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0화 (80/110)

#80. 전쟁 (1)

세리아나는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검은색 천으로 사방을 막은 마차 안에 앉은 그녀는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바이샤와의 거리가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라누아, 곧 도착합니다.”

마차 밖에서 치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천을 들어 올려 그녀를 마차 안으로 불러들인 세리아나가 질문했다.

“죽거나 다친 이는?”

“신기할 정도로 적습니다.”

“있기는 하다는 소리구나.”

“……전쟁이니까요.”

아무리 용맹한 전사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피부는 강철이 아니다.

검에 베이고 화살에 맞으면 상처 입고 피를 흘리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차이툰의 전사들은 누구보다 앞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다치거나 죽는 이가 없을 수는 없었다.

“국경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어.”

“이미 한번 넘어본 벽인걸요.”

세리아나가 말머리를 돌렸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다칠 것이고 죽을 것이다.

미리부터 우울함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치아린도 그런 세리아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라젠은 수성전(守城戰)을 택했다고?”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기만 하면 승산이 있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에요.”

“한번 무너졌던 성벽을 보강도 하지 못했는데?”

“선택지가 없었을 거예요. 국경의 병사들과 라젠의 백성들은 이미 저희에게 한번 당한 적이 있어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버린 지 오래일 테니까요.”

라젠의 성벽이 무너졌다는 말에도 세리아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무너져 내려 제 전사들의 피해가 적었다는 말에 안도할 뿐이었다.

“쿠드라께선?”

“라누아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도착하면 언제든지 의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줘.”

“네, 라누아.”

말을 마친 치아린이 다시 마차 밖으로 나가고 세리아나는 혼자가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리아나의 그림자 속에 숨은 쥬드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그림자 속에 숨은 호위 전사들이 그녀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다른 이들의 그림자보다 조금 더 짙은 제 그림자를 살짝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빠르게 달린 마차가 국경에 닿았다.

무너진 성벽과 매캐한 연기, 그리고 짙어진 피비린내가 이곳에 있었던 참혹한 전투의 증거로 남아 있었다.

마치 폐허와 같은 풍경을 등지고 선 바이샤가 마차에서 내리는 세리아나를 맞이해 주었다.

“라누아.”

“승리를 축하드려요, 쿠드라.”

가늘고 촘촘하게 땋은 머리카락들을 한데 모아 높이 올려 묶은 바이샤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붉은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오아시스에서 떠날 때만 해도 걸치고 있던 웃옷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전투 중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제 손으로 벗어던졌을 것이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저런 녀석들을 상대로 상처라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러지.”

바이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의 천막 안으로 들어온 세리아나가 안쪽의 풍경을 살폈다.

작전 테이블 하나와 간이침대 하나가 놓여 무척이나 허전한 공간이었다.

세리아나의 검은 베일을 직접 벗겨준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눈빛에 담긴 걱정을 읽어냈다.

이런 삭막한 공간에서 제가 불편하게 지내고 있을까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잠만 편히 잘 수 있으면 충분해.”

“……식사는 제대로 챙기고 계신 거죠?”

“카얀이 그 말을 들으면 섭섭해할 거야.”

“카얀은 믿지만 바이샤는 전쟁 중에 가끔 번거롭다며 식사를 건너뛰기도 하신다 들었어요.”

“치아린이군.”

“식사…… 제대로 챙기고 계시죠?”

“제대로 챙기기로 하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노려보는 세리아나의 기세가 제법 무서워 바이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주인 앞에선 한없이 가벼워지는 입을 가진 치아린을 어떻게 골려 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쿠드라. 제게 무슨 짓이든 하시면 바로 라누아께 고자질할 겁니다.”

검은 천을 덮어쓴 아로의 새장을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치아린은 바이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탓에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치아린이었다.

특히 저를 골리려 머리를 굴리는 눈빛은 못 알아보려야 모를 수가 없어 치아린은 아로가 잠들어 있는 새장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샐쭉한 표정으로 바이샤를 노려보았다.

