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72화 (72/110)

#72. 나의 이름은 (2)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세리아나는 여전히 바이샤와 함께 있었다.

잠든 그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시카의 샹크라고 했나?”

“예, 라누아.”

고개를 숙이고 선 파라간의 옆에 선 이는 하얀 턱수염과 긴 흰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온몸을 휘감은 검은 상복과 하얀 천을 꼬아 만든 팔찌가 그가 상(喪) 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가 죽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끼던 자식을 잃은 남자가 지금까지 상복을 벗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치아린을 통해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형을 배신하는 일이야.”

“제 딸이 죽은 날, 제 형제 역시 죽었습니다.”

“……오늘 밤 이후의 시카를 맡겨도 되겠어?”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래.”

바이샤의 뺨에 입을 맞춘 세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바이샤가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게 서서 많은 이들을 내려다보아야 할 때였다.

“치아린, 내 활과 화살을 챙겨.”

“네, 라누아.”

“그럼…… 움직이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카얀.”

“네.”

“내가 나간 이후 이곳엔 그 누구도 발을 들여서는 안 돼.”

“쿠드라의 종 카얀이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인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부탁해.”

그의 방을 나선 세리아나는 달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복도를 지나 라누아의 홀로 향했다.

각 가문의 대표와 부족의 족장들만을 불러모았음에도 넓은 라누아의 홀이 가득 차 멀리서도 그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라누아의 홀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밖으로 난 커다란 문을 통하는 것과 쿠드라와 라누아의 방으로 연결된 복도를 지나 작은 문을 통과하는 방법.

세리아나는 두 번째 방법으로 라누아의 홀에 들어섰다.

그녀가 가장 상석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오늘의 부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닫고 고개를 숙여 그들의 라누아를 맞이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자세를 똑바로 한 세리아나가 직접 입을 열어 고개 숙인 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 많은 시선을 느끼며 여유로울 수 있었던가? 일찍이 한 번도 느껴볼 수 없었던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지난 며칠, 오아시스에 큰일이 있었다는 건 다들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세리아나의 두 눈에 누라비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와 함께 등장한 샹크와 파라간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듯 그는 보기 드물게도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함께 라젠 행에 올랐던 이들이라면 알고 있을 테지만 습격이 있었다.”

라누아의 홀에 모인 이들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그것이 적의 습격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상황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함께했던 몇은 침중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이들 사이엔 지금에서야 간신히 다른 귀족들과 함께 풀려난 자라하와 두르히도 함께하고 있었다.

전사들과 함께 바이샤 바로 곁에 서서 검을 휘둘렀던 그들은 정신을 잃은 채 세리아나와 함께 돌아온 왕의 모습을 목격했었다.

어깨의 상처가 독이 발린 화살에 난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세리아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가 그들의 라누아이기는 하나 사막 출신은 아니었다.

사막 출신이 아닌 것뿐만 아니라 그녀는 전쟁을, 그리고 전투를 겪어본 적 없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

그런 그녀가 작지만 피가 흩뿌려지는 전투에 휩쓸렸고 쿠드라가 활에 맞아 쓰러지는 걸 목격했다.

분명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세리아나가 겁을 집어먹고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치아린이 알았다면 화를 내고 세리아나가 알았다면 그저 웃어넘겼을 걱정이었다.

“이번 습격의 배후를 이 자리에서 밝히려 하니 그대들도 함께 들어줬으면 한다.”

라누아의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혼란을 무시하며 세리아나가 말을 끝맺자 치아린이 손을 들어 올려 대기하고 있던 호위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홀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양손이 묶여 있는 딜란트가 호위 전사들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냈다.

“죄인은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제 이름은 딜란트, 라젠에서 왔습니다.”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하라.”

치아린이 질문했다.

세리아나가 죽이지 않겠다 말한 이상 라누아의 종인 자신은 딜란트를 해칠 수 없었다.

제 주인을 죽이려 했던 죄인을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을 무척이나 참을 수 없는 듯 치아린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라젠 국왕 전하의 명령을 받아 라누아님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죽이는 게 아니라 납치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딜란트는 눈치를 살피는 것 하나는 타고난 좀도둑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그에게 동아줄을 내려줄 세리아나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말을 바꾼 것이다.

그 말에 사방에서 살기가 터져 나와 딜란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기나 치고 좀도둑질이나 해 먹던 그가 견딜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치아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기 시작한 그를 보며 짧게 혀를 찬 후 라누아의 홀을 지키고 있던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전사들이 일시에 발을 굴러 큰 소리를 내자 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하라. 만약 그 말에 하나의 거짓이라도 있었다간 바로 이 자리에서 목을 칠 것이다!”

치아린의 말은 딜란트에겐 훌륭한 협박이 되었고 지켜보는 이들에겐 딜란트가 거짓 없이 사실만을 말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심어주었다.

말을 던진 이가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딜란트는 세리아나에게 고백했던 그 날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

다만 세리아나와 가라사의 대화에서 알아차린 모종의 거래와 제삼의 인물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자신이 입에 담아선 안 될 성질의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지금 네 말에 거짓은 없겠지?”

“무, 물론입니다! 라젠의 국왕과 밀라니안 공작이 ‘누군가’에게 받은 사막의 물건들을 저희에게 주었고 저희는 시키는 대로 움직여 쿠, 쿠드라와 라누아의 일행을 쫓은 겁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딜란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라비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 죄인이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 어찌 믿는단 말입니까! 거기다 다른 포로들은 전부 죽었는데 저자만 살아남았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제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다른 이들을 저자가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누라비의 말에 동조한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는 절박한 눈빛을 하고 있는 누라비를 외면했다.

