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1화 (81/110)

#81. 전쟁 (2)

붉은 나뭇가지를 든 사신. 세리아나는 라젠 국경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 몇몇은 세리아나를 향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등 뒤의 속살거림이었다.

앞에 나서서 말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의 말을 신경 써줄 만큼 그녀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리아나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달이 뜨자 이전까진 바이샤가 머물렀던,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머무는 천막을 나섰다.

그리고 두크란으로 정화한 물을 가운데가 움푹 파인 커다란 접시에 담아 라큘의 나뭇가지를 적신 후 그것을 피로 물든 땅 위에 흩뿌렸다.

땅에 남은 원한을 정화함과 동시에 원한에 매인 영혼들을 달래는 의식이었다.

달이 동쪽에서 떠오른 순간부터 횃불을 밝힌 폐허를 돌며 의식을 치른 세리아나는 달이 지면 천막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해가 뜨면 전사들을 이끌고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는 바이샤와는 완벽하게 반대되는 움직임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순간부터, 아니, 정확히는 헬라임의 제단에서 선언한 그 순간부터 밤은 세리아나의 시간이었고 낮은 바이샤의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해가 떠오르기 직전 동쪽부터 밝아오는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바이샤가 떠올랐다.

“얼마 후면 다시 만나실 텐데 어쩜 그리 애달프신지.”

“……그냥.”

“상처 하나 없이 웃고 계실 그분의 걱정은 깊게 잠들지 못하는 라누아이실 테니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이세요.”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도록 천막의 틈새를 꼼꼼하게 손본 치아린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바뀐 낮과 밤에 세리아나의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신전은 어떻게 됐어?”

“불타 무너져 흔적만 남았어요.”

“헬라임의 품에 안길 전사들은?”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붉은 천으로 덮는 중입니다.”

“그들의 무기는?”

“마찬가지로 준비 중이에요. 라누아, 이제 그만 주무세요. 오늘 저녁도 바쁘게 움직이셔야 한다구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오아시스에서 소식은?”

“없어요.”

“……응.”

“자자, 이제 진짜 주무세요.”

계속해서 말이 길어지는 세리아나를 억지로 눕힌 치아린이 이불을 그녀의 턱 끝까지 끌어올린 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그 손길에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세리아나가 잠에 빠져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에 쌓이는 피로를 모르셔서 큰일이야.”

전쟁은 적을 공격해 죽이는 일보다 자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몸으로는 실천하질 못하는 세리아나를 보며 치아린이 작게 속삭였다.

“좋은 꿈 꾸세요, 라누아.”

깊은 잠에 빠져든 세리아나는 들을 수 없는 인사가 어두운 천막 안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세리아나가 잠에 빠져든 시간만큼이나 빠르게 밤이 다시 찾아왔다.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 세리아나는 잠의 여운에 취해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밤의 서늘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이곳에서의 두 번째 밤이었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며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린 세리아나는 머리 위에 베일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라큘의 나뭇가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가자.”

말을 할 수 없는 시녀들을 뒤에 거느린 세리아나가 천막 밖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치아린이 라큘의 나뭇가지를 쥐고 있지 않은 그녀의 남은 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응. 그럼 움직이자.”

“네, 라누아.”

고요한 길을 걸었다.

뒤를 따르는 시녀들과 횃불을 든 전사들이 호위하듯 서 있는 길이었지만 바람 소리조차 숨을 죽이는 듯 고요하기만 한 길을 따라 세리아나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세리아나의 시선이 얇은 베일 너머, 길의 끝에 닿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타고 무너진 집의 형체가 가득했던 공간이 사방이 훤한 공터로 변해 있었다.

커다란 원을 그리듯 선 전사들의 손에는 세리아나를 호위하는 이들처럼 횃불이 들려 있었고 그 원의 한가운데엔 기름을 먹인 나무를 쌓아 만든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 붉은 천에 쌓인 이들이 누워 있었다.

국경을 넘으며 죽은 사막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머리카락으로 베이고 찔린 상처를 꿰매 ‘치료’를 마치고 깨끗한 물로 핏자국을 모두 닦아낸 전사들은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처럼 나무로 만든 제단 위에 누워 있었다.