“라누아, 당신의 종이 나를 불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제 라누아께선 이 모자란 종께 너그러우시니 이간질을 하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저것 봐, 저 건방진 태도. 당신이 너무 싸고도는 탓에 가면 갈수록 기세등등해지잖아.”

“세상에 쿠드라. 전 태어나던 순간부터 기세등등했답니다?”

“흠, 그건 확실히 그렇군.”

“……두 사람 모두 그만해요.”

“내 라누아께서 원하신다면.”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세리아나의 부탁 때문에 마지못해 그만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바이샤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를 노려보길 멈추질 않는 치아린을 보며 세리아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 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 처음으로 걸음 한 세리아나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다툰 것이 분명했다.

“오아시스는 어떻지?”

“평온해요.”

“아눌라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전쟁을 선언하고 오아시스를 떠난 바이샤는 오로지 앞으로 달리며 적을 베어내는 일에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남은 모든 일은 세리아나의 몫이었다.

많은 일을 떠안게 되었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모든 일을 제 손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의외로 자신이 정치와 내정을 다스리는 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라간이 일을 대충 하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시카의 다른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어요.”

아눌라가 감옥을 감시하던 전사 하나를 죽이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날, 바이샤는 파라간을 불러 아눌라의 추적을 명했다.

거기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시체만 들고 돌아와도 좋다는 즉결권까지 파라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눌라의 생사권을 모두 파라간에게 넘긴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라비가 감옥 안에서 바이샤에게 만남을 청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전사들과 함께 오아시스를 떠났다.

그리고 삼일 뒤 그의 뒤를 따라 오아시스를 떠나는 세리아나 역시 누라비의 청을 무시했다.

“시카 전체가 매달렸나?”

“자신들이 붙잡지 않으면 당신의 사막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에요.”

“멍청한 녀석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니었군. 그리고 나의 사막이 아니라 우리의 사막이야.”

세리아나의 말에서 신경을 거슬리는 부분을 찾은 바이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웃는 얼굴로 미안하다 속삭인 세리아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아눌라와 누라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사막에 있는 이상 절대 도망칠 수 없어요.”

“사막을 벗어났다면?”

“글쎄요…… 아눌라가 이 사막을 떠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 이건 그냥 제 생각이에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작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던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가볍게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세리아나는 익숙하게 그의 품을 파고들며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치아린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 천막 안으로 막 들어서던 카얀이 모르는 척 천막 밖으로 몸을 피했다.

“걱정은 하지 않아. 세리아나 당신이 다 잘할 테니.”

“네.”

“그러니 당신도 그만 걱정해. 나는 절대로 다치지 않고 죽지 않으니.”

“……절대로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에요.”

“요즘 날 야단치시는 데 재미를 붙이신 건가?”

“바이샤.”

“음, 점점 더 이기기가 어려워지니.”

품에 안긴 채 저를 올려다보는 연둣빛 눈동자 가득한 걱정이 바이샤의 심장을 살살 간지럽혔다.

오아시스의 궁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은 이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이런 곳에선 울릴 수 없으니 참도록 하지.”

“……지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할게요.”

바이샤의 턱 끝에 입을 맞추고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난 세리아나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싱긋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가슴속이 울렁이는 것을 느낀 바이샤는 이 전쟁을 하루라도 더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다 생각했다.

“오늘 바로 떠나세요?”

“그래야지.”

“또 삼일 뒤에나 보겠네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앞서 달려나가는 쿠드라와 뒤에서 따라가는 라누아의 거리는 정확히 삼일이었다.

삼일의 거리를 두고 앞서 나간 쿠드라는 적들을 베고 뒤따른 라누아는 영혼들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삼일 뒤에도 무탈하신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길 헬라임께 기도할게요.”

“가장 아끼는 자식의 기도를 무시할 분이 아니시니 걱정하지 마.”

“네…….”

