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저마다의 준비 (1)
바이샤가 긴 잠에서 깨어나고 오아시스의 궁은 평화를 되찾았다.
정확히는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라누아가 라젠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막의 전사들에게 전쟁과 전투, 그리고 싸움은 삶이었으니까.
그러나 차이툰 내부, 그들의 왕이 받아들인 첫 번째 부족의 후계자가 바이샤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그 외 무수히 많은 악취 나는 일을 행해 왔다는 것은 오아시스의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혼란 속에서 파라간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누의 증언을 바탕으로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일부터 순서대로 차근히 아눌라가 저지른 죄 하나하나를 밝혀내는 중이었다.
세리아나로 인해 제집에 유폐된 누라비는 제 아들과 동생이 사랑하는 첫 번째 자식의 죄를 파헤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아시스 전체가 들썩이는 사건이었으나 정작 이 모든 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아시스의 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바이샤, 남김없이 모두 삼키세요.”
“……내 라누아께서 안 하던 잔소리를 하시는군.”
“어서요.”
라누아의 방과 좌우가 반전된 형태로 완벽히 일치하는 구조를 가진 쿠드라의 방.
그 방의 가장 안쪽에 마련된 침대 위에 걸터앉은 세리아나는 미간을 구긴 채 치료사가 정성껏 달여온 약을 삼키는 바이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독에 당해 죽을 위기를 넘겼던 사람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회복한 상태였지만 세리아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리잔에 담긴 붉은색을 띤 맑은 액체를 남김없이 삼키는 바이샤를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라누아, 쿠드라께선 지극히 건강하신 상태랍니다. 아로 덕분에 흉터까지 모조리 사라졌는걸요.”
“라누아, 그대의 종이 내게 야박하게 구는군.”
“라누아, 이제 쿠드라 걱정은 마시고 방으로 가셔요. 야안의 수업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사이 좀 쉬셔야 해요.”
“라누아, 내 곁에 계시면 쉬질 못하시는 건가?”
“라누아.”
“라누아.”
세리아나를 가운데 두고 바이샤와 치아린이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가운데 낀 그녀가 쏙 빠져도 무리가 가지 않는 대화였지만 세리아나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바이샤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 들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유리잔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가 그것을 건네자 바이샤를 노려보고 있던 치아린이 자연스럽게 그 잔을 받아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 넘겼다.
“파라간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슈라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일을 밝혔다고 합니다.”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거지?”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결과적으론 아눌라가 저지른 모든 죄를 밝혀낼 때까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뺨에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평소엔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는 세리아나였다.
바이샤가 손을 내밀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한참을 망설이다 소극적으로 움직여 왔던 그녀가 변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자신인데 변한 것은 그의 아내다.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쥐고 흔들었던 주도권을 세리아나에게 내어준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꺼운 것이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 라누아께서 모든 일을 정리하시니 내 할 일이 사라지는군.”
“그럴 리가요. 이제부터는 모두 바이샤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래도 당신이 모든 일을 정리했잖아. 편해진 건 사실이지.”
“칭찬이시죠? 감사해요.”
생긋 웃으며 답하는 모습에 슬쩍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하자 모르는 척 손길을 피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새로웠다.
“치료사는?”
“대기 중입니다.”
“들여보내.”
명령을 내리는 것에 거침이 없다.
늘 조심스럽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던 세리아나였다.
바이샤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세리아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조아린 채 방 안으로 들어오는 치료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쿠드라, 라누아.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쿠드라의 몸을 살펴줘.”
“나는 괜찮은…….”
“쿠드라.”
“……내 라누아께서 오늘따라 무서우시군. 카얀, 그렇지 않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내 편은 아무도 없군.”
외면하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카얀을 보며 헛웃음을 지은 바이샤가 고개를 젓곤 치료사에게 얌전히 상처가 있던 자리를 보였다.
세리아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치료사가 바이샤의 몸을 살필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했다.
크고 넓은 등, 화살이 박혔던 어깨는 매끄러웠다.
