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2화 (82/110)

#82. 전쟁 (3)

타오르는 시체의 산을 뒤로하고 세리아나가 이끄는 무리가 국경지대를 떠났다.

죽은 이들의 사체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는 라젠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그들을 뒤따랐지만 뒤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바이샤의 자취를 더듬어 걷는 길은 모두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죽음이 뿌려진 길이었으나 거부감보다도 걱정이 따라왔다.

그에 비하면 죄책감은 아주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감정이었다.

세리아나는 가끔 옅어진 제 죄책감을 느끼며 흠칫 몸을 떨었지만 말 그대로 ‘가끔’, ‘아주 잠깐’ 고개를 들었다 사라지는 감정이었기에 그것으로 오래도록 고민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세리아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곁에서 머무르는 치아린의 눈에는 이전과 달라진 주인의 다른 점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나쁜 변화는 아니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좋았다.

치아린은 그것을 변했다고 받아들이는 대신 본래 가지고 있었던 지배자의 품격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카얀이나 야안이 있었다면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흐르는 것도 주인에겐 좋은 일이 아니라 충고해줬을 테지만 그들이 충고해도 듣지 않을 그녀였으니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라누아께선 점점 더 아름다워지시고 당당해지시고 우아해지시고…….”

“치아린…… 내 얼굴에 금칠이 가면 갈수록 과해져.”

“전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답니다.”

“정말, 못 말리겠어.”

치아린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세리아나의 얼굴을 티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살폈다.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주인이었다.

낮과 밤이 바뀐 데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피곤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마시라 말릴 수도 없으니…….’

세리아나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치아린이 진심을 담아 칭찬했던 것처럼 그 자리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했던 자리라 말하는 듯 그렇게 움직였다.

변화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라누아’라는 중심점이 생긴 것 하나만으로 바이샤가 치러 왔던 전투와 전쟁의 모습이 바뀌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변화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세리아나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함부로 멈추시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

세리아나가 제 일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주변의 일을 정리하는 것이 치아린의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쿠션 사이에 몸을 기댄 세리아나의 몸 위에 얇은 담요 하나를 덮어준 후 움직이는 마차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 * *

뒤따르는 세리아나가 제 역할에 충실하듯 바이샤 역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손쉽게 무너진 성 하나를 등지고 앉은 그는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연기와 피 냄새를 맡으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누아를 기다리십니까?”

“오시는 길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정리는 잘했겠지?”

“네, 미리 정리해 두었습니다.”

“심하게 상한 시체들은 안 보이는 곳에 잘 치워둬. 내 라누아께서 놀라시면 안 되니까.”

“네, 쿠드라.”

카얀이 건넨 물주머니로 목을 축인 바이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번 전쟁은 ‘전쟁’이라 이름 붙이기엔 너무 쉬웠다.

머리를 굴려 병법을 구사할 필요도 없었고 만족스러울 만큼 검을 휘두를 일도 없었다.

정말이지 짜증이 날 정도로 너무 쉬웠다.

제 전사들이 상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사막의 거친 전사들에게 이번 라젠행은 너무 심심하기만 했다.

다음번 전투엔 좀 더 성에 차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거라 매번 기대했지만 다섯 개의 성을 무너트리는 동안 자신과 전사들이 만족할 만한 전투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터번 후작이라는 자는 어디에 있지? 처음 이 땅을 넘어왔을 때 국경에서 우리를 상대했던 게 그자 아닌가?”

“쟈캄이 전하는 소식으론 수도의 왕성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라젠의 왕에게 미움받아 수도에서 먼 국경지대를 지킨다고 하지 않았나?”

“그 왕이라는 자가 겁을 집어먹은 모양입니다.”

“재미없군.”

세리아나를 얻기 위해 국경을 넘었을 땐 그럭저럭 신나게 검을 휘둘렀었다.

터번 후작이 제법 수를 읽을 줄 아는 자라 머리를 쓰는 재미도 있었고 상대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기도 했기에 바이샤도 그의 전사들도 제법 전투 같은 전투를 즐겼었다.

“수도의 외성을 지키고 있다고 하니 그때쯤엔 재미를 보실지도 모릅니다.”

“재미를 보는 것도 좋지만…… 잊지 마. 내 라누아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전부 끝내야 한다. 설마 내 전사 중에 라젠의 것들을 상대로 그리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없겠지?”

