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저마다의 준비 (2)
카얀의 입을 통해 바이샤의 명을 받은 파라간이 시카 부족의 거주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막의 부족 중 가장 먼저 오아시스로 들어와 가장 좋고 넓은 터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거주 구역은 오아시스의 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주 구역의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 차이툰의 전사들과 인사를 나눈 파라간은 누라비의 저택으로 향했다.
자택에서 한 걸음도 나와선 안 된다는 라누아의 명이 있었기에 누라비의 저택은 또 다른 차이툰의 전사들에 의해 감시당하는 중이었다.
“쿠드라의 명을 받아 시카의 누라비를 데려가기 위해 왔습니다.”
쿠드라의 명령을 받았다는 증거로 받은 나무패를 내보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전사가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파라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시종의 안내를 받아 누라비의 서재로 향했다.
수십 수백 번 혼자 걸어 다녔던 길이었지만 그는 이제 차이툰의 파라간이었기에 시카의 구역 안에선 시카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만 했다.
“차이툰의 파라간이 쿠드라의 명을 받아 시카의 누라비께 인사 올립니다.”
어두운 서재로 들어서 파라간이 공손히 인사를 올렸지만 누라비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파라간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누라비의 얼굴을 살피지 않고 덤덤한 말투로 바이샤가 그를 부르고 있음을 알렸고 자신과 함께 오아시스의 궁으로 향해야 한다 말해주었다.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누라비가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바이샤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자신을 ‘차이툰의 파라간’이라 소개하는 아들을 보며 무거워진 마음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배신한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아비인 나와 네 누이인 아눌라를 버렸느냔 말이다.”
아비의 물음이 차라리 절규였다면 마음이 풀렸을까? 이유를 묻는 누라비의 목소리가 평소와 같이 평이하고 평온하게 들려와 파라간의 고요했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유를 몰라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당신이 생각하고 결론 내린 사실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자 물으시는 겁니까?”
“파라간!”
누라비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도리어 차분함을 되찾은 파라간이었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란 말인가! 그는 오아시스의 궁에 있는 라누아를 향해 감사 인사를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배신했느냐 물으셨지만 전 배신한 적 없습니다.”
“무슨!”
“왜 아비와 누이를 버렸느냐 물으셨지만 버린 적 또한 없습니다.”
“나를 기만하려는 것이냐!”
“아니요.”
누라비는 파라간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 품 안의 자식이라 여기며 한참은 더 자라야 하는 어린아이라 믿었던 아들이 어느새 다 자란 어른이 되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차가운 불꽃이 그의 영혼을 태우려는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의 저울 위에 시카와 차이툰이 오른다면 차이툰을 택하라 말한 것은 당신입니다. 그 선택이 결국 시카를 살릴 것이라 말한 것도 당신이죠. 나는 그 말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니다. 그 말뜻은……!”
“그리고 제가 버렸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도리어 버림받았지요. 아비와 누이에게.”
파라간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지만 누라비의 귓가엔 내려치는 천둥과도 같았다.
말을 잃은 누라비가 아들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던 붉은 눈동자는 어느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마 그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누라비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들에게서 먼저 눈을 돌렸다.
“당신이 슈라를 버렸을 때 나 역시 버려졌습니다.”
“버리다니! 나는……!”
“아니요. 당신은 버렸습니다. 아눌라를 위해 슈라를 버렸고 비통함에 울부짖는 형제를 버렸으며 간청하는 아들을 버렸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카의 후계자를 위해서……!”
“네, 어쩔 수 없으셨겠죠. 저 역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눌라 한 사람 때문에 시카 전체가 무너지는 걸 방관할 수는 없으니까요.”
누라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파라간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꼬리를 돌렸다.
“……시카의 족장은 나다. 그리고 아눌라는 나의 후계자……. 시카를 위하는 마음이 너보다 작을 수 없다.”
“시카의 누라비는 그럴지 모르겠으나 아눌라의 마음은 장담하지 마십시오.”
“파라간!”
“당신의 후계자가 시카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일들을 벌여서는 안 됐습니다.”
아눌라가 저지른 모든 추악한 일들을 까발리는 임무를 맡은 것은 파라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껏 밝혀낸 아눌라의 죄는 전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대부분이 피비린내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오아시스 안에서 벌인 일만 해도 그럴진대 오아시스에 들어오기 전에 벌인 일들은 어떠할까. 밖에서 있었던 일들은 하누도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파라간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눌라를 끌어내릴 생각이냐?”
“끌어내리기만 할까요.”
“라누아의 힘을 믿는 것이라면 접어라. 첫 번째 자식의 권리는 신이 내린 것이니까.”
파라간은 진심으로 웃고 싶어졌다.
자신을 버린, 그리고 자신이 버린 아비는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눌라가 당신의 첫 번째 자식이라면 나는 내 어머니의 첫 번째 자식입니다. 잊으셨습니까? 당신의 아내, 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백 년 전, 사막의 분열 이후 시카 족장의 계보는 딱 한 번 바뀐 적이 있었다.
전대 족장이었던 누라비의 아비가 바로 그 뒤바뀐 계보의 주인공이었다.
이름 모를 병으로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첫 번째 자식과 두 번째 자식을 모두 잃은 전전대 족장이 시카 안에서 가장 현명하고 용맹했던 누라비의 아비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파라간의 어머니는 전전대 족장의 죽은 두 번째 아들의 딸, 즉 손녀로 누라비가 첫 번째 부인을 잃은 후 시카의 안정을 위해 결혼을 한 상대였다.
비록 족장의 자리는 다른 이에게 넘어갔지만 전전대 족장의 남은 힘들은 모두 파라간의 어미가 물려받았고 그 어미가 물려받은 힘은 모두 그녀의 첫 번째 자식인 파라간이 물려받을 터였다.
