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73화 (73/110)

#73. 나의 이름은 (3)

가라사가 전사들의 손에 이끌려 퇴장하고 하누가 라누아의 홀에 들어섰다.

하누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누라비를 바라봤고 그들은 곧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벌리고 선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카의 하누가 아눌라의 수족임을 모르는 사람들도 홀 안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렸다.

“시카의 하누,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내게 고백할 것이 있다지?”

“네, 제 뿌리가 시카이기는 하나 저 역시 헬라임을 섬기는 차이툰의 백성입니다. 헬라임의 뜻을 따르는 자로 더는 침묵할 수 없어 이 자리에 나섰습니다.”

하누의 시선이 파라간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고 그녀의 시선이 곧 세리아나를 향했기에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하누의 눈빛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차렸던 유일한 사람은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누는 시카의 사람입니다, 라누아.”

“그래 시카의 사람이지.”

“저는 시카의 족장으로 하누가 제 허락 없이 이 자리에 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내가 허락했다.”

“하지만……!”

“내가 허락했다 했어. 그대는 설마 시카의 누라비라는 이름이 차이툰의 라누아라는 내 이름보다 높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떻게든 하누의 입을 막고자 나섰던 누라비가 입을 다물었다.

세리아나가 라누아라는 이름을 들먹인 순간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하누, 너는 네가 아는 모든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네, 라누아.”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조아린 하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한 사람’이 저질러 온 많은 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누의 말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라누아의 홀에 모인 사람들은 경악했고 분노했다.

지난 세월 분열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백 년 전에도, 지금도 그들의 신은 헬라임이었고 옛 차이툰의 쿠드라와 라누아는 그들의 오랜 왕과 여왕이었다.

바이샤가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했으나 짧은 시간 안에 거부감 없이 차이툰에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찌 사막의 전사가 라누아를 해칠 마음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시카의 누라비는 제대로 해명해야 할 것이오!”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분노하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금세 라누아의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누라비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누와 계단 바로 아래에 선 파라간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파라간이 하누를 움직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파라간은? 아들의 움직임 뒤에 세리아나가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녀가 어떻게 파라간을 움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아직도 슈라의 일로?’

아들의 마음속 상처가 쉬이 아물 것이라곤 그도 생각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약이라 믿었다.

실제로 파라간은 짧은 우기가 지난 이후부터는 슈라의 일을 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끔 슈라의 아비이자 제 아우인 샹크와 만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보좌하는 일을 맡은 샹크와 미래에 족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파라간이 만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파라간…… 결국 너는 이 아비와 누이를 버리는구나.’

혹여 덮어둔 상처가 덧날까 두 사람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일부러 깊이 알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마음에 남은 상처가 쉽게 아물 것이라 믿은 것이 실수였다.

첫 아내를 잃고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던 자신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었는지…….

‘실수를 알아차린 순간이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순간이다. 지금만 넘기면…… 쿠드라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길은 있다!’

세 번의 자비를 모두 사용한 후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누라비는 자신 있었다.

그런 약속 없이도 시카는 바이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싸우는 부족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작은 소란으로 생긴 감정의 골쯤은 얼마든지 메꿀 수 있을 것이다.

“하누의 근거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라누아.”

“그래, 그대의 말이 옳아.”

순순히 답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누라비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로 그리 생각해 주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여기에 조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은혜를 베푼 라누아를 위해 더없이 충실한 시카의 누라비가 되리라.

“지금까지는 하누의 말뿐이지. 그러니 더 들어봐야겠지.”

“……무슨?”

“그들을 데려와, 치아린.”

“명을 받습니다.”

치아린의 손짓에 다시 홀의 문이 열렸다.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돌린 누라비는 그 문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버티기만 하면 뒤엎을 수 있는 판이라 믿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카의 죄인들은 무릎을 꿇어라.”

라누아의 홀 안에 들어선 시카의 시종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대부분이 이번 라젠 행에 함께 따라나섰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전부가 이제껏 아눌라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던 이들이었다.

누라비는 익숙한 시종들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의 입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하고 소란했던 홀 안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라비를 향해 이번 일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던 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시종들 또한 그 분위기에 짓눌렸다.

치아린이 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약속했지만 이대로라면 아눌라의 죄에 얽혀 그들 또한 신의 분노를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저, 저희는 오직 아눌라 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시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희가 시카 후계자의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지막엔 비명처럼 울려 퍼진 그들의 이야기에 세리아나는 누라비를 바라보았다.

아눌라가 저 많은 죄를 저지르는 동안 그녀의 아비는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것이 과연 사랑인가?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라 말하던 어머니의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세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

“시카의 누라비는 내게 할 말이 없나?”

“……라누아.”

“없는 듯하군.”

세리아나는 참담한 얼굴을 한 누라비에게서 시선을 돌려 홀 안을 채운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분노를 참아내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누군가는 헬라임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현실을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

“바라의 타람, 라누아께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리아나는 타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라하가 물려받은 것이 분명한 고집스러운 눈매가 눈에 띄는 여인이었다.

무척이나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 옅게 밴 분노를 읽어낸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고한 아눌라의 죄는 헬라임을 섬기는 사막의 전사로는 절대로 벌일 수 없는 일들입니다.”

차이툰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 전, 사막의 부족들은 크고 작은 다툼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 사라지는 목숨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족 밖의 이야기다.

