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거울의 파편 (5)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다.
세리아나를, 라누아를 얻기 위해 잠시 멈춘 것뿐이었다.
밟아 누른다면 얼마든지 누를 수 있는 상대, 그것이 차이툰이 바라보는 라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명분이 있어 나쁠 것은 없다.
라젠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난 것과 다름없지만 아직 대륙에 남은 다른 나라들이 있었다.
이젠 그들의 눈도 조금은 신경써야 했으니 손에 쥐고 있는 명분을 일부러 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치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세리아나를 향해 고개 숙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딜란트라는 남자의 가치는 쿠드라께서 판단하실 거야. 그자가 필요하다면 살리실 테고 필요 없다면 죽이실 테고. 안 그래?”
“네, 그렇습니다.”
치아린은 웃으며 답했다.
어리고 여리게만 보였던 그녀의 주인이 라누아로 훌륭하게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쿠드라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워두었어. 돌아가자.”
“라누아, 조금 쉬시는 게…….”
“미안해 치아린. 하지만 지금은 쿠드라 곁에 있고 싶어.”
“……그러면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부탁할게.”
치아린이 세리아나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세리아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두 눈을 감았다.
바이샤의 품에 안겼을 때와 다르게 몸이 흔들렸다.
대신 머릿속 혼란은 많이 가라앉았다.
라젠, 투기장의 노예, 가라사, 쓰러진 바이샤와 거울이 보여주었던 붉은 길.
아니, 붉은 길은 잊자. 지금은 거울이 보여준 미래의 어느 날을 고민할 때가 아니다.
세리아나는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그 장면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번 일을 해결한 이후에…… 그때 고민해도 돼. 지금은 바이샤가 무사히 깨어나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 일은…… 잠시 생각하지 말자.’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바이샤의 방이었다.
치아린의 품에서 내려와 바이샤가 엎드려 누워 있는 침대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세리아나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정리했다.
“라누아.”
“해독제는?”
“죄송합니다. 아직은…….”
“…….”
“독의 진행을 늦추는 약을 계속해서 올리겠다고 합니다.”
“해독제를 찾는 데 더 노력을 기울이라고 해.”
“유능한 이들입니다. 반드시 찾을 겁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카얀이 세리아나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었다.
“카얀, 쿠드라는 일어나실 거야. 그렇지?”
“일어나실 겁니다.”
몇 번을 확인하고 확인받아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세리아나는 똑같은 물음을 몇 번이고 카얀과 치아린에게 던졌다.
그때마다 몇 번이고 확신이 담긴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귀찮을 법도 한데 매번 성실히 대답해주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유가 생겼나?’
붉은 길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그가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자 드디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젠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해선 안 되는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그녀는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굳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아눌라는?”
“아직 억류되어 있습니다.”
“접근하는 이는 없었어?”
“시카의 누라비와 시카의 하누가 면회를 청하기는 했습니다.”
여전히 바이샤의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지는 못했지?”
“라누아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세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샤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아눌라가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나를 노리고 움직일 만한 동기를 가진 이가 아눌라 말곤 떠오르지 않아. 내 생각이 너무 과한 걸까?”
치아린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만류하는 카얀의 손짓에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참아냈다.
판단하는 것은 그녀가 할 일이 아니다.
치아린은 따르는 자였고 판단을 내리는 이는 세리아나였다.
“라젠의 왕도 그렇지만 밀라니안 공작도 그냥 움직일 자가 아니야. 무언가 대가를 받았겠지. 그게 뭘까?”
세리아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라젠의 왕과 밀라니안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자들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해 가며 움직일 만한 미끼는 무엇일까? 금화? 보석?
“아, 두크란…….”
대륙회의를 위해 찾아간 라젠에서 세리아나는 두크란으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했다.
거기다 어머니에겐 두크란으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선물했었다.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라면 분명 왕에게 달려가 그것들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그것을 탐내었을 것이다.
“치아린.”
“네, 라누아.”
“쿠드라께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두크란을 내렸다고 했지?”
“네.”
“아눌라도 받았어?”
“개인에게 내려진 두크란은 차이툰의 전사들까지입니다. 아눌라는 받지 못했죠.”
“그래?”
“네, 대신 개인이 아닌 시카의 이름으로 내리신 두크란이 있습니다.”
“……아눌라가 그걸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보통은 족장이 지니고 있지만…… 누라비라면 아눌라에게 그것을 양보했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 아닌 부족에게 내린 선물, 혹은 포상은 부족의 족장만이 지닐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부족을 위해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딸에 대한 사랑으로 가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누라비라면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아눌라에게 두크란을 선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크란인가…….”
