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저마다의 준비 (3)
아눌라는 누라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신이 라누아의 홀에서 모욕적인 일을 겪은 이후 한참 만에야 찾아와 도망치라 말하는 아비의 눈이 절박해 보이는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이라니요?”
“쿠드라께서 너의 죄를 모두 아신다.”
“무, 무슨……!”
“네가 저지르고 내가 감춘 모든 것들이 밝혀질 것이다.”
“누굽니까? 하누? 파라간? 아니면 그 라젠의 사생아?”
“아눌라! 말을 조심해라!”
창살에 바싹 붙어 매달린 누라비가 작지만 강한 목소리로 아눌라를 질책했다.
그리고 눈을 살짝 굴려 감옥을 지키고 선 전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아눌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달아나라.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다.”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창살을 세게 부여잡은 아눌라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으며 누라비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아가. 너를 구할 길이 없구나.”
“……쿠드라를 뵙게 해주세요.”
“아눌라.”
“아버지가 할 수 없다면 제가 하면 됩니다. 제가 간청드리면 분명 쿠드라께선 들어주실 거예요.”
저 잘못된 믿음은 누라비가 준 것이다.
그는 제 사랑이 소중한 딸을 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망쳤다.
무조건 보듬기만 해서는 아이는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사막의 길잡이로 너보다 뛰어난 자는 없다. 아눌라, 도망치거라. 그리고 절대 돌아오지 말거라.”
“아버지!”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다. 내가 너를 이리 만들었구나.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말을 끝으로 누라비는 자리를 떠났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바이샤가 허락한 시간이 끝났다는 전사의 재촉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누라비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눌라는 제 아비가 겹쳐 쥐었던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배신한 하누와 건방진 파라간, 그리고 역겨운 세리아나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쿠드라께서 날 버리실 리 없어.”
버릴 생각이었다면 그녀가 슈라를 죽였을 때 버려야 했다.
그녀가 저지른 모든 죄를 밝혀내고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바이샤는 그녀의 죄를 덮었다.
아눌라는 ‘라누아’를 죽이려 두 번이나 시도했다.
모두 실패했지만 시도만으로도 목이 떨어져 나갈 중죄였다.
그러나 어떠한가? 그녀는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쿠드라의 몸에 박힌 화살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게 분명해.’
세리아나를 해치려 했기에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다.
바이샤의 몸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눌라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자신했다.
바이샤를 만나 그 사소한 오해를 풀 수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을 맞추려 한 것이 아니라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낸 라젠의 사생아를 혼내주려 한 것이라 말하면 분명 믿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눌라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바이샤가 깨어나기도 전 자신을 견제하려는 라젠의 사생아에 의해 감옥에 끌려온 것이 분했다.
‘그분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 무서웠던 게 분명해.’
아눌라는 머리가 나쁘지 않다.
엄격하게 따져 총명한 머리를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하누의 배신과 달아나라 간청하던 누라비의 일그러진 얼굴이 아눌라의 총명한 머리를 둔하게 만들었다.
‘달아나라고? 왜?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손바닥 아래 단단하고 날카로운 쇠붙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감시하는 눈을 피해 창살에 손을 겹친 그 찰나의 순간 아비가 제게 넘겨준 탈출을 위한 도구였다.
아눌라는 그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세리아나는 야안의 안내를 받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바이샤와 함께 오아시스의 곳곳을 누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인지 걷는 걸음마다 바뀌는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치아린이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조만간 제가 길을 찾는 법을 가르칠 겁니다. 그러면 홀로 지겹도록 왕복해야 할 테니 지금의 섭섭함 같은 건 금세 잊을 겝니다.”
성역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라누아와 라누아의 종만이 오를 수 있고 한 번에 길에 오를 수 있는 자는 단둘뿐이었다.
치아린이 길을 미리 익혀두었다면 지금 이 길을 안내하는 이는 야안이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아린은 이 길을 걷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세리아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 이게 다 미리 길을 알려주지 않은 야안의 탓이라 투덜거리던 치아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쿠드라가 깨어나신 이후 라누아 주변의 공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
“네, 무거운 공기 하나가 걷힌 것 같습니다.”
