방법 하나를 떠올렸다.
“엘라이어!”
“뭐?”
“전하! 엘라이어가 있습니다!”
라젠의 왕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애첩의 이름에 얼굴을 구겼다.
따지고 보면 엘라이어가 억지를 부려 낳은 딸이 만들어낸 문제가 아닌가! 당장이라도 그 목을 조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그는 밀라니안 공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야만인들의 왕이 그 가짜를 제법 아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전쟁도 그년을 잡아 오려 했던 것을 들켜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제대로 설명해 보게, 공작!”
라젠의 왕은 밀라니안 공작을 재촉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여우처럼 머리를 굴리고 혀를 놀리는 자이니 이번에도 분명 제 구미에 맞는 답을 내어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차올랐다.
“그 가짜가 제 어미에게 당해온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그래!”
“천박한 계집의 딸이라 수시로 모욕을 당했지.”
“손가락질당한 게 하루 이틀인가. 그런데도 그 천박한 년은 제 딸을 장신구처럼 달고 다녔고.”
“그래, 분명 어미에 대한 원망이 대단할 테지.”
“그럼 공작님 말씀은 설마…….”
밀라니안 공작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차례로 말을 붙였다.
평소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작자들이 이럴 땐 마음이 이렇게도 잘 맞았다.
“데마라 남작의 말처럼 분명 그 가짜는 어미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을 겁니다.”
“요점만 말하게 요점만!”
“엘라이어를 내어줍시다.”
“뭐?”
“암만 그래도 어미이니 원망이 가득해도 직접 죽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목을 직접 비틀어 내어주는 겁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셈이니 그 가짜는 묵혀 왔던 원한을 푸는 것이 될 것이고 저희는 그 일을 빌미로 살아날 길을 얻는 것이 되겠지요.”
애첩의 목을 비틀자는 말에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렸던 라젠의 왕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밀라니안 공작에게 이번에도 ‘설득’ 당했다.
이 얼마나 간단한 해결책이란 말인가! 어차피 외성은 터번 후작이 알아서 지킬 것이다.
지키지 못하면 제 가족의 목부터 치겠다 으름장을 놓아 놨으니 제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지킬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막아내는 사이 이쪽에선 엘라이어의 목을 비틀어 내놓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역시 그대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과찬이십니다.”
벌써 일을 해결한 것처럼 안심한 얼굴로 자신을 칭찬하는 라젠의 왕을 보며 밀라니안 공작의 머리는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치는 글렀다.
그렇다면 줄을 바꿔 타야지. 밀라니안 후작은 대륙 회의 때 한번 본 적 있는 바이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엘라이어 피오르를 당장 데려오라! 명령이다!”
“네, 전하!”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서로를 보며 웃음 지었다.
지켜보는 자에 따라 무척이나 역겹게 느껴질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