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71화 (71/110)

#71. 나의 이름은 (1)

라누아의 홀을 나선 파라간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납작 엎드려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참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지금 기다려왔던 기회가 드디어 파라간에게 주어졌다.

그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슈라의 원한을 갚을 수만 있다면 목숨 그 이상의 것들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선 확보한 증인들을 숨긴다.’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누라비 역시 움직일 것이다.

아마도 제일 먼저 파라간이 간신히 손에 넣은 증인들부터 처리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멍청하게 아비의 말만 믿고 기다리다 기회를 놓치는 멍청한 짓을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파라간 님.”

“마샨. 지금 당장 숙부님께 달려가라. 기회가 왔으니 준비했던 대로 움직이시라 전해.”

파라간은 자신을 마중 나온 시종의 얼굴을 확인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가 세운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그의 명령을 따라온 시종이었으니 믿을 수 있었다.

“드디어…… 입니까?”

“그래. 드디어 온 기회고 우리에게 온 마지막 기회다.”

“명을 받습니다.”

파라간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시종을 지켜보다 말에 올랐다.

세리아나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녀도 말을 듣는 파라간도 이 일의 배후에 아눌라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라비의 집으로 달려가 그의 눈을 피해 두크란이 들어가 있어야 할 금고를 살피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두크란의 행방에 대해선 서너 사람의 입만 맞추면 언제든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다른 증거를 찾아 그들의 여왕 앞에 가져가야 한다.

‘아눌라의 비밀을 아버지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파라간은 말을 빠르게 몰아 오아시스의 한쪽을 차지한 시카의 거주구역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말의 고삐를 받으려 기다리고 선 시종의 손을 물리고 하누가 머무는 아눌라의 집으로 달려갔다.

성인식을 치른 시카의 아이들은 부모와 독립해 살아간다.

하누 역시 독립한 후 부모가 마련해준 제 집이 있었다.

그러나 슈라의 죽음 이후 첫 번째 자식에게 실망한 파라간의 숙부가 하누에게 나누었던 모든 것을 회수하며 그녀는 집을 잃고 아눌라의 거처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상태였다.

본래라면 하누를 만나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아눌라가 궁에 억류된 지금 상황에선 주변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평소 누라비의 명령에 따라 아눌라의 집을 살피는 것이 파라간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누라비라면 의문을 가졌겠지만 그는 지금 아눌라를 신경 쓰느라 파라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필 여력이 없을 것이다.

“어서 오세요, 파라간 님.”

“……매번 마중을 나오시는군요.”

아눌라의 거처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자마자 하누가 파라간을 맞이했다.

잘 빗어 정리한 긴 머리를 한쪽 어깨 위로 내린 채 웃는 듯, 우는 듯 복잡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는 하누를 보는 파라간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파라간 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나와 인사를 드려야죠.”

“당연하다라…….”

삭막한 목소리로 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파라간을 따라 하누도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쫓고는 있으나 고개는 숙인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이 파라간에게 절대 환영받지 못할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아눌라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슈라의 손에 말고삐를 쥐여주지 않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슈라가 죽은 후 제대로 증언했다면. 그랬다면 파라간은 지금과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보아줬을까?

만약을 상상하는 것은 슈라의 버릇이었다.

언제부터 동생의 버릇을 흉내 내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파라간의 사랑을 받는 동생이 부러워 무의식중에 따라 하기 시작했었던가? 그런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고 가엽게 느껴져 하누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누님을 뵙지는 못했겠군요.”

“네, 아직 라누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요.”

최근의 오아시스는 함부로 숨을 내쉬기 어려울 만치 고요했다.

습격이 있었고 쿠드라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탓이었다.

거기다 라젠 행을 함께했던 세 부족의 후계자들과 차이툰의 귀족들이 궁에 억류되어 아직 풀려나지 못했다는 소문 역시 오아시스를 침묵하게 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이들이 의문을 풀고자 억류된 이들의 면회를 청했지만 그때마다 라누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눌라 님이 잘 계신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은데 여의치 않네요.”