야안의 말에 세리아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느낀대로 세리아나는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걱정 하나를 내려놓았다.
거울 너머 보았던 붉은 길 위의 바이샤.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운명의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절망했지만 바이샤가 깨어난 이후 그것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처음부터 바이샤에게 사랑받겠다는 마음은 없었어. 그저 그의 곁에 있고 싶었을 뿐.’
마음이 무너졌던 것은 그녀가 한 착각 때문이었다.
애초에 홀로 시작된 외사랑이었다.
보답 받기를 바라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그저 그의 곁에 머물며 사랑하고자 했을 뿐 사랑받으려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자신이 바이샤의 운명의 상대가 아닐 뿐이었다.
‘바이샤가 붉은 길 위에 오를 때 나는 없어.’
차이툰은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재혼은 오로지 배우자의 사망 이후에만 가능했다.
그 말은 세리아나가 살아 있는 동안엔 거울이 보여주었던 그 모습을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죽기 전까진…… 바이샤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어.’
그거면 됐다.
세리아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죽은 후 바이샤가 맞이할 상대가 궁금하긴 했지만 거울은 깨진 이후다.
‘하긴…… 깨지지 않았더라도 보지는 못했을 거야. 거울이 비추는 건 바이샤 한 사람뿐이니까.’
낮게 내려온 나뭇가지 하나를 걷어내며 세리아나는 더는 거울 속 바이샤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내 마음을 모두 바이샤에게…… 이전처럼 망설이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야.’
바이샤가 느꼈던 변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전의 세리아나는 제 마음을 표현하는 걸 아주 많이 부끄러워했었다.
그 부끄러움이 망설임을 만들었고 그 망설이는 사이 언제나 먼저 바이샤가 움직였기에 그녀 스스로 먼저 움직일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그러지 않을 것이다.
먼저 표현하고 먼저 움직일 것이다.
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후회가 남지 않도록. 바이샤 곁에 머무를 또 다른 누군가를 시샘하지 않도록. 끝에 이르러 헬라임의 품에 안겼을 때 바이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할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세리아나가 생각에 잠긴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야안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세리아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었다.
오아시스 주변이라곤 해도 해가 머리 한가운데 오른 낮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안개가 생겨난 것일까?
“여기서부턴 라누아 혼자 움직이셔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종은 길잡이 역할을 할 뿐.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라누아만 가능하십니다.”
유독 안개가 더 짙게 느껴지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야안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로 세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처음 야안에게 이 성역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그녀가 해야 한다는 일이라기에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탓일까?
짙은 안개 너머를 바라보는 세리아나의 눈동자에 두려움과 망설임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가짜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라누아의 자격’을 생각하면 쉽사리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길 위에서 바이샤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 바이샤의 운명의 상대가 그녀라면 라누라의 자격 역시 그녀가 가지는 것이 맞아.’
과연 성지가 자신을 받아들일 것인가?
잠시 우울한 생각에 젖어 들었던 세리아나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기로 다짐한 것이 얼마 전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 각오를 다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다시 예전처럼 미리 겁먹고 있었다.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찾으면 돼. 아니, 찾을 거야.’
세리아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사이 더욱 짙어진 안갯길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했지?”
“네.”
“알겠어.”
조금 긴장은 되었지만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세리아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절로 알게 되는 길.
처음 들을 때만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짙은 안갯속을 걷는 동안 세리아나는 그것이 정말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낀 낯선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미약하게 남아 있던 두려움과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신기하다? 신비롭다? 대체 어떤 말로 지금의 이 기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삐이-”
“아로?”
무아지경으로 길을 걷다 들려온 익숙한 울음소리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지금은 아로가 잠들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세리아나는 작게 들려오기 시작한 날갯짓 소리에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늘 위에서 안개를 뚫고 나타난 아로가 그녀의 가느다란 팔뚝 위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왔어?”
