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저마다의 준비 (4)
아눌라가 도망쳤다.
낮잠을 즐기고 일어난 바이샤와 세리아나가 두 사람의 종에게 들은 첫 번째 소식이었다.
몸이 안 좋은 척 감시하고 있던 전사를 감옥 안으로 불러들인 후 숨기고 있던 날붙이로 그 목을 찔렀다고 한다.
그리고 소란을 알아차린 다른 전사가 도착하기 전 아눌라는 그 모습을 감췄다.
“기가 막히는군.”
침대 위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켠 바이샤가 중얼거렸다.
도망이라니. 감옥에 가두기 전 몸에 숨긴 무기를 수거하는 것은 전사들 모두가 알고 있는 기본 수칙이었다.
그의 충실한 전사들이 그걸 어겼을 리는 없으니 분명 감옥에 갇힌 이후 ‘누군가’가 전해 준 것이리라.
바이샤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누라비를 잡아들여라.”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파라간을 불러와.”
“네.”
바이샤를 따라 뒤늦게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세리아나의 시선이 그의 등에 가 닿았다.
상처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녀의 눈엔 여전히 화살을 맞았던 자리의 흔적이 보이는 듯 했다.
“아눌라가 어디로 달아났는지 누라비가 알까요?”
“글쎄. 그래도 확실한 건 알든 모르든 그자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지.”
“그를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결국 딸을 택했으니 남은 것을 거두어야지.”
누라비에게서 시카를 빼앗겠다는 소리였다.
세리아나는 파라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라간은 바이샤가 누라비에게서 빼앗은 시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카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걱정이 있어 보이는군.”
“시카의 일을 생각했어요. 다음 족장의 자리에 유력한 건 파라간이지만 그는 슈라를 잃은 날 이미 시카를 버린걸요.”
“그렇다고 파라간의 어미에게 족장의 자리를 물려주자니 그녀의 남편이 누라비로군.”
파라간의 어미이자 누라비의 현 아내인 이아오는 계보가 바뀌기 이전 족장의 핏줄을 이어받은 유일한 생존자였으며 부족 내에서도 현명한 이로 칭송받는 자였다.
거기다 파라간 다음으로 족장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것 또한 이아오였다.
파라간은 족장의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이미 이름 앞에 시카가 아닌 차이툰을 붙이고 있는데다 족장의 의무인 ‘후손’을 내어놓는 일에 무척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아내로 받아들인 이가 하누이기 때문이다.
아눌라가 감옥으로 끌려가고 파라간은 하누에게 약속을 지켰다.
헬라임 앞에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결혼식은 없었다.
그저 야안을 찾아와 신께 고하기를 청했을 뿐이다.
하누는 불만조차 품지 못했다.
마침내 그의 옆자리를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그게 기쁨의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슬픔의 눈물이었는지는 헬라임과 하누만이 알겠지.’
침대 위에서 완전히 내려온 세리아나는 고개를 저어 하누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누가 아니라 도망친 아눌라의 행방이었다.
세리아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허리를 휘감는 바이샤의 팔에 끌려가듯 안겨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먼저 닿아오는 그녀에게 벌써 적응한 것인지 바이샤는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시카는 전쟁에 참여할 수 없겠네요.”
“이미 당신이 제외하지 않았나?”
“누라비나 아눌라가 아닌 다른 족장이 있다면 충성을 증명할 기회 정도는 줄 생각이었는걸요. 바이샤도 그런 생각이었잖아요.”
“점점 내 속을 읽는 것에 익숙해지시는군.”
“칭찬이죠?”
“하하,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여기서 더 귀여워지면 오늘 밤 곤란해질 텐데?”
“네?”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농밀해지는 것을 느낀 세리아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런 부분은 여전히 어려웠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세리아나가 저절로 익혔다는 점이었다.
“하실 일이 있잖아요.”
“흐음…….”
“준비하셔야죠. 전 이미 끝낸걸요.”
“게으름을 피운다 혼내시는 건가?”
“그럴 리가요.”
포기하지 않고 허리를 쓰다듬는 바이샤의 손을 붙잡아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춘 세리아나가 그의 품을 빠르게 벗어났다.
