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75화 (75/110)

#75. 나의 이름은 (5)

타람과 히아신의 싸움을 멈추게 한 세리아나는 언제 다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난 것인지 두 부족의 족장들을 고요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라의 타람.”

“네, 라누아.”

“라옴의 히아신과의 다툼은 홀 밖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라옴의 히아신.”

“네.”

“내가 약하다 했나?”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그래?”

세리아나가 손을 뒤로 뻗자 치아린이 활을 건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세리아나가 화살을 시위에 걸고 히아신을 겨냥했다.

“라누아?”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활을 쏘았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 화살을 재빠르게 피해낸 히아신이 화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세리아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약하다기에 보여주려고.”

“그런 것치고는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솜씨였습니다.”

“그래? 난 내 힘을 제대로 보여 줬다고 생각하는데?”

“빗나간 화살이요?”

웃는 얼굴로 치아린에게 활을 넘긴 세리아나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몇 개 되지 않은 계단을 느리게 내려온 세리아나가 히아신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몸집이 서너 배나 차이가 나다 보니 꼭 어린아이와 어른이 서로 마주 보고 선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래, 충분히 보여 줬어.”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가만히 있잖아.”

“네?”

히아신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 그대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화살을 날렸다면…… 그대는 어떻게 할 거지?”

“죽일 겁니다. 제게 화살을 쏘았다면 그 정도 각오는 했겠지요.”

말에 형체가 있었다면 그가 지금 뱉어내는 말들은 이빨 사이에서 으스러져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그런 히아신에게 겁먹지 않고 오히려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 봐.”

“제발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주십시오.”

“바라의 타람은 알아들은 것 같은데?”

타람은 확실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키들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얄미워 히아신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대가 가만히 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누군가 화살을 쏘았다면 죽일 거라 답했던 그대가 나를 살려두고 있으니 하는 말이야.”

“그건 라누아이시니…….”

“그래. 내가 라누아지.”

세리아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온기를 품고 있었던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은 채 히아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대는 내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아. 아니, 할 수 없어. 왠지 알아?”

“…….”

“내가 라누아라서, 내 이름이 세리아나 쿤 라누아이기 때문에!”

“라, 라누아…….”

“다시 말해보아라, 라옴의 히아신. 그대의 눈에 내가 아직도 연약한가? 나의 이름이 그대에겐 한없이 가볍기만 해서 그대가 내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설명해도 될 만큼 하찮아 보이는가?”

히아신이 살짝 몸을 떨었다.

세리아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둥이 되어 그의 몸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사막의 명예로운 전사들이 모두 나의 힘이고, 이 차이툰이 바로 내 힘 그 자체다. 라옴의 히아신, 답하라! 내가 약한가?”

“……아닙니다.”

“내가 그대에게 전쟁을 명할 자격이 없나?”

“용서하십시오, 라누아!”

히아신이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눈높이가 달라져 세리아나가 히아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모습으로 죄를 청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라누아의 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옴의 히아신, 일어나라. 나는 그대를 아직 나의 전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 역시 나를 그대의 여왕이라 여기지 않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

“용서하십시오, 라누아!”

“라옴은 나의 전사가 될 자격을 가졌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가장 선봉에 서서 승리를 내게 가져오라. 용서는 그다음이다.”

“라누아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그가 일어나 주먹 쥔 한쪽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홀 안의 모든 사람이 전율했다.

그들의 여왕이었다.

그들의 여왕이 자신들에게 증명하라 말하고 있었다.

“사막의 전사들은 준비하라. 라젠의 칼끝이 우리에게 닿았으니 그들에게 차이툰 전사들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나 세리아나 쿤 라누아가 명예로운 길로 그대들의 영혼을 인도할 것이다!”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여럿의 목소리가 하나로 답했다.

세리아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 홀의 가장 상석에 앉아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는 그녀의 전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라누아,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라의 타람은 말하라.”