“삐-삐-”
짧게 끊어 우는 소리가 마치 자신을 내버려 두고 어딜 가는 것이냐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세리아나는 제 팔뚝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내려앉는 법을 터득한 아로의 둥근 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같이 갈까?”
“삐-”
오랜만에 세리아나를 독점하게 된 것이 즐거운지 아로가 꽁지깃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세리아나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위해 앞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주변을 새하얗게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빠른 속도로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세리아나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아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쿠락은 라누아의 전령이라 불리는 새였다.
헬라임의 선택을 받아 라누아를 섬기는 신조(神鳥). 그렇다면 지금 이건 아로가 부린 마법이 아닐까?
“네가 한 일이야?”
“삣삣!”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모습이 꼭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아 세리아나는 기꺼이 상을 내리기로 했다.
아로의 부리 끝을 손끝으로 살짝 문지르고 그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춘다.
바이샤가 곁에 있었다면 날짐승이 어디 감히 제 라누아의 입맞춤을 가져가느냐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바이샤에겐 비밀이야. 알지?”
“삐이-”
이 모습만 본다면 쿠락이 사막에 적수가 없는 맹금류라는 사실을 아무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세리아나는 애교 가득한 아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옅게 남은 안갯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세리아나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자신의 목적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거대한 붉은 나무였다.
흙 밖으로 부분부분 튀어나온 뿌리부터 하늘을 향해 치솟은 가지, 그리고 그 가지에 매달린 작고 둥근 나뭇잎까지 모든 부분이 붉은 나무였다.
“이게 라큘이구나…….”
헬라임이 라누아를 위해 내려보낸 신목(神木). 더러운 것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두크란과 비슷하지만 지닌 힘은 비교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신의 영역에 있는 나무였다.
세리아나는 천천히 나무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끝없이 하늘로 솟은 가지 끝은 목이 꺾일 듯 올려다보아도 두 눈에 담기지 않았다.
나무가 위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라큘뿐일 것이다.
나무 가까이 다가간 세리아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나무 표면을 쓰다듬었다.
언제 날아오른 것인지 아로는 라큘의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그런 세리아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뜻해.”
거칠어 보이는 나무껍질이 세리아나 손바닥 아래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야안에게 들은 대로라면 라큘의 나뭇가지를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세리아나에겐 나뭇가지를 잘라낼 만한 도구가 없었다.
성역에 날붙이를 들고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앗!”
나무를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순간, 툭 하고 나뭇가지가 세리아나의 품으로 떨어졌다.
마치 칼로 날라낸 듯 떨어져 나온 나뭇가지의 단면이 매끈했다.
이래서 도구가 필요 없었구나……. 세리아나는 평안히 산책 다녀오듯 걸어갔다 걸어오기만 하면 된다던 야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로, 너도 여기서 이렇게 가져온 거였니?”
아로가 바이샤를 위해 가져왔었던 작은 나뭇가지도 이런 식으로 끝이 매끄럽게 잘려 있었다.
마치 나무 스스로가 내어준 듯한 모양새에 나뭇가지 가득 달린 작고 둥근 나뭇잎을 손끝으로 쓰다듬은 세리아나가 라큘을 향해 속삭였다.
“고마워.”
그 순간 나뭇잎이 흔들렸다.
바람 하나 불어오지 않았는데 흔들리는 그 모습이 신비로워 아주 잠깐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리아나는 아로의 작은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얻어야 할 것을 얻었으니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세리아나는 품 안 한가득 안겨 있는 나뭇가지와 거대한 라큘을 번갈아 바라보다 오랜 친구에게 하듯 작별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아로.”
“삐이-”
라큘 나뭇가지에 제 자리를 빼앗긴 것이 분한지 세리아나의 머리 위를 맴돌던 아로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그녀의 몸에 상처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돌아가면 낮잠을 자자.”
“삐이-”
“물론 바이샤도 함께야.”
“삐잇!”
확연하게 구분되는 뜻이 다른 웃음소리에 세리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로 사라졌던 안개들이 다시 몰려와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신의 첫 번째 자식이 이곳을 찾을 때까지 안개는 계속해서 이 자리를 지킬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