세리아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바이샤가 제 손으로 벗겨낸 검은 베일을 다시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얇은 베일 너머 비치는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그의 호박색 눈동자 속에 담겼다.

“치아린, 최선을 다해 내 라누아를 지켜라.”

“네, 그러겠습니다.”

작별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베일을 사이에 두고 세리아나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춘 바이샤가 천막을 벗어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세리아나는 이 짧은 헤어짐이 아쉬워 당장이라도 그의 뒤를 쫓아가고픈 충동을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금방 다시 만나게 되실 거예요.”

“응.”

베일을 쓰고 있음에도 세리아나의 표정을 빠르게 읽어낸 치아린이 그녀를 달랬다.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위로에 애써 미소 지으며 바이샤가 떠난 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준비는 모두 마쳤어?”

“네, 언제든 시작할 수 있게 모두 대기 중입니다.”

“쿠드라께서 전사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면 바로 시작해.”

“명을 받습니다.”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전사들이 이동을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세리아나는 뿔피리의 커다란 울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이샤가 머물렀던 천막 안에 머무르다 그 소리가 완전히 떠나간 후에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곳곳에서 횃불이 피어올랐다.

국경지대에 살아남은 라젠의 백성들은 모두 제집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침략자들이 이 이상의 해코지 없이 지나가길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 전사들의 시신은 모두 모았어?”

“모두 수습해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두어 개만 더 찾으면 됩니다.”

“적들의 시신은 한데 모았고?”

“네, 무너진 공터가 있어 그곳에 모두 모아두었습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

“명을 받습니다.”

치아린과의 대화가 끝나자 라누아의 궁에서부터 따라온 시녀들이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시녀임과 동시에 라누아를 섬기는 신녀들이었다.

밋밋한 검은 베일을 세리아나처럼 뒤집어쓴 그녀들이 오아시스 주변의 갈대로 짠 커다란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세리아나의 손짓에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금사로 수를 놓은 붉은 천에 쌓인 라큘의 나뭇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죽은 이들을 헬라임의 품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그 성스러운 나뭇가지는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생생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밤 달이 떠오르면 장례를 시작할 거야.”

“네.”

“숨어 있는 패잔병들을 찾아 모조리 끌고 오렴.”

“명을 받습니다.”

치아린과 시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은 전사들의 장례를 위해 깨끗한 장작을 찾을 것이고 치아린은 전사들과 함께 도망친 패잔병들을 찾아낼 것이다.

세리아나는 모두가 떠난 후에야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쥬드의 호위를 받으며 피가 뿌려진 폐허를 걷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라큘의 나뭇가지가 사방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반응하듯 잘게 떨려 왔다.

세리아나는 나뭇가지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며 피비린내를 쫓아 걸었다.

이것은 정화의 의식이었다.

육신에서 떨어져 나와 죽은 자리를 맴도는 영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비록 그 영혼을 육신으로 되돌리는 힘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죽으며 받은 고통과 가슴속에 남은 원한을 달래어 주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라큘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걸어가는 길 뒤로 수많은 영혼이 세리아나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국경지대의 백성들은 검은 옷을 입고 붉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걷고 있는 그녀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압도적인 무위에 완벽하게 패배했고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검은 옷을 입은 세리아나는 불길함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일 것이다.

“쥬드.”

“네, 라누아.”

“치아린에게 이곳에 신전을 찾아 태워버리라고 전해.”

“명을 받습니다.”

쥬드의 손짓에 주변에 숨어 있던 호위 전사 하나가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사라졌다.

치아린에게 가기 위함일 것이다.

세리아나는 기척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제 기도를 외면했던, 이제는 섬기지 않는 옛 신을 떠올렸다.

복수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가 그리했듯 그 존재를 외면하고 무시하며 지워버리려는 것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을…… 라젠의 신도 이제는 알게 될 거야.”

바람이 불어와 세리아나가 쓴 베일 끝을 흔들었다.

마치 그러지 말아달라 매달리는 손짓을 닮은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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