“전쟁의 선봉은 누가 서나요?”

전장의 선봉에 서는 이는 가장 강한 전사였다.

그러나 차이툰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전사인 바이샤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타람은 바이샤의 빈 자리를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걱정과 다르게 세리아나는 웃고 있었다.

“바라의 타람은 명석한 머리를 지녔다 들었는데 아니었나 보군.”

“네?”

“이 사막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가 누구지?”

“물론 쿠드라이십니다.”

“그래, 그러니 이번 전쟁의 선봉 또한 그분이 아니겠나?”

“하지만…….”

“타람.”

“네.”

“쿠드라를 믿어라. 그분은 믿음을 배신하는 분이 아니시다.”

“네, 라누아.”

사막의 전사들은 싸움에 굶주려 있었다.

참고 있었다.

그들의 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벌써 전쟁을 치를 만반의 준비를 끝낸 사람들처럼 굴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 시카는 참여하지 않는다.”

“라누아!”

누라비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약하다는 증거였고 약한 자는 이 사막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싸움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세리아나의 말은 시카에겐 날벼락과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시카는 쿠드라의 곁에서 싸울 겁니다!”

“허락하지 않는다.”

“라누아!”

“믿을 수 없는 자를 곁에 왜 두어야 하지?”

“시카는……!”

“시카는 내게 증명한 것이 없다. 확신조차 주지 못했으며 의혹만을 남겨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믿고 그대들을 나의 쿠드라 곁에 두어야 하지?”

누라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이샤의 자비에 기대어 무덤 속에 묻어버렸던 일들이 되살아나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에게 남은 기회 역시 바이샤가 약속한 마지막 자비였기에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시카의 누라비는 오늘부터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시카의 거주구역 안에서 근신하라.”

“……아눌라를, 딸아이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허락하지 않는다.”

“라누아, 제발 자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했다. 아눌라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의혹이 풀리기 전까지 그 누구도 그녀를 만날 수 없다.”

세리아나는 다시 매달리려는 누라비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파라간 곁에 서서 침묵하고 있던 샹크의 이름을 불렀다.

“시카의 샹크, 앞으로 나서라.”

“네, 라누아.”

“그대가 누라비와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라지?”

“그렇습니다.”

“차이툰의 파라간을 빌려주겠다. 그의 도움을 받아 당분간 시카를 그대가 관리하라. 누라비를 감시하고 시카 안에서 불순한 마음을 먹는 자들이 없도록 하라.”

“명을 받습니다.”

이로써 시카는 차이툰 안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명예롭지 못한 그들을 오아시스의 그 누구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카의 사람들은 그런 부당함이 아눌라와 누라비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족의 신임을 잃은 족장은 어떻게 될까? 독립된 시카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차이툰의 발아래 엎드린 상황이었다.

그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끝낸 세리아나가 두 눈을 감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웠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고요했다.

일을 모두 끝마치고 바이샤 곁으로 돌아온 세리아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물린 후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이제야 몸이 떨려왔다.

그녀는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이샤의 손을 붙들고 계속해서 심호흡했다.

그녀는 라누아의 홀에서 필사적이었다.

떨림을 참고 평온함을 꾸며냈다.

필사적으로 거울 너머 바이샤의 모습을 떠올렸고 흉내 냈다.

“무서웠어요……. 나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하지만 당신을 위해 준비해두고 싶었어.”

누군가는 그녀의 떨림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는 히아신에게 활을 쏘며 실수를 했다.

그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도록 쏜다는 것이 그만 손이 미끄러졌다.

그가 빠르게 피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히아신의 미간 사이에 화살이 박혔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큰소리를 쳐본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열심히 했어요…… 바이샤, 당신에게 칭찬받으려고.”

분명 웃어줄 것이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주며 본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서 웃어줘요…….”

바이샤는 고요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너무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라 금방이라도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바이샤…….”