“오아시스의 궁에서 시카의 후계자가 잘 지내지 못할 이유는 없죠. 잘 못 지낼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주고받던 파라간은 그 순간 하누가 몸을 움찔거리는 것을 확인했다.

역시나 하누는 알고 있었다.

아눌라가 무엇을 준비해 라젠으로 떠났는지, 그리고 돌아오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파라간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하누를 바라보다 그녀의 둥근 이마가 슈라와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아눌라 다음으로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은 상대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찾는 비참함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네?”

하누에게서 시선을 돌린 파라간이 시종이 내려놓고 간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이툰의 귀족들이나 즐기는 차를 이곳에선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차이툰의 귀족들을 흉내 낸 것이었다.

아눌라의 자존심에 누군가를 흉내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라누아가 되기 위해선 다른 누구도 아닌 차이툰의 귀족만큼이나 우아해질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라누아의 자리에 오른 건 차이툰의 귀족도 다른 부족의 여인도 아닌 라젠의 왕녀였으니 아눌라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헛짓거리한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 덕분에 귀한 차를 즐기게 된 파라간은 차를 한 모금 삼킨 후 하누에게 말했다.

“누님의 곁에 붙어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인 분이 하누 님이십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하지는 마십시오. 그대를 더 경멸하게 될지도 모르니.”

하누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파라간의 차가운 말이 가슴에 박혀 고통스러웠다.

아팠다.

동시에 기뻤다.

슈라가 죽은 이후 그가 자신을 향해 이리 길게 말을 붙여온 것은 처음이었다.

질문한 것도 답을 원한 것도 모두가 처음이라…… 우습게도 하누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기뻤다.

“……무엇을 말씀드리면 될까요?”

“전부.”

“…….”

“전부 말해주세요.”

고압적인 말투. 그러나 그가 하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혐오와 분노가 넘실거렸지만 하누는 그 속에서 미약하게 빛을 내고 있는 ‘절박함’을 찾아냈다.

지금 그에겐 자신이 필요했다.

“제, 제가 전부를 말하면…….”

“하누 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제 소원…….”

“하누 님의 소원은…… 제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맞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파라간의 단 하나뿐인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천륜을 저버리는 짓까지 했었다.

“정말…… 정말로 그래 주실 건가요?”

“하누 님,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

“그러나 당신을 내 곁에 세워 누님에게…… 아눌라에게 벌을 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드리죠.”

“파라간 님…….”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내 마음은 슈라의 것입니다.”

단호하게 말을 끊은 파라간이 이를 악물었다.

기뻐하고 있는 하누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생을 죽게 한 여자가 제 소원을 이루었다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이 견딜 수가 없어 파라간은 계획에도 없던 말을 덧붙였다.

“하누 님, 당신은 당신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내 곁에서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울 겁니다. 죽을 때까지 슈라의 그림자를 볼 것이고 나의 멸시를 받을 겁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슈라와 함께 헬라임의 품에 안긴 나를 지켜봐야 할 겁니다.”

“…….”

“그래도 내 곁에 있고 싶다면…… 알고 있는 전부를 내게 알려주세요. 그러면 나는 하누 님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적당히 구슬릴 생각이었다.

제 옆자리를 얻고 희희낙락할 여자에게서 아눌라의 죄에 대한 증거를 얻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내건 조건에 기뻐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비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하누가 그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파라간은 하누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하게도 하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드릴게요. 전부 말하겠습니다. 파라간 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알려드릴게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꿇어앉은 하누는 울고 있었다.

기쁘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

죽어서 받을 천벌을 살아서 받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그의 곁에 설 자격을 얻어 기뻤다.

그리고 하누는 파라간이 말하지 않은 사실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나를 곁에 두고 당신도 고통스럽겠죠.’

하누가 파라간을 보며 슈라의 그림자를 찾듯, 파라간 역시 하누를 보며 슈라를 떠올릴 것이다.

살아서 지옥을 겪는 이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미안해 하누는 또 눈물을 쏟았다.