치아린이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세리아나를 뒤따르던 시녀들이 제단 가까이 등을 지고 원을 그리듯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세리아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죽은 이들이 누워 있는 제단을 천천히 돌며 라큘의 나뭇가지를 흔드는 그녀의 입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말이 아닌 ‘어떤 것’으로 이루어진 노래는 야안에게 배운 것이었다.

글로는 전할 수 없는 노래이기에 나타난 이후 단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는 노래는 헬라임에게 올리는 기도이자 영원한 잠에 빠진 이들에게 전하는 작별인사였다.

라큘의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작은 바람이 일어 횃불을 흔들었다.

작은 제단 주변을 세 바퀴 돌며 노래를 끝마친 세리아나가 두 손을 하늘로 향해 올리자 다시 한번 크게 바람이 일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어라.”

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죽은 이들의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제단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들은 자신의 친구, 형제, 동료였던 이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던졌다.

미리 준비해 온 기름을 먹인 나무에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었다.

“하늘로 난 붉은 길을 따라 헬라임의 품에 이를 것이다.”

하늘을 향해 올렸던 팔을 내리고 라큘의 나뭇가지를 다시 흔든 세리아나가 불길이 넘실거리는 제단을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검은 천을 두른 말 못 하는 시녀들이, 횃불을 던진 전사들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은 전사들이 차례로 뒤따랐다.

소리가 없는 장례식이었다.

죽음을 애통해하는 울음과 땅을 적시는 눈물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어떠한 광기(狂氣)가 존재했다.

집 안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본 몇몇 라젠의 백성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제단의 불꽃이 사그라든 것은 달이 서쪽으로 모습을 감춘 새벽이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한 시간. 검을 옷을 입은 시녀들이 재만 남은 제단을 뒤져 죽은 이들의 뼈를 수습해 항아리에 담았다.

“오아시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잘 보살펴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을 잃은 무기들과 함께 편히 쉴 수 있도록 보살피겠습니다.”

죽은 이들의 뼈가 담긴 항아리 하나하나를 전부 라큘의 나뭇가지로 훑어 마지막 의식을 마친 세리아나가 치아린에게 당부한 후 몸을 돌렸다.

가장 큰 일을 해냈으니 이제는 떠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식량은 어때?”

“식량창고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창고 열쇠를 쥔 이곳 사령관이 제일 먼저 도망치다 죽었다고 해요.”

“……제일 먼저?”

“네.”

적이 취할 전리품으로 식량창고만큼 귀한 것이 또 있을까? 더군다나 차이툰은 사막으로부터 보급품을 조달해야 하는 처지였다.

만약 자신이 이곳의 책임자였다면 패색이 짙어진 순간 제일 먼저 식량창고부터 불태웠을 것이다.

치아린은 성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제 부하들과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친, 아니, 도망치려다 몸을 이등분 당해 죽어버린 적의 사령관을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찼다.

“보급품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구나.”

“네. 거기다 무기고도 제법 멀쩡하게 남아 있었어요. 라누아께서 허락하시면 당장 가질 것은 가지고 필요 없는 것은 전부 오아시스로 보내 녹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지시해 두겠습니다.”

“응.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명을 받습니다.”

치아린의 배려가 느껴지는 보고에 살풋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손을 살짝 흔들어 뒤를 따르던 전사 하나에게 명령을 내린 치아린이 라큘의 나뭇가지를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점점 더 능숙해지시네요.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을 하시는 것처럼요.”

“그래?”

“네.”

배우는 것과 직접 행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치아린은 야안에게 라누아가 해야 할 일을 배우며 자신이 할 수 있을까 염려하던 세리아나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마치 사막에서 라누아로 나고 자란 사람처럼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처리하고 있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누아께선…… 실은 사막에서 태어났어야 하셨던 분이 아닐까요?”

“응?”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치아린은 어쩐지 아쉬워졌다.

세리아나가 사막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바이샤, 카얀과 함께 쌓았던 추억에 세리아나가 더해진다면…….

‘그 이상 좋을 게 없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에 이르러 치아린이 세차게 고개를 저어 떠오른 생각들을 털어냈다.