“삐이-”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쿠락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아시스의 궁에 도착한 이후 볼 수 없었던 아로의 울음소리였다.

“아로?”

언제 온 것인지 아로가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보지 못하는 사이 조금 더 자란 것인지 파닥이는 날개가 이전보다 더 커진 것처럼 보였다.

“아로? 어디에 있었던 거니? 혹시 어딜 다친 거…… 응? 입에 뭘 물고 있는 거니?”

오랜만에 만난 아로는 붉은색의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다.

오아시스에 붉은 나무가 존재했던가? 아니, 그 이전에 저리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나무가 존재할 수 있나?

세리아나가 의문을 채 떨치기도 전에 아로가 날개를 퍼덕이며 바이샤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날아올랐다.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침대까지 날아온 아로가 누워 있는 바이샤의 머리 위를 몇 번 돌더니 툭 하고 붉은 나뭇가지를 떨어트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세리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나뭇가지를 서둘러 치우고 바이샤의 얼굴을 살폈다.

“아로! 그러면 안 돼!”

“삐-”

어쩐지 토라진 것 같은 울음소리였다.

아로는 짧게 울며 세리아나가 치운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와 바이샤의 머리맡에 옮겨두었다.

똑똑한 아이가 세리아나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붉은 나뭇가지와 바이샤, 그리고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아로를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붉은색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아니네?”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은 싱그러웠다.

붉은색을 띤 잎은 낙엽 외엔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막연히 버석한 나뭇잎이라 생각하던 세리아나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한참을 요리조리 나뭇가지를 살피던 세리아나는 깔끔하게 잘린 나뭇가지의 단면을 발견하고 아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로, 이건 누가 잘라준 거니?”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매끄러운 단면이었다.

누군가 아로에게 선물한 건가 싶어 질문했던 세리아나는 그녀의 작고 똑똑한 새가 모르는 척 부리로 날개깃을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행동하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쉰 세리아나는 그것을 들고 다시 침대 위에 앉아 바이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바이샤의 얼굴에 생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바이샤?”

그때였다.

감긴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움직였다.

마치 눈을 뜨려는 듯 떨리는 눈꺼풀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숨을 삼켰다.

바이샤는 아주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열리며 세리아나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호박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릿함을 떨쳐내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와 느리게 여닫히는 눈꺼풀이 현실이 아닌 듯 세리아나의 눈동자에 맺혔다.

“왜…… 울고 있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며 세리아나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로 세리아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은 바이샤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말해봐, 세리아나. 누가…… 당신을 울렸지?”

“당신…… 이요. 바이샤가…… 바이샤가 늦잠을 자서…… 당신이 깨어나지 않아서……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장 카얀과 치아린을 부르고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차이툰의 모든 백성에게 알려야 하는데 눈을 돌리면 그가 다시 잠들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바이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누워 있었던 탓인지 그 사소한 움직임에도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어깨의 상처에서도 약간의 이물감과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참을 만했다.

몸을 일으킨 그가 손을 뻗어 세리아나를 끌어안았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연둣빛 눈동자를 가리고 있어 조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울리는군.”

“바이, 샤…… 흑, 바이샤아…….”

“울지 마, 세리아나. 내가 잘못했어.”

그녀의 눈물이 흘러넘쳐 강을 이루는 듯했다.

라누아의 눈물이 흘러 오아시스가 되었다는 전설이 떠올랐다.

그때 그 여신을 지켜보고 있던 남신 또한 이런 마음이었을까? 라누아의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사막 위의 괴물들을 쓸어버리고 인간들을 구해냈다던 쿠드라의 마음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당신보다 늦게 눈뜨는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해.”

세리아나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늘 안으로 억누르기만 했던 그녀가 소리를 내어 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이샤는 그의 가슴을 적시는 세리아나의 눈물을 느끼며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두 번 다시 그녀를 울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녀를 울게 하는 것이 생긴다면 그것이 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맹세하며 세리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