설마 이번에도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일까? 만약 누라비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면 그는 잘못 생각했다.

‘사냥대회의 일을 덮은 건 시카가 바이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번 일은 아니야.’

라젠과 손을 잡고 저를 죽이려 했다.

딜란트는 라젠의 왕이 그녀를 납치하라 지시했다고 했지만 그건 라젠 왕의 독단적인 결정일 것이다.

그녀를 팔아먹겠다는 말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눌라는 분명 세리아나를 죽여달라 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두크란까지 훔쳤겠지. 하지만 일이 뒤틀렸고 죽음의 손길은 세리아나가 아닌 바이샤에게로 향했다.

‘이번엔 아눌라가 직접 활을 쏘았어.’

그녀의 명으로 우루의 물건들을 숨겨 라젠으로 옮긴 시종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습격 이후 그 일을 알리기 위해 오아시스로 향하던 일행을 이탈한 것은 아눌라 한 명뿐이었고 뒤늦게 합류한 그녀의 손엔 분명 활이 들려져 있었다고.

세리아나는 손을 들어 누라비의 발언을 막고 딜란트를 내려다보았다.

“내 사람들의 의문을 풀어줘야겠구나. 어떻게 혼자 살아남았지?”

“저, 저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어떤 것을 먹지 않았지?”

“포로들에게 지급된 물과 음식입니다.”

“어째서?”

“그냥 느낌이…… 물주머니를 나눠주던 여자의 분위기도 이상했고…….”

“여자?”

“붉은색이 도는 진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각도와 빛에 따라 붉은빛이 도는 헤이즐넛 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를 세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치아린.”

“네, 라누아.”

“포로들에게 지급되었던 물과 음식을 조사하라 전해.”

“명을 받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다급하게 입을 열려는 누라비를 무시하고 치아린에게 명령을 내린 세리아나는 전사 하나를 불러 딜란트를 내보냈다.

그는 여기 이 자리보다 라젠과의 전쟁에서 더 많은 효용 가치를 지닌다.

그러니 이쯤에서 내보내는 것이 맞았다.

“다음 죄인을 들여라.”

치아린의 목소리가 라누아의 홀에 울려 퍼지고 두 번째 죄인이 걸어 들어왔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었지만 여유롭고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온 가라사는 세리아나 앞에 얌전히 고개를 조아리고 꿇어앉았다.

“우루의 가라사. 너는 라젠보다도 한발 앞서 우리를 습격했고 나를 납치했다.”

“…….”

“말하라, 어떻게 우리를 찾았고 나를 납치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 날아온 화살, 그것 역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세리아나는 답을 알고 한 질문이었지만 그녀와 치아린을 제외한 이들은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아니 한 사람, 그 답을 알고 있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사라를 바라보는 누라비가 있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 누라비를 신경 쓰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라사는 침착하게 입을 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들의 모래 오칸이 우연히 어떤 목함을 찾았고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 세리아나와 바이샤의 일행을 쫓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정당한 결투 이후 자신은 바이샤에게 굴복했으며 명예를 아는 자신과 우루의 전사 중 그 누구도 그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는 고백이었다.

“쿠드라와 라누아의 일행 중 간자(間者)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간자는 이 사막의 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가 분명합니다.”

가라사의 말에 홀 안에 모인 이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딜란트의 증언이 이어질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가라사의 말은 그들의 왕과 여왕을 해하려 움직이는 이가 이 차이툰 안에 있다는 뜻이었으니 분위기가 같을 수는 없었다.

“라누아, 우루의 가라사는 오랜 시간 쿠드라께 대적한 자입니다! 그런 자의 말을 믿으시다니요!”

“시카의 누라비는 아까부터 라누아의 허락도 없이 입을 여는군.”

다시 입을 열었던 누라비는 치아린의 싸늘한 말에 빠른 걸음으로 세리아나의 정면으로 걸어 나가 고개를 숙인 후 기회를 청했다.

“시카의 누라비, 라누아께 말씀을 올릴 것이 있습니다.”

“허락한다.”

“라누아를 납치했던 무도한 자의 말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우루의 모래 오칸이 발견했다던 목함과 그 안의 쪽지를 내가 확인했다.”

“거짓으로 꾸며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루의 가라사는 제 아비의 이름을 걸고 그것이 진실이라 고백했다. 아비의 이름을 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누라비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고요한 얼굴로 답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낀 누라비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라비는 세리아나가 사생아로 태어난 반쪽짜리 왕녀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서 그녀를 라누아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장했던 자다.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주변으로부터 배척만 당하던 여린 여자일 테니 바이샤의 훌륭한 장기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런데 옛 여신을 닮아 아름다운 것 외에는 쓸모를 찾을 수 없었던 여자가 바이샤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간 모든 것이 끝난다.

누라비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차이툰 내부의 결속을 망치려는 간계가 분명합니다!”

아눌라를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오아시스 궁의 문을 두드렸고 거절당했다.

그들의 왕과 여왕에게 지독할 정도로 충실한 전사들이 지키고 있어 몰래 숨어든다는 계획은 실행조차 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을 전해 듣자마자 그는 이것이 아눌라가 벌인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딸을 만나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세리아나가 아눌라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녀는 이미 아눌라가 범인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막고 버텨야 한다.

바이샤가 일어나 그가 약속한 세 번째 자비를 베풀 때까지 그렇게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 누라비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라누아!”

“시카의 누라비가 이리 말하는데 내가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라누아!”

됐다.

시간을 벌었다.

누라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잠깐 그의 왕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만 본질은 어쩔 수 없는 라젠의 반쪽짜리 왕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희망은 이어진 세리아나의 말에 곧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증인으로 나선 시카의 하누는 안으로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누라비의 고막에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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