“라누아의 자비가 없더라도 나는 아눌라를 바닥 끝까지 끌어내릴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끌어내려선 안 된다.
당장 속에 내려앉은 화를 풀 수는 있어도 아눌라나 누라비에게 어떠한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눌라의 죄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공정한 방법을 이용해 밝혀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의혹 하나 남기지 않고 아눌라를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파라간이 간절히 바라는 제 누이의 끝이었다.
“쿠드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움직이시죠.”
차가운 눈빛으로 누라비를 한번 훑어본 파라간이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누라비는 어두운 서재 한가운데 서서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바이샤는 세리아나에게 약속한 대로 아주 얌전히 침실에 앉아 누라비를 맞이했다.
얼마 전까지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맸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치 건강한 안색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누라비가 고개를 조아렸다.
“시카의 누라비가 쿠드라를 뵙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군.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아주 괘씸한 일이 있었다지?”
“쿠드라…… 그것은…….”
“오늘은 내 용무부터 보도록 하지.”
“……따르겠습니다.”
아눌라를 위해 마지막 세 번째 자비를 청하려던 누라비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바이샤의 입에서 그에게, 그리고 그의 딸에게 좋지 못한 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내 라누아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 라젠의 병사들이었다 하더군.“
“……그리 증언했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라젠의 병사들을 사주한 자가 시카의 후계자.”
“쿠드라! 오해십니다! 아눌라는 절대……!”
“내가 네 의견을 말하라 허락한 적 있던가?”
“죄송…… 합니다.”
바이샤가 약속한 세 번의 자비. 그것이 아니면 아눌라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을 누라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바이샤의 입에서 ‘아눌라’가 아닌 ‘시카’가 흘러나올 때마다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사람의 이름이 불리는 것과 부족의 이름이 불리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누라비는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공손히 모은 두 손을 꽉 쥐었다.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는 타국의 병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길잡이로 나서 나와 나의 라누아가 가는 길에 피를 뿌린 시카의 후계자라.”
“…….”
“시카가 나와 내 라누아께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었나 보군.”
“아닙니다! 아닙니다, 쿠드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몸을 던지듯 빠르게 바닥에 엎드린 누라비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고 바위가 그의 몸을 내리누른 듯 숨을 편히 쉴 수 없었다.
“다른 이가 그리했다면 모를까 시카의 후계자다. 후계자의 뜻은 그 족장과 같고 족장의 뜻은 한 부족의 뜻과 다르지 않다.”
“쿠드라! 시카는 절대 쿠드라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아눌라가 아닌 시카의 이름을 계속해서 입에 올렸던 것은 이것을 위한 것이었나? 누라비는 바이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를 없애려는 것이다.
아눌라를 위해 자신에게 약속된 마지막 자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친 것이다.
“배신하지 않는다? 그럼 나의 라누아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은 뭐지? 시카의 후계자가 날린 화살이다. 죽이려 마음먹고 날린 화살에 담길 다른 뜻이 있나?”
당장이라도 대답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누라비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섬기는 왕은 이미 아눌라를 죽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바이샤가 이렇게 말을 길게 늘이며 그를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내 입으로 말하라는 거로구나…….’
바이샤는 누라비의 저울 위에 시카와 아눌라를 강제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누라비는 여기서 무엇을 선택하든 아눌라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카의 누라비……. 쿠드라의 마지막 자비를 청합니다.”
시카를 살려달라 말하면 아눌라는 죽는다.
그렇다고 아눌라를 살려달라 매달릴 수도 없다.
그가 이 자리에서 아눌라의 목숨을 선택한다 한들 아눌라는 결국 죽을 것이다.
왕의 자비가 내려졌다 하더라도 여왕의 분노를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누라비가 바이샤에게 청해야 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시카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앞서 일어난 모든 일은 아눌라가 혼자 벌인 일입니다. 그것에 시카의 뜻 단 한 조각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내게 그것을 믿으라?”
“……쿠드라께 받은 마지막 자비를 청합니다. 이것은 모두 아눌라의 죄.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시카가 쿠드라를 실망하게 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누라비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바이샤도 누라비의 등 뒤에 서 있는 카얀도 그의 그런 모습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시카의 누라비, 마지막이다. 정말로 아눌라가 아닌 시카를 선택할 텐가?”
“……네, 그렇습니다.”
“좋다.”
바이샤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카얀을 제 곁으로 불러들였다.
아직 아눌라가 저지른 죄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었기에 당장은 죽일 수 없지만 지금보다 더욱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넣는 것은 가능했다.
누라비는 아눌라의 발목을 자르라 말하는 바이샤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아직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상태였기에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쿠드라, 마지막으로 딸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도록…… 부디 자비를…….”
“네게 약속된 자비는 조금 전 모두 사라졌다.”
“제발, 이 시카의 누라비가 쿠드라께 보였던 충성의 값으로 단 한 번만…….”
잠시 고민하던 바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숨처럼 아끼던 딸을 버린 아비였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늙은이였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한 번쯤은 베풀어도 괜찮을 것이다.
바이샤의 허락을 얻은 누라비는 그길로 아눌라가 갇힌 감옥으로 달려갔다.
만남은 허락되었으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은 말을 딸에게 전해야만 했다.
“아눌라!”
“아버지!”
감옥 안에 갇힌 딸을 보며 누라비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주저앉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쿠드라를 만나 보셨나요? 제가 여기에 갇혀 있다는 걸 그분께 전하셨어요?”
“아눌라, 아가.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아버지!”
“도망쳐라.”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도망치거라, 아눌라. 그래야 네가 산다.”
감옥의 창살을 움켜쥔 누라비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