“당연합니다.”

그의 아내가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바이샤의 안에서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분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세리아나에게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세리아나가 자신을 밀어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피를 보는 험한 다툼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그의 아내에게 그 모습을 일부러 보여줄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오아시스의 소식은?”

“누라비가 입을 다문 채 식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눌라가 잡힐 때까지 절대로 죽게 둬선 안 된다.”

“그리 쉬운 길을 헬라임께서 허락하실 리 없습니다.”

카얀의 대답에 짧게 혀를 찬 바이샤가 바닥에 꽂아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헬라임이 허락한다 하더라도 그는 누라비를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감히 제 오아시스의 궁에서 수작질을 벌였다.

자신을 상하게 한 것도 모자라 세리아나까지 해치려 한 죄인을 빼돌리다니.

생각 같아선 시카 전체를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세리아나가 반대했다.

그녀가 단순히 인정에 이끌려 반대한 것이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시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요. 그들이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아눌라가 필요해요.]

살아남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필사적으로 아눌라를 찾아 자신들 앞에 데려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바이샤는 지고 있는 해를 등지고 조금 전 자신이 무너트린 성벽을 넘어 아직까지 비명이 들려오는 성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밤은 라누아의 시간이었으니 자신은 물러나야 한다.

“내 라누아께서 머무르실 장소다. 깨끗하게 정리해.”

“명을 받습니다.”

세리아나와 마주하는 시간은 짧을 것이다.

그가 정복해야 하는 성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베어야 할 적은 넘쳤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이 재미없는 싸움을 빨리 끝내고 세리아나와 함께 오아시스의 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이샤는 메마른 사막의 바람을 그리워하며 하루라도 빨리 그곳으로 돌아가 세리아나와 쭉 함께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삼 일째의 만남이 반복되며 차이툰의 전사들은 빠르게 라젠의 수도로 다가갔다.

망자의 시신을 태우며 피어오른 연기가 왕성에 가까워져 갈수록 전투는 점점 더 쉬워졌고 싱거워졌다.

겁을 먹은 라젠의 왕이 유능한 기사들을 죄다 수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 멍청한 결정에 비웃음조차 아까웠다.

적들을 난도질하는 것은 그들이었으나 이 상황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전사까지 생겨났다.

전쟁이라는 것은 본래 중심으로 향할수록 치열해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어째 중심으로 향할수록 그러한 것이 사라져 갔다.

전투와는 삼일 정도의 거리만큼 멀어져 있는 세리아나도 그것을 느낄 정도였다.

“……이번 전투엔 우리 쪽 전사자가 아무도 없다구요?”

“눈먼 화살에 잘못 맞아 팔뚝에 생채기가 난 멍청한 녀석은 하나 있지.”

그 멍청한 녀석이 라옴의 족장인 히아신이라는 것은 치아린에게 이미 전해 들은 뒤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천막으로 따라 들어가며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개미가 물고 지나간 자국 정도의 생채기였지만 다친 건 맞았으니 남의 상처에 웃음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르히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죠?”

“히아신 밑에서 그리 혀가 긴 자식놈이 나온 게 신기한 노릇이야.”

“맞는 말만 늘어놓아서 히아신의 얼굴이 노을 진 하늘만큼이나 붉어졌다고 들었어요.”

“바라의 타람이 그걸 건수 잡아 놀려먹다 다툼이 일었다는 소리도 이미 들었겠군.”

“전사들이 내기를 건 것도 알고 있는걸요.”

그리고 그 내기를 주도한 것은 우루의 족장 가라사였다.

그는 그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우루의 전사들과 함께 바이샤의 뒤를 쫓아 이 전쟁터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벌을 받기 위해 참여한 전쟁이었기에 암만 활약을 한다 하더라도 그 공을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차이툰 전사들 사이에 훌륭하게 녹아든 상태였다.

바이샤의 손에 이끌려 천막 안의 간이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세리아나는 그의 크고 거친 손이 자신의 베일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전쟁터 한가운데서 지나치게 한가롭고 여유로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들 힘 풀 곳을 못 찾고 있어서 그래.”