부족 안에서 제 부족의 피로 손을 더럽히는 후계자라니.

타람은 아눌라의 욕심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욕심이 저런 피비린내를 불러올 것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누라비에게 가 닿았다.

만약 저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눌라가 만들어낸 피비린내는 누라비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타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라의 타람, 그대는 저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요, 양쪽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제 목숨을 위해 일을 부풀려 고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정확히 하고 싶을 뿐 아눌라가 저지른 죄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는 타람의 모습에 다른 이들도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세리아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눌라는 시카뿐만 아니라 시카 외의 다른 부족 사이에서도 그다지 신뢰를 쌓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대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나 역시 한쪽의 말만을 믿고 벌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세리아나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짝 발을 내디디며 외쳤다.

“시카의 아눌라를 데려와라.”

그녀의 명령에 홀 안을 지키고 서 있던 호위전사들이 발을 구르며 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발을 당했을 뿐 죄인이라는 낙인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었기에 아눌라의 두 손은 자유롭게 풀려 있었다.

아눌라는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의 시종들과 하누를 발견했다.

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파라간과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누라비의 얼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저 스쳐 가는 풍경일 뿐이었다.

아눌라의 눈이 고정된 것은 이 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리아나의 모습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고 싶었다.

제 것을 빼앗은 도둑, 불결하게 태어난 사생아, 이 사막의 가장 위대한 전사를 분수도 모르고 탐낸 멍청하고 재수 없는 라젠의 말라비틀어진 창녀.

당장이라도 저 뻔뻔한 낯짝을 뭉개고 제 것을 되찾고 싶었지만 아눌라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 자리가 왜 만들어진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니 속이 비틀릴 만큼 악이 받히더라도 그런 제 속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시카의 아눌라가 라누아를 뵙습니다.”

“그대가 왜 이 자리에 불려 나왔는지 알고 있나?”

“저는 이제껏 라누아의 명에 따라 오아시스 궁의 방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이유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아눌라의 태도는 흠잡을 틈 없이 정중하고 순종적이었다.

세리아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치아린의 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아눌라를 내려다보았다.

평소 자신 앞에서 서슴없이 보여주었던 독기를 한 가닥도 흘리지 않는 모습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그대가 계속해서 등장하더군.”

아눌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이즐넛 색 눈동자 속에 세리아나의 모습이 담겼다.

“시카에 원인 모를 많은 죽음이 있었고 그만큼이나 많은 실종이 있었어.”

“…….”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시카의 아눌라, 그대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더 이상한 건…… 내 망가진 가마채를 잡았던 악타르의 죽음에도 그대의 이름이 들려오더군.”

아눌라의 시선이 파라간의 옆에 서 있는 하누에게 가서 닿았다.

누가 입을 가볍게 놀렸는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라누아. 결혼식 날 라누아의 가마채를 잡았던 것은 차이툰의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저의 이름이 거론되다니요.”

순순히 인정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아눌라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누라비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아비의 모습을 보며 아눌라는 바이샤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분이 눈을 뜰 때까지만 버티면 돼.’

바이샤는 자신을 위해 슈라의 일을 덮었고 사냥대회의 일을 묻었다.

이번 일도 그럴 것이다.

‘악타르와 접촉해 협박하고 죽인 건 모두 하누가 했어.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 따위는 남긴 적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루의 전사들로 꾸민 라젠의 병사들이 걱정스러웠지만 음식과 물을 먹었다면 모두 죽었을 게 분명했다.

그 시체를 살핀다면 분명 그것이 라젠의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습격의 배후에 라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저 사생아도 끝이야.’

바이샤는 분명 분노할 것이다.

라젠 따위의 화살에 제 몸이 상했다는 것을 알면 아눌라 자신이 손쓰기도 전에 세리아나의 목을 잘라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길로 제단에 어린 염소를 바치고 그 피로 전쟁을 선포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라젠의 왕에게 넘겨준 두크란과 계약서를 빼돌릴 틈이 생길 거야.’

오아시스에서 라젠의 사생아를 치운 후 라젠에 남겨둔 제 흔적까지 지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선 여기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

“악타르의 어미가 시카 출신이라지? 그 어미가 죽기 전까지 시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던데?”

“저는 몰랐습니다.”

“내 결혼식이 있기 전 누군가 악타르의 누이를 납치했고 그녀의 목숨줄을 빌미로 결혼식을 망치라 협박했다는 사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제가 먼저 막았을 겁니다.”

“그래?”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순순히 답하는 아눌라를 내려다보며 세리아나가 한쪽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하누가 고개를 숙이고 나와 아눌라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누,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해 보아라.”

“네, 라누아. 저는 아눌라 님의 명을 받아 악타르의 누이 세아를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결혼식 날 라누아의 가마채를 망가트려 라누아를 붉은 길 위에 떨어트리라 협박했습니다.”

“저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눌라 님의 명을 따라 도망친 악타르를 만나 그의 앞에서 세아를 죽이고 그 또한 죽였습니다.”

“라누아, 저는 억울합니다.”

“악타르와 세아의 시체는 오아시스 외곽 땅에 묻었습니다.”

“하누! 감히 라누아께 거짓을 고하다니. 네년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눌라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하누는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 것은 아눌라 님의 명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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