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거울의 파편 (6)
사랑하는 슈라, 단발머리가 어울리고 웃음을 사랑하는 소녀. 다정한 빛을 품은 다홍빛 눈동자엔 늘 웃음이 넘쳤고 작은 입술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했었다.
파라간은 그런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 역시 파라간을 사랑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무렵, 쿠드라께서 시카의 오아시스 입성을 허락하셨습니다. 오아시스 밖의 부족 중 우리 시카가 오아시스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일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차이툰의 이름으로 일어난 정복 전쟁. 옛 나라의 이름을 지금의 것으로 다시 세우는 그 전쟁을 제대로 치르기 전, 시카는 바이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시카의 누라비는 오랜 시간 시카가 쌓아온 정보와 그가 알고 있는 소문들을 이용해 바이샤를 위해 정복의 길을 열었다.
물론 시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길은 열렸을 것이다.
대신 많은 피가 뿌려졌을 것이다.
자신의 전사들을 아끼는 쿠드라는 시카의 정보로 인해 모래 위에 흩뿌려진 전사들의 피가 줄어든 것을 무척이나 기꺼워했고 그 기쁨에 시카가 자신의 오아시스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쿠드라를 섬기기로 한 이상 이 비옥한 오아시스에 드는 것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눌라는 시카가 받는 특별취급을 자신을 위한 것이라 믿으며 더더욱 기뻐했고요.”
세리아나는 파라간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직 그녀가 원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파라간이 하고 있는 지금 이야기는 그녀도 다 아는 것이었고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파라간에겐 그간 가슴속에 쌓아두기만 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시카의 모두가 들떠 있었습니다. 모두가 쿠드라께서 약속한 날만을 기다렸고……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아눌라는 아버지보다 앞장서 말을 몰았습니다. 시카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오아시스에 들기를 원했으니까요.”
“…….”
“그때…… 일이 일어났습니다. 슈라가 타고 있던 말이 무언가에 놀랐고 오아시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였다면 낙마로 이어질 상황이었지만 슈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시카에서 가장 뛰어난 승마술을 가진 이가 슈라였다는 소리는 세리아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라간은 그것이 무척이나 잘못된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쩐지 세리아나는 뒤에 이어질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이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눌라를 제치고 가장 빠르게 오아시스에 들어선 건 슈라입니다.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동안 나머지 시카의 사람들이 도착했고…… 그때 전 아눌라가 경계선 밖에서 슈라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보고도 별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일이 그냥 작은 해프닝일뿐 큰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족장이 아끼는 그의 조카가, 시카의 모두가 사랑한 작은 소녀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오직 하누만이 아눌라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적의가 자신의 동생인 슈라에게 향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하누는 동생에게 경고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오아시스에 뿌리를 옮긴 후 모두가 그 일을 잊을 때쯤 일이 일어났습니다.”
평소 술을 한 입도 마시지 못하는 슈라가 어째서인지 술에 취해 말을 탔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말 위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고 했다.
그녀가 술에 취했다 주장한 것은 아눌라였고 하누가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시카의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눌라가 슈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시카의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놀란 것은 아눌라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누의 모습이었다.
동생을 끔찍이 아끼던 하누가 슈라의 사고사에 증인으로 나선 것을 시카의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아시스 안에서 일어난 미심쩍은 죽음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의문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쯤 시카 내부의 일로 정리하라는 쿠드라의 명이 내려왔습니다.”
바이샤가 누라비에게 약속한 세 번의 자비, 그중 첫 번째가 그 명이었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파라간을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눌라의 주장 말고, 그대가 아는 진실은 무엇이지?”
“아눌라와 하누, 그리고 슈라가 함께 술자리를 가진 것은 맞습니다. 다만 슈라는 술이 아닌 차를 마셨고…… 그 차 안에 사람의 정신을 흩트리는 약이 들어있었습니다.”
“낙마는?”
“죽은 슈라 곁에 그녀의 말이 서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슈라는 약에 취해 스스로 말에 오를 수조차 없었을 겁니다. 어찌 말에 올랐다고 해도 낙마로 죽은 건 아닙니다. 말에서 떨어져 그렇게 목이 부러질 순 없으니까요.”
“…….”
“누군가가 손을 쓴 겁니다. 직접 목을 비틀었겠죠. 전 그게 제 누이라 생각합니다.”
파라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의 온몸이 분노와 슬픔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세리아나는 파라간에게 물을 것이 남아 있었다.
전염된 슬픔에 이를 악무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온 치아린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단단하게 잡아 오는 치아린의 손과 그 온기가 세리아나에게 힘이 되었다.
“확신하는 이유는?”
“그날 세 사람의 시중을 든 시녀의 증언이 있습니다. 아눌라가 작은 약병 하나를 건넸고 그것을 탄 차를 하누가 직접 슈라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낙마가 아닌 사람 손에 죽었다는 건?”
“……제가, 제가 슈라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그날 새벽의 공기를 파라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막에선 좀처럼 맡기 힘든 물비린내가 나는 안개가 유난히 자욱했던 그 날, 자신의 숨소리조차 시끄럽게 느껴지던 그때.
바닥에 흐트러진 그녀의 단발머리가 유난히도 눈에 박혀 차마 그 곁으로 달려가지 못했던 그 순간. 파라간은 아직도 그날의 그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진 자의 목은 그런 식으로 비틀려 부러지지 않습니다.”
고개를 든 파라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 모든 증거를 찾아냈음에도 아눌라를 벌하지 못한 건 역시 쿠드라의 명 때문이었나?”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이후에 아눌라보다 저를 더 두려워하게 된 이들이 자백해 알게 된 것입니다.”