검은 베일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려놓은 후 냉큼 그녀를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은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잔뜩 벼르고 시작한 전쟁이 시시하게 흘러가니 그 자신조차도 속에 쌓이는 힘을 풀어놓질 못해 예상치 못한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헬라임께서 내건 규칙이 아니었다면 쉬지 않고 달려 지금쯤 라젠의 왕성을 치고도 남았을 거야.”

“한 번에 달릴 거리가 아닌걸요.”

“달리라고 하면 거절할 녀석들이 있을 것 같아?”

“……아뇨.”

“그렇지?”

바이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세리아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아내의 몸에선 여전히 짙은 라일 꽃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맡을 수 있는 향기였기에 사람 몸에서 나는 꽃향기에 대한 의문은 접어둔 지 오래였다.

“잠이 늘었다고? 많이 힘든가?”

“낮과 밤이 바뀌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크게 힘들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 망할 삼일의 법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 진지하게 헬라임과 대화를 한번 나누어 봐야겠어.”

반쯤은 진담인 그의 농담을 들으며 웃음을 흘린 세리아나가 자신의 어깨에서 이마를 떼지 못하는 바이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러 개로 땋아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가 그녀의 손바닥 아래 부드럽게 쓸려 내려갔다.

“또 삼일 뒤에나 보겠네요.”

“수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금방 끝날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요.”

오아시스의 성이 그리웠다.

내키면 온종일이라도 붙어 지낼 수 있는 두 사람의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세리아나의 그런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바이샤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지. 그리고 돌아갈 땐 함께 가는 게 좋겠어.”

“돌아갈 땐 제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야안이…….”

“그 정도는 헬라임도 용서해주실걸? 그분의 아들이 당장 말라죽을 판인데 한 번쯤은 눈감아 주시겠지.”

의미심장한 말에 세리아나의 귀 끝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무지했던 아내가 말속에 숨은 욕망을 알아듣고 부끄러워하기까지 그 모든 것을 제가 알려준 것 같아 뿌듯해진 바이샤가 그 귀 끝에 입을 맞췄다.

“움직이셔야죠.”

“이번에는 좀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전 재미가 없어도 좋으니 이번처럼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바람과 당신의 바람, 둘 다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군.”

바이샤는 옷깃으로 감싼 세리아나의 목덜미에 진하게 입을 맞춘 후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감을 사이에 두고 받은 입맞춤이었지만 그 입술이 닿은 자리가 화끈거리는 느낌에 세리아나의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 삼 일 후에 보지.”

“네, 그때 다시 만나요.”

조금은 익숙한 작별인사에 세리아나의 기도가 담겼고 마치 그것에 응답이라도 하듯 바이샤의 다음번 전투에서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바이샤의 바람은 무참히 깨어졌다.

“카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내게 설명할 말이 있나?”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내게 설명해줄 말이 있나?”

바이샤의 물음에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각 부족의 족장들과 후계자들이 무슨 약속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입을 다물었다.

카얀의 말처럼 그들도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에 이 상황에 대해 그들의 왕에게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말해봐.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진 녀석이 성의 주인이 되어야 적을 보고 제 성을 지키기는커녕 그 문을 활짝 열어두고 도망갈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전투는 없었다.

바이샤와 그의 전사들이 ‘재미있는’ 싸움을 기대하며 달려온 장소엔 그들을 향해 활짝 열린 성문과 살려달라 엎드려 빌고 있는 그 성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치겠군. 카얀! 쟈캄에게서 온 다른 소식은?”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실 텐데요.”

“지금 이것보다 더 기분이 더러워질 수 있다고?”

쟈캄이 날려 보낸 매가 가지고 온 쪽지의 내용을 살핀 카얀이 슬쩍 눈치를 주자 뒤에 서 있던 부족의 족장들과 후계자들이 조용히 몸을 뺐다.

여기에 더 붙어 있었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주 강력한 예감을 따른 것이다.

“수도의 왕성까지 무혈입성하실 수 있을 거라는 소식입니다.”

“……뭐?”

“앞으로 남은 두 개 성 모두 주인이 제 것을 버리고 수도로 달아났다 합니다.”

그의 말에 아주 잠깐 해야 할 말을 잃은 바이샤가 생각했다.

앞으로 남은 생에 지금 이것만큼이나 기분 더러운 소리는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아니, 다시 듣게 된다면 그날이 제가 화병으로 죽는 날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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