조만간 해가 질 터인데 지금 침대로 끌려 들어갔다간 내일 아침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까지 세리아나를 안고 있던 품이 허전해진 것을 느낀 바이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날이 갈수록 세리아나에게 이기는 것이 힘들어진다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기꺼워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달이 떠오르면 다시 만나지, 나의 라누아.”
“네, 그때 다시 만나요.”
바이샤는 지금부터 달이 뜨기 전까지 각기 다른 일곱 짐승을 사냥해야 한다.
치아린은 그것이 전쟁을 나서기 전 헬라임에게 올리는 기도라고 세리아나에게 알려주었다.
각기 다른 짐승의 일곱 피를 섞어 오아시스 경계에 뿌리고 그것을 밟으며 떠나는 것이 기도의 마지막 순서였다.
수많은 전사의 붉은 족적이 적의 피로 만든 붉은 길 위에 서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로 남겨지는 것이다.
그 맹세를 위해 일곱 짐승은 반드시 쿠드라가 직접 사냥해 피를 뽑아야만 했다.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기에 시간이 제법 필요한 일이었다.
이미 점심을 넘어서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이샤도 세리아나도 그가 사냥에 실패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치아린, 이만 방으로 돌아가자.”
“아로는 어떻게 할까요?”
“요즘 쿠드라와 사이가 좀 좋아진 것 같으니 깨우지 마.”
“……아로가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를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아니야, 정말로 요즘엔 사이가 좋아.”
좋은 척하는 거랍니다, 라누아.
치아린은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서로에 대한 경쟁 심리만 더욱 강해진 두 마리 수컷, 아니 남자 하나와 수컷 하나는 세리아나가 보지 않는 곳에서 다투고 있었다.
물론 다툰다고 해봐야 눈싸움이고 그 싸움의 끝은 바이샤의 승리로 번번이 끝나버리곤 했기에 아로에겐 이득이 하나도 남지 않는 다툼이었다.
“가만 보면 닮았단 말이지.”
“치아린?”
“아뇨, 혼잣말입니다.”
바이샤와 아로의 닮은 점을 생각하며 생긋 웃어 보인 치아린이 입을 다물자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혼잣말이었느냐 물어보면 치아린은 답해줄 것이 분명했지만 괜히 말을 숨긴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세리아나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이 의문을 묻어두기로 했다.
자신의 방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치장을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순서였으나 단 한 가지, 걸치는 옷의 색이 달랐다.
평소 몸에 휘감았던 화려한 붉은색의 옷이 아니라 짙고 어두운 검은색의 옷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옷 위에 놓인 수가 금사가 아닌 은사로 놓였다는 사실이었다.
목 위부터 발끝까지 살갗을 전부 감싼 검은 옷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 그리고 정수리부터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지는 반투명한 검은 베일.
옷과 베일의 끝은 모두 은사로 수를 놓았고 목걸이와 팔찌, 발찌는 은으로 만들어 전부 깨알만 한 두크란을 듬성듬성 박아넣은 것이었다.
이것은 상복이었다.
동시에 피를 뿌리고 죽어갈 사막의 전사들을 이끌 여신의 정복(正服)이었고 적을 죽음으로 이끌 전사의 치장이었다.
라누아의 활은 적을 향하지 않을뿐더러 그녀는 칼을 들고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라누아는 쿠드라와 마찬가지로 사막의 전사였다.
검은색 상복은 그녀의 갑옷이었고 손에 든 라큘의 나뭇가지는 날을 날카롭게 벼린 검이었다.
그녀가 부리는 것은 전사의 영혼이었고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은 적의 영혼을 다시 한 번 난도질해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별다른 화장 없이 입술을 붉게 칠하는 것으로 단장을 마친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너머 온몸을 검게 물들인 여자가 서 있었다.
곧이어 치아린이 건넨 라큘의 나뭇가지를 손에 쥔 세리아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밖 검은 하늘 위로 크고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헬라임의 제단으로 향하는 길, 검은색 휘장으로 장식한 가마를 탄 세리아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으나 세리아나는 그녀를 뒤따르는 많은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세리아나가 탄 가마가 멈추고 뒤따르던 발소리도 멈췄다.
가마가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눈을 떴다.