자신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무척이나 약했고 무척이나 맹목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상만으로도 아찔할 만치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쿠드라께서 보신다면 또 놀려먹을 건수를 하나 잡았다며 기뻐하시겠네.’

치아린은 자신의 약점이 세리아나라는 것을 저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구는 바이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최근 들어 더 얄밉게 변한 그녀의 왕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자신을 놀려먹었을 것이다.

“본인의 약점도 나와 같으시면서 왜 그리 뻐기시는지.”

“치아린?”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갑작스러운 치아린의 혼잣말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맥락 없는 혼잣말을 자주 내뱉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딴청을 부리는 치아린에게서 고개를 돌린 세리아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 하늘 끝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다음번 해가 떠오르면 떠나는 거지?”

“네.”

“떠나는 여정에 길잡이를 할 이들은 오늘과 내일 푹 쉴 수 있게 해.”

“나눈 조대로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구분해 움직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치아린이 있어서 다행이야.”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당연한 거예요.”

“치아린이 말하는 그 당연한 일이 내겐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지금 떠오른 해가 다시 기울고 달이 떠오르면 세리아나는 다시 한번 황폐해진 이 땅 위를 걸을 것이다.

그때의 걸음에 담기는 것은 축복. 이제는 자신들의 땅이 된 이곳에 헬라임의 축복이 스며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라큘의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이다.

그리고 달이 저물 때쯤 또 다른 제단을 쌓을 것이다.

그때 제단 위에 오르는 것은 패배한 적들의 시신. 전사들을 헬라임의 품으로 인도했던 것과 다르게 낮고 넓게 그리고 규칙 없이 마구잡이로 쌓인 그 제단은 그들에게 헬라임의 축복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장례식이 아닌 탓이었다.

‘시체가 쌓인 땅에는 병이 깃든다고 했으니까.’

방치된 시체는 부패하며 공기를 오염시키고 땅을 병들게 하며 물을 오염시킨다.

이제는 그들의 영토가 된 땅을 병들게 할 수는 없기에 취하는 조치였다.

‘적들의 시체가 타오르는 순간 우리는 이곳을 떠날 거야.’

물론 모두가 떠나는 것은 아니다.

세리아나에게 지휘권을 받은 전사들이 남을 것이고 그들이 이 땅의 백성들을 감시하고 보살피게 될 것이다.

‘내가 정복한다면 당신은 거두어야 해.’

오아시스를 떠나기 전 바이샤는 그렇게 말했다.

세리아나가 해야 할 일은 거두는 것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이 땅, 이 사람들을 거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라젠의 것과는 그 어떤 것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은 게 세리아나의 바람이었으니까.

‘버리기 위해선 일단 가져야 해, 세리아나.’

세리아나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바이샤가 그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망가지도록 내버려 뒀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짓밟혀 사라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고 있었던 제 안의 난폭함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세리아나의 솔직한 마음은 그러했다.

‘버리기 위해 가져야 한다면…… 버림받지 않기 위해선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요, 바이샤?’

어두운 천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 머리에 썼던 베일을 벗으며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지금 떠올리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랑을 하라 충고하던 자신의 어머니, 엘라이어였다.

서로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행복하게 살자 말하던 어머니는 어찌 되었을까?

‘……버려지셨겠지.’

버림받았을 것이다.

의문과 동시에 떠오른 답이었다.

어머니는 라젠의 왕에게 버려졌을 것이고 피오르 백작가의 제 방에 틀어박혀 저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화병이 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것이고 차마 방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 선 하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술에 취해 계실까? 아마도 그렇겠지.

보지 않았음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풍경에 몸을 살짝 떤 세리아나가 두 손을 세게 움켜쥐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폈다.

저절로 바닥을 향하고 있던 고개가 정면을 향했고 위축되어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바르게 펴졌다.

‘미안해하지 않을 거예요.’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제 사랑을 양보하고 싶지 않으니까. 지키고 싶으니까.

‘서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그리 믿기로 했으니까. 저는 제 행복을 위해 절대로 미안해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게 다짐하는 세리아나의 귓가에 스친 바람이 이기적으로 살라 말하던 엘라이어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려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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