화살을 뽑고 독을 제거하느라 도려냈던 상처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대체 저 매끈한 피부에 무슨 문제가 있어 치료사가 저리 신중히 살피는 것인가 궁금해했을 것이다.
“과연 라큘의 잎사귀로군요.”
“그 말은…….”
“어깨의 상처는 완벽히 사라졌고 손톱 끝에 남아 있던 푸른 기운도 전부 빠져나갔습니다.”
“다 나으신 건가?”
“네, 완치되셨습니다.”
치료사의 말에 세리아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완치했다는 치료사의 말을 들으며 화살을 맞았던 어깨를 크게 돌린 바이샤의 시선이 아로가 잠들어 있는 새장으로 향했다.
세리아나가 쿠드라의 방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아로 역시 그의 방에 눌러앉은 것이다.
“저 녀석이 라큘의 나뭇가지를 가져왔다니 믿을 수 없군.”
“바이샤도 꿈에서 아로를 보았다고 했잖아요.”
세리아나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때, 바이샤는 꿈속에서 붉은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한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멍하니 따라 걸으며 하나둘씩 생각을 잃어갈 때쯤 붉은 나뭇가지를 물고 나타난 아로가 반대의 길로 이끌었다.
본래 따라갈 생각이 없었는데 아로 녀석이 너무 시끄러워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던가?
붉은 나뭇가지로 뺨을 콕콕 찌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한참을 따라 걷다 뿌연 안개에 휩싸였고 그 직후 세리아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본디 쿠락이라는 새는 라누아의 전령으로 가끔씩 헬라임을 찾아 그분의 두 자식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합니다.]
야안은 바이샤의 꿈 이야기를 들은 후 그렇게 설명했고 붉은 나뭇가지는 라누아가 영혼을 이끌 때 사용하는 라큘이라고 부르는 신목이라는 것 또한 알려주었다.
거기다 바이샤의 상태를 보기 위해 찾아왔던 치료사는 그것이 만독의 해독제로 사용되는 귀중한 약재라는 사실 또한 알려주었다.
조금 전 바이샤가 마신 붉은색의 맑은 액체가 바로 라큘을 다려 만든 것이었다.
“고작 서너 장의 잎사귀로 만든 연고로 어깨의 상처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걸요. 아로가 정말 큰일을 했어요.”
나뭇가지는 달여서 마시는 약을 만들었고 잎사귀는 찧어 연고를 만들었다.
회복되어 가는 중이라고는 하나 아로가 가져온 라큘의 나뭇가지 덕분에 바이샤의 회복이 더욱 빨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로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아로가 당신을 제게 인도해준 거예요.”
“저 녀석이 잘도 내게 그런 친절을…….”
“바이샤.”
“뭐, 내 라누아께서 원하시니 그리하도록 하지.”
어디까지나 당분간이지만. 그렇게 말을 붙이는 바이샤에게 곱게 눈을 흘긴 세리아나가 얇은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어느새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야안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벌써?”
“배워야 할 것이 많아요. 곧…… 전쟁이 시작되는 걸요.”
암만 거창하게 포장해 봐야 사람이 죽고 죽이는 일이 바로 전쟁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바로 세리아나의 선언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암만 각오를 다져 보아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전쟁을 입에 올리는 세리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리아나.”
어느새 방 안에 남은 이는 바이샤와 세리아나 단 두 사람뿐이었다.
눈치 좋은 두 사람의 종이 치료사와 시종들을 전부 물리고 자신들도 방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후회하나?”
“……아뇨.”
자신을 노렸든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었든 어쨌든 바이샤가 다쳤고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그러니 그 결정에 대해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물음에 느리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바이샤는 그런 세리아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침대 위에 올랐다.
익숙한 몸짓으로 그의 품을 파고든 그녀는 바이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자신이 이 차이툰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이제는 깨진 마법의 거울 너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던 바이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것은 과한 욕심이 불러온 참극. 그래서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완치되었다고는 해도 당분간은 몸을 아껴 주세요.”
