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74화 (74/110)

#74. 나의 이름은 (4)

모든 것이 아눌라의 명령이었다는 하누의 말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아눌라는 이마를 바닥에 붙인 채 엎드린 하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코가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하누, 네년이 미쳤구나.”

“네, 미쳤습니다. 알고 계셨잖아요.”

서로에게만 들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누는 분노로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아눌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저를 사랑에 미쳐 동생마저 외면한 가여운 것이라 불렀던 건 아눌라 님이셨습니다.”

“너……!”

“당신을 버리기만 하면 파라간 님 곁에 설 수 있는데 그 사랑에 미친 제가 아눌라 당신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있나요?”

아눌라에게만 보이도록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하누가 그녀의 손을 쳐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당황한 아눌라는 그런 하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시카의 일원으로 다음 족장이 될 아눌라 님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는 해도 헬라임께서 허락하지 않은 죽음에 관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 죄를 이렇게 고하오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라누아.”

“모두 거짓입니다, 라누아!”

다급하게 외치는 아눌라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파라간이 하누를 받아들이는 상황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슈라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누라비가 허락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파라간이 직접 하누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파라간, 결국 네가 나를 배신했구나!’

슈라의 일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응어리진 마음이 평생 풀리지 않으리란 것도 짐작했다.

그러나 파라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차갑게 식은 슈라의 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면서도, 그 죽음 뒤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그녀의 어리석은 동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일만 넘기면 파라간도 치워버려야겠어.’

파라간을 이제껏 내버려 둔 것은 그가 자신에게 반항할 수 없는 아랫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반쪽이기는 하나 한 아비의 피를 물려받은 동생이었기 때문에 다소 건방진 모습을 보여도 참고 넘겨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모든 이유가 사라졌다.

파라간은 이제 아눌라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아눌라는 이제껏 제 앞을 가로막은 것을 모조리 치워왔다.

파라간을 치워도 저를 보좌할 동생이 하나 남아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누의 거짓 주장입니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하누는 그에 걸맞은 증거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증거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아눌라는 속으로 하누를 비웃으며 결백을 주장했다.

“증거는 있습니다.”

그때 파라간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그는 서 있던 자리에서 몸을 돌려 품 안에 감추고 있던 어떤 물건들을 꺼냈다.

그것은 부러진 검 하나와 피가 묻고 구겨진 종이 한 장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라.”

“부러진 검은 하누의 증언으로 찾아간 오아시스 외곽에서 찾은 악타르의 검입니다. 그곳에서 목이 잘려 죽은 악타르와 세아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시신은?”

“조만간 오아시스의 궁에 도착할 것입니다.”

시신을 수습해서 가져오라 명한 것은 세리아나였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 사실을 안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파라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것 역시 그녀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이 작은 덫은 아눌라의 발목을 물고 그녀를 죽음의 길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죽은 악타르가 남긴 편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죄를 여기에 기록했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남겨 라누아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악타르는 그런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것은 세리아나가 명령해 치아린이 만들고 파라간이 죽은 악타르의 품에 몰래 숨겨 함께 움직인 다른 사막의 전사가 찾아내도록 유도해 놓은 거짓 편지였다.

아눌라는 절대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을 이용했고 이용한 증거 같은 것은 모조리 없애 후환을 남기지 않았다.

그 철저한 움직임 때문에 아눌라의 악행을 증명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파라간이 그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의 희생으로 하누의 증언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가 부족했다.

그래서 세리아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이 내키지 않기는 했으나 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었기에 양심의 가책은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런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어!”

“아눌라,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지?”

“그, 그건…….”

라누아의 홀에 들어와 처음으로 아눌라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홀에 모인 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더 강한 확신을 얻었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쁘게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린 누라비가 아눌라를 위해 입을 열려 했지만 그 전에 세리아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알게 된 그대의 죄는 이게 끝이 아니야. 이번에 나와 쿠드라를 습격한 이들의 정체가 라젠이라는 것을 아눌라 그대는 알고 있을 테지.”

“처, 처음 듣는 말입니다.”

“우루의 옷과 화살을 준비해 라젠에 넘긴 것이 그대라 증언한 이가 있다.”

“그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인정해선 안 된다.

아눌라는 두 주먹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라비 역시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는 세리아나가 또다시 제 입을 막을까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시카는 절대 차이툰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증언한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십시오! 제가 직접 그자를 심문하겠습니다.”

“내가 이미 끝낸 일이다.”

“하지만 라누아!”

“내가 듣고 내가 확인했다. 시카의 누라비는 그대의 라누아인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일을 확실히 하고자……!”

“결정하는 것은 나의 일이지 그대의 일이 아니다.”

안 된다.

이길 수 없다.

누라비는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리아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라누아나 다름없었다.

그런 만큼 경계하지 않았고 언제든 제 입맛대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러했다.

‘라누아라는 이름에 담긴 힘을 무시한 대가인가…….’

신의 이름이 가진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었다.

물론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아눌라에게 멈춰야 할 곳과 멈추지 말아야 할 곳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었지만 지금 이 실수만큼 뼈저리진 않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결백을 주장하는 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죄를 말하는 입이 이렇게 많은데도?”

“라누아께서 그 입들을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무례한 아눌라의 말에 치아린이 몸을 날렸다.