하누의 울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누의 대답을 들은 후 파라간은 누라비의 눈을 피해 숙부를 만났고 계획했던 모든 일을 빠르게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누라비의 금고 속 두크란이 사라진 걸 마지막으로 확인한 파라간은 오아시스의 궁으로 찾아와 세리아나를 찾았다.

세리아나는 파라간을 라누아의 홀이 아닌 쿠드라의 방에서 맞이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쿠드라의 공간에 들어선 파라간은 단 한순간도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은 채 자신이 알아 온 모든 것을 세리아나에게 보고했다.

“두크란은 없었다?”

“네, 라젠으로 떠나기 전 누라비 몰래 훔쳐냈다고 합니다.”

파라간은 이제 제 아비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 방에 들어서며 자신을 차이툰의 파라간이라 소개한 이상, 그와 누라비는 이제 아버지와 아들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치아린 님의 도움을 받아 아눌라의 명령으로 라젠으로 가져갈 선물 사이에 우루의 옷과 화살, 그리고 모래 오쿤을 몰래 숨긴 시종을 찾아냈습니다. 억류된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적당히 달래니 모든 것을 자백하더군요.”

“어디에 뒀지?”

“치아린 님께서 직접 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쿠드라와 라누아의 결혼식에 손을 쓴 자가 아눌라라는 증언도 확보했습니다. 아눌라에게 이용당한 전사는 이미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사이 파라간은 세리아나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정보를 가져왔다.

이번 습격의 배후가 아눌라라는 증거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녀가 남몰래 저질러온 모든 범죄가 파라간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누라비의 방해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한 이후였다.

“어떻게 이 많은 정보를 가져왔는지 물어도 될까?”

“시카의 하누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입을 열게 했습니다.”

어제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진 바이샤의 얼굴을 물에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던 세리아나가 깜짝 놀라 파라간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것은 그녀만이 아닌 듯 세리아나와 바이샤를 호위하며 서 있던 카얀과 치아린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 찮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획했던 일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

세리아나는 물수건을 내려놓으며 바이샤의 뺨을 쓰다듬어보았다.

자신이라면 파라간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것은 모르겠지만 파라간이 지금 어떤 각오로 서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파라간, 그대는 소원을 이룰 거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눌라의 몰락을 지켜볼 수 있게 해줄게.”

“감사합니다, 라누아.”

바람이 불어 방 안에 있는 이들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라누아, 어찌하시겠습니까?”

“오늘 저녁, 차이툰의 귀족들과 각 부족의 족장들을 불러들여. 그리고 억류된 이들도 함께.”

“……아눌라까지도요?”

“아눌라는…… 따로 대기시키는 게 좋겠지. 감시 인원도 더 붙이는 게 좋겠어.”

“명을 받습니다.”

“파라간, 지금 그대의 힘으로 시카를 장악할 수 있나?”

“저로는 부족합니다만 숙부님이 나서시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아, 두 사람도 참석하도록 해.”

“차이툰의 파라간이 명을 받습니다.”

이야기를 끝마친 세리아나가 손을 내젓자 파라간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물러갔고 곧이어 카얀과 치아린 역시 방을 나섰다.

잠들어 있는 바이샤와 단둘이 남게 된 세리아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에 몸을 뉘었다.

잠든 바이샤가 불편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옆으로 누운 세리아나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 깨어나려고 그래요?”

치료사는 바이샤가 몸속으로 들어온 독을 이겨 내고 있다고 말했다.

남아 있는 독을 모두 이겨 내면 당장이라도 눈을 뜰 거라고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라고도 말해주었다.

세리아나는 치료사의 말에 조금 안도하면서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바이샤가 걱정스러워 여전히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오늘 저녁이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나요. 그다음부턴 당신 차례인데…… 계속 이렇게 잠만 자면 어떻게 해요.”

바이샤의 느린 숨이 세리아나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부드러운 숨결이 꼭 안심하라 말하는 바이샤의 목소리 같다.

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바이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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