헬라임의 제단으로 오르는 길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이는 여전히 세리아나와 바이샤 단 두 사람뿐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가마에서 내린 세리아나는 손에 쥐고 있던 라큘의 나뭇가지를 가볍게 품에 안고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길의 끝, 제단의 첫 번째 계단 아래 바이샤가 세리아나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옷을 입고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땐 새하얀 꽃비를 맞았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길 위에 쏟아지는 것은 달빛 하나뿐. 세리아나는 횃불도 올리지 않는 길을 천천히 걸어 바이샤 앞에 도착했다.
“라누아.”
“쿠드라.”
바이샤가 내민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걸음 하나에 적막이, 또 다른 걸음 하나에 고요가 누적되어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두 사람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짓눌리는 듯한 침묵을 이기고 제단의 꼭대기에 오른 두 사람이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바람 소리가 소란하다 느낄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바이샤였다.
허리에 찬 검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자신의 전사들을 내려보는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헬라임의 마지막 자식. 바이샤 쿤 쿠드라. 나의 전사들에게 고한다.”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퍼져나갔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적이 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헬라임의 자식들에게 활과 칼을 겨누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세리아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라젠의 왕과 왕세자, 루미어스 왕녀의 얼굴. 저를 조롱하던 라젠의 귀족들과 음흉한 눈길로 저를 품평하던 구어슨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
엘라이어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뜬 세리아나는 달빛 아래 빛나고 있는 바이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큘의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적들의 붉은 피로 헬라임께 이르는 명예로운 길을 열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앞장서 적의 목을 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등을 따라 붉은 길 위를 걷게 될 것이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환호 대신 언제든 당신의 뒤를 따라 달리겠다 발을 굴려 대답하는 전사들의 모습에 바이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의 전사들은 이번에도 분명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바이샤는 달빛 아래 자신과 마찬가지로 눈을 빛내고 있는 전사들을 훑어본 후 몸을 살짝 비틀어 세리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세리아나의 차례였다.
“나는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 세리아나 쿤 라누아. 나의 전사들에게 고한다.”
세리아나가 입을 여는 순간 땅의 울림이 멈췄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다시금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지만 세리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너희가 연 붉은 길 위로 명예로운 전사들의 영혼을 내가 이끌 것이다! 나는 가장 뒤에 서서 너희의 영혼을 거둘 것이고 붉은 길을 따라 헬라임께 너희들을 인도할 것이다!”
라누아는 영혼을 이끄는 자. 가장 뒤에 섰으나 누구보다 앞서 전사들의 영혼을 보듬는 자였다.
“나 세리아나 쿤 라누아. 신의 이름으로 나의 명예로운 전사들을 축복한다!”
말을 끝마친 세리아나와 바이샤가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검은 베일 너머 바이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으나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따라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은 세리아나가 라큘의 나뭇가지를 쥔 손을 앞으로 내밀자 바이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세리아나는 라큘의 나뭇가지를 바이샤의 정수리부터 명치까지 일자로 쓸어내렸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여전히 생생함을 뽐내고 있는 잎사귀가 닿은 자리마다 달빛이 머물렀다.
백 년 만에 내려진 라누아의 축복에 전사들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바이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전쟁터로 뛰어나가 적의 목을 비틀고 싶은 난폭한 마음을 간신히 내리누른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밝혀라!”
붉은 길을 따라 수십 개의 횃불이 피어올랐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횃불 아래 사막 전사들의 그림자가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그들의 마음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모두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땀이 메마른 대지를 적실 때까지 춤을 춰라! 헬라임께서 우리의 노래와 춤을 듣고 보심에 우리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바이샤의 선언에 드디어 침묵하던 전사들이 소리를 질러 대답했다.
공기를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크고 높게 울려 퍼지는 함성에 세리아나는 제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승리할 거야.”
“반드시 이기실 거라 믿어요.”
얇은 베일을 사이에 두고 바이샤와 세리아나의 입술이 부딪혔다.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면 피비린내가 풍기는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바이샤는 이길 것이다.
세리아나는 베일 너머로도 느껴지는 뜨거운 바이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며 헬라임을 향해 당신의 마지막 자식을 지켜달라 기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