언제 뽑아 든 것인지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아눌라의 목에 겨눈 치아린의 검은 눈동자엔 분노가 가득했다.

“한 번만 더 그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라누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네 목을 자를 거다, 아눌라.”

“사생아 따위를 주인으로 모시는 종 따위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

당장이라도 충돌할 것 같은 두 사람을 말린 것은 세리아나였다.

치아린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아눌라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치아린의 검에 한 번에 죽어 나가기엔 아눌라의 죄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결백을 주장하니 기회를 줘야겠지.”

“그건 안 됩니다, 라누아!”

“기회라니요! 당장 목을 잘라야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벌을 내려 헬라임의 화를 풀어야 합니다!”

“조용.”

입을 모아 아눌라를 처벌해야 한다 떠들던 이들이 세리아나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세리아나는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아눌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눌라가 지은 죄들에 대한 조사를 명한다. 단 하나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아눌라의 죄라고 칭해진 모든 사건을 조사하라.”

“쿠드라께서 덮으라 명하신 건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나는 ‘모든’ 사건이라고 했다.”

“명을 받습니다.”

일부러 물은 것이 뻔한 치아린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한 세리아나는 호위전사들을 불러 아눌라를 감옥에 가둘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저를 노려보며 홀을 나서는 아눌라를 지켜보았다.

“아눌라는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감옥의 경비를 철저하게 하라 지시해.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아눌라를 만나선 안 돼.”

“명을 받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숙인 치아린을 향해 아주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아눌라는 감옥으로 보내졌고 누라비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 조사로 슈라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질 것이고 파라간은 그 진실이 밝혀진 후 하누와 결혼식을 올리겠지. 아직 남은 일은 많았지만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세리아나는 자신이 언제 한숨을 흘렸느냐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겨 웃음 지었다.

거울 너머 바라보았던 바이샤가 자신의 전사들 앞에서 그러했듯, 조금 전 일어난 일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웃었다.

라누아의 홀에 모인 이들이 아직 대외적 활동을 시작하지 않아 그 성향을 파악하지 못한 그들의 여왕이 쿠드라와 닮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 신호였다.

“습격을 사주한 이가 아눌라였다고는 하나 라젠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바라의 타람이 세리아나의 말에 동의하며 나섰다.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바라의 후계자 자라하는 제 어미가 라누아를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렸다.

노린 것인지 아니면 이제껏 숨겨온 본모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쿠드라를 닮은 결단력이 타람의 족장을 홀린 것이 분명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라누아. 그것은 쿠드라가 하실 일입니다.”

세리아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타람이 얼굴을 구겼다.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팔짱을 낀 자세로 거만하게 떠들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세리아나 역시 타람의 시선을 따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지?”

민둥머리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 어지간한 짐승의 몸통보다 두꺼운 팔뚝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얼굴을 구긴 채 아눌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가 세리아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옴의 히아신입니다.”

“그대는 내게 명령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헬라임께서 인정하신 라누아의 자격에 입을 대는 건 사막과 이 오아시스에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죠.”

듣기에 따라 비아냥으로 들릴 법한 말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타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목격한 자라하가 두르히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너희 아버지 좀 말려보지?”

“고집으로 꽉 차신 분이다. 가끔은 저러다 헬라임께도 싸우자 덤벼들까 걱정이니 내게 짐을 떠넘기지 마.”

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자칫하면 이 라누아의 홀에서 바라와 라옴 족장 간의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기 상황이었지만 태연한 목소리로 답한 두르히가 세리아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치아린이 눈앞에 있음에도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곳에 시선을 준 것은 두르히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럼 말해보라, 라옴의 히아신.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전쟁은 명백히 쿠드라의 영역. 연약하신 라누아께선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대의 말은 내가 약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뭐, 정확한 답을 원하신다면…… 그렇습니다.”

히아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에서 라누아의 미움을 사 이후 벌어진 전쟁에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부족의 전사들이 꽤 동요할 것이다.

‘그래도 여자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는 없지.’

히아신이 슬쩍 타람을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쿠드라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의 예를 갖춘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강한 전사 앞에 굴복하는 것은 이 사막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쿠드라가 저 망할 여자까지 거둘 줄 몰랐다.

더 정확히는 자신보다 먼저 거둬들였을 줄은 몰랐다.

바라와 라옴은 대대로 사이가 좋지 못한 부족이었다.

바라는 라옴을 돌대가리 야만족이라 불렀고 라옴은 바라를 겁쟁이 코르란이라고 불렀다.

코르란이 옛 차이툰의 말로 겁쟁이라는 뜻이었기에 겁쟁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멸칭은 바라의 전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본래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던 두 부족은 각각 타람과 히아신이 족장이 되며 사이가 더 극악으로 벌어졌다.

두 족장의 성격이 극과 극이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어진 멍청이가 라누아께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나는 라누아와 대화 중이다. 시끄러운 여자는 빠져.”

“한 번만 더 나를 이름 대신 ‘여자’라고 불렀다간 그 두툼한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다고 했을 텐데?”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이 망할 여자.”

“그래, 오늘 한번 죽어보겠다는 소리지?”

“죽는 건 너 하나겠지, 여자.”

“두 사람 다 그만.”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이를 가는 두 사람을 멈추게 한 것은 세리아나였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선 그녀는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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