“쿠드라의 명이 있기 전에는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나?”
“……아버지께서 믿고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연인의 죽음에 분노한 아들을 그렇게 달랜 아비는 그들의 왕에게 달려가 첫 번째 자비를 베풀어 달라 간청했다.
약속을 거둘 수 없는 바이샤는 그 청을 들어주었고 그렇게 쿠드라의 첫 번째 자비는 아눌라의 죄를 덮는 데 사용되었다.
누라비가 짐작한 것일 수도 있고 아눌라가 직접 누라비에게 제 죄를 자백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누라비는 아끼던 조카의 죽음을 사고사로 정리했고 쿠드라의 명이 있었기에 그 이후로 누구도 슈라의 그 죽음을 다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대는 정보를 모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군.”
“라누아! 무엇이든 명령하십시오! 이 목숨을 내놓으라 하시면 기쁘게 내어놓겠습니다! 헬라임을 향해 칼을 들라 하셔도 따르겠습니다!”
파라간이 자리에 엎드려 절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죄인이 벌을 받게 해주십시오! 억울함에 망자의 강을 건너지도 못했을 슈라의 영혼을 헬라임의 품으로 인도해주십시오!”
“시카에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상관없습니다.”
“…….”
“아버지가, 시카의 누라비가 저를 속였던 그 순간부터 시카는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라간을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가 그때까지도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치아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감추지 못하는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낯선 얼굴이었다.
울거나 웃거나 수줍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늘 보아오던 제 얼굴이 아니었다.
“파라간, 자리에서 일어나.”
치아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제 손을 빼어낸 세리아나가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치아린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세리아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을 어디에서 보았을까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곧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바이샤가 보여준 적 있는 얼굴이었다.
치아린은 ‘왕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세리아나를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번 습격의 배후는 라젠이다.”
“무슨!”
습격의 배후를 밝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파라간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세리아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라젠의 습격에 도움을 준 이가 아눌라라고 생각해.”
“…….”
“정확히는 이번 습격을 사주해 내 목숨을 노리다 쿠드라를 공격하게 된 거지.”
놀라움에 부릅떴던 파라간의 눈동자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슬슬 자신이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 알아차린 눈치였다.
“일에 대한 미끼로 나는 아눌라가 시카에 내려진 두크란을 이용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그것은 시카의 것이지 아눌라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하려 해. 쿠드라께서 시카에 내린 두크란이 잘 있는지 확인해줘. 그리고 이번 라젠행에 함께했던 시카의 시종들을 조사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물론 아눌라가 범인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 모두 나의 짐작일 뿐이지.”
“네.”
“하지만 나는 확신해. 그러니 그대가 증거를 찾아와. 억지로 만들어낼 필요는 없어. 슈라의 죽음에 대한 건 따로 진행할 테니까.”
“시카의 파라간이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파라간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밀스럽게, 그러나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벅차다면 치아린이 도울 것이고 내가 도울 거야.”
“네.”
“그리고 증거를 가져올 땐 그대를 시카가 아닌 차이툰의 파라간이라 칭해도 좋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파라간이 빠른 걸음으로 라누아의 홀을 벗어났다.
세리아나의 이번 명을 따르다 보면 파라간은 어차피 시카와 등을 지게 된다.
그는 바이샤도 평소에 눈여겨보던 인재였으니 이번 기회에 유능한 인재 하나를 차이툰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치아린.”
“네, 라누아.”
“파라간이 어떻게 움직일 것 같아?”
그가 물러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가 치아린에게 질문했다.
“우선 누라비의 금고를 확인할 겁니다. 아눌라가 두크란을 얻을 방법은 아비의 것을 훔치거나 물려받는 것뿐이니까요.”
“아눌라가 진짜 범인이라고 한다면……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훔쳤을 겁니다. 지금 아눌라가 지녀선 그저 독이 될 뿐인 물건을 누라비가 미리 내어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주제넘게 덧붙이자면…… 저 역시 아눌라가 이번 일의 배후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생각에 세리아나도 동의했다.
딸에 대한 애정이 과해 이해받을 수 없는 짓을 하기는 하지만 시카의 누라비는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족장만이 지닐 수 있는 두크란을 함부로 내어줄 리 없었다.
“금고를 확인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제 짐작이긴 하지만…… 하누를 찾아갈 것 같습니다.”
“하누는 아눌라의 수족이라고 했잖아.”
아눌라를 벌할 방법을 찾으며 제일 먼저 떠올린 이가 하누이긴 했다.
그러나 치아린의 말처럼 그녀는 아눌라의 수족이었고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 빠르게 포기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파라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하누가 사랑하는 게 파라간이니까요. 파라간의 곁에 있기 위해 아눌라의 수족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알고 있습니다.”
슈라의 죽음을 외면하고 그녀의 죽음을 거짓으로 포장했던 이유 역시 파라간이었다.
동생의 연인을 사랑하는 언니. 그 사랑이 하누를 잘못된 길로 떠민 것이다.
“파라간은 슈라 외의 사람을 곁에 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그의 곁에 형식적으로라도 머무르기 위해서는…… 족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혼인 말고는 방법이 없겠죠.”
“그와 결혼하기 위해 아눌라의 곁에 있는 거라고?”
“아눌라는 시카의 누라비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은 하누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기 위해 하누가 하는 짓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리아나는 그 순간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머니는 어떻게 될까?’
어머니와는 각자 잘 사는 것으로, 그냥 그렇게 아는 것으로 알고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도 그럴 수 있을까? 세리아나의 생각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