“……그러지.”
말을 돌리는 것이 분명한 세리아나의 모습에 바이샤는 다시 묻는 대신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택했다.
세리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남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겨내야 하는 무언가라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야안이 오늘은 무엇을 알려준다 했지?”
“성역(聖域)에 간다고 했어요.”
“이 사막에서 유일하게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이군.”
“왜요?”
“그곳은 오직 라누아께만 허락된 곳이니까. 성역이 백 년 만에 주인을 맞이하는군.”
사막이 갈라진 후 백 년, 오아시스를 지키고 있던 옛 차이툰의 후손들은 붉은 나뭇가지를 보지 못했다.
라누아의 이름을 잇는 이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조각 난 사막의 라누아를 진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성역이 길을 열어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 탓에 지난 백 년간 라누아의 힘은 착실하게 줄어들었다.
라누아의 홀에서 라옴의 히아신이 처음 보였던 모습은 조금 과격하기는 했으나 현재의 라누아가 가진 힘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에게도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그럼 내게 맡겨. 부숴줄 테니.”
“……농담이죠?”
“진담인데?”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할게요.”
따뜻한 바이샤의 품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세리아나는 애써 미련을 내리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더는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는 마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세리아나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바이샤의 손을 도리어 붙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춘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쉬고 계세요. 식사는 꼭 챙기시고 약도 남기지 말고 전부 드셔야 해요.”
“다 나았는데 약을 또 먹어야 하나?”
“치아린을 남겨두고 갈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죠?”
성역은 말 그대로 성역이고 금지(禁地)였기 때문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이는 라누아와 라누아의 종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 종도 함께할 수 있는 곳은 성역의 입구뿐. 입구까지 길 안내를 전대 라누아의 종인 야안이 맡았기에 치아린은 오늘 세리아나와 함께할 수 없었다.
“……그 심술을 나 혼자 감당하라고?”
자신의 주인을 끔찍하게 아끼는 치아린이라면 이 상황에 분명 분통을 터트리며 그 화를 전부 자신에게 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면 카얀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바이샤는 벌써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심술이라뇨. 그저 치아린이 당신의 약을 챙길 거라는 뜻이었어요.”
“그게 그거야.”
바이샤는 툴툴거리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세리아나가 걱정해 주는 것은 좋았지만 병자 취급은 내키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그래. 난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도록 하지.”
“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세리아나가 몸을 돌려 방을 나서고 카얀이 그 빈자리를 채우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치아린은 성역까지는 동행하지 못해도 야안에게 가는 길까지는 함께하고 싶다 고집을 부려 세리아나를 따라간 참이었다.
“카얀.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네.”
세리아나와 함께 있으며 자세한 상황을 전달받기는 했지만 그 ‘보고’에 세리아나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순하기만 하던 아내가 저리 당차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걸까? 아니, 변화가 거기에서 멈췄다면 그리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쁜 변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리아나의 얼굴에 자리 잡은 어둠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누라비를 불러라.”
“……라누아께 오늘은 쉬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지.”
“……죄인입니다.”
“내게 비빌 구석 하나를 남겨둔 죄인이지.”
바이샤가 누라비에게 베푼 마지막 자비가, 약속이 남아 있었다.
누라비라면 분명 그 기회 또한 아눌라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바이샤는 아눌라와 누라비에게 또 그런 기회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궁에 파라간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에게 일러 누라비를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바이샤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카얀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래. 난 라누아의 명이 있어 이 방에 ‘얌전히’ 있어야 하니 조용히 불러들여.”
“네, 쿠드라.”
“과연 누라비가 가장 먼저 무슨 말을 뱉을까? 어때, 카얀? 나랑 내기라도 해보는 게?”
“내기와 도박을 멀리하는 것이 당신의 종으로서의 의무입니다.”
“재미없는 녀석.”
깍지를 낀 손을 머리 뒤로 넘겨 기댄 바이샤가 미소 지었다.
그것은 재미없다는 말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고 있는 악동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