정말로 아눌라가 이 일을 벌인 거라면 그녀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물건으로 라젠의 왕과 거래한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며 그 흐름을 따라 움직이듯 세리아나의 손끝이 바이샤의 어깨에 닿았다.
상처를 감싼 새하얀 붕대 위를 스치는 그녀의 손끝이 아주 살짝 움찔거렸다.
“치아린.”
“네, 라누아.”
“아눌라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가 누굴까?”
“시카의 하누입니다.”
치아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살한, 혹은 자살 당한 람과 다르게 하누는 아눌라가 아끼는 수족이었다.
그녀라면 시카의 누라비보다도 아눌라의 더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녀에게 아눌라의 약점을 묻는다면 하누는 답할까?”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아눌라에게 가장 큰 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야?”
“……시카의 파라간입니다.”
이번에 답한 것은 카얀이었다.
그는 누라비의 둘째이자 아눌라의 동생인 파라간의 무뚝뚝한 얼굴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슈라의 일로 제 누이와 골이 깊습니다.”
또 슈라다.
바라의 자라하도 슈라의 일로 아눌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다.
대체 슈라라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리아나는 마지막으로 바이샤의 손등을 쓰다듬은 후 카얀과 치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일부러 들춰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하려 했어. 하지만…… 이젠 알아야겠어. 슈라라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쿠드라께서 금하셨기에 저희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슈라의 죽음에 아눌라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쿠드라께서 그러신 이유는 시카의 누라비에게 약속한 세 번의 자비 때문이겠구나.”
“네. 일이 일어난 직후 누라비가 쿠드라께 독대를 청했습니다.”
“……슈라는 파라간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어?”
“사촌이자 연인이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 남은 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이번에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버린 세리아나였다.
만약 바이샤가 억울하게 죽임당했고 그를 죽인 이는 처벌받지 않았다면…… 세리아나는 절대로 그자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해가 뜬 후 파라간을 라누아의 홀로 불러들여 줘. 시카의 누라비가 알지 못하도록.”
“명을 받습니다.”
준비를 해야 해. 세리아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라젠의 왕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걸 조만간 알아차릴 것이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암만 아둔한 자라 해도 이번 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도 준비를 할 것이다.
“당신이 깨어나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바이샤 당신을 위해 준비할게요. 제 준비가 어설프더라도 용서해주세요. 아직 야안에게 전쟁을 준비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걸요.”
* * *
해가 뜨기 전 약을 가져온 치료사가 바이샤의 입 안에 그것을 흘려 넣는 것을 확인한 세리아나는 그를 카얀과 치료사에게 맡긴 후 라누아의 홀로 향했다.
해독제는 아니었지만 독의 진행을 늦추는 약이라고 하니 아주 잠깐은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이다.
세리아나가 라누아의 홀에 도착했을 때 파라간은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카의 파라간이 라누아를 뵙습니다.”
아눌라만큼이나 짙은 피부색을 가진 남자였다.
긴 앞머리로 살짝 가려진 이마 위에 검은색 머리끈을 묶은 그의 눈동자는 붉은색이었다.
깊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은 세리아나가 그의 인사를 받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이른 아침부터 불러 미안해.”
“괜찮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그대를 불렀어.”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영양가 없는 말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말재주가 없기도 했고 마음이 급하기도 했던 탓에 세리아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파라간에게 질문을 던졌다.
“슈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
“그대에게 힘든 물음임을 알고 있어. 허나 꼭 그대가 답해 줬으면 해.”
“……그것을 왜 물으십니까?”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러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하는데…… 난 그것이 슈라의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해.”
“그저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면 시카의 파라간은 따를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해.”
파라간의 눈동자가 세리아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고요하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한 것을 지켜보며 세리아나는 다시 파라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어쩌면 그대에게 가혹한 일을 부탁할지도 몰라. 그것은 시카를 배신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아비를, 그리고 누이를 버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나는 반드시 그대에게 그만한 보답을 해야 해.”
“…….”
“슈라가 그대의 연인이라 들었어. 정확하게는 알지 못해도 슈라의 죽음에 의문이 있다는 건 알아. 나뿐만 아니라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 의문을 풀고 싶어 한다는 것도.”
“……쿠드라께서 덮으신 일입니다.”
“그것이 쿠드라의 의지가 아니라는 건 그대도 알 거라 믿어. 모른다면 지금 알아두는 것도 좋겠지. 내 이름으로 맹세컨대 그것은 쿠드라가 원해서 하신 일이 아니야.”
“그렇다 해도 이미 끝난 일입니다.”
“나는 끝을 낸 적 없어.”
“……네?”
파라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일렁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한 움직임에 세리아나가 미소 지었다.
“정확하게 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
“라누아?”
“이곳은 차이툰이야. 나보다 파라간,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아? 쿠드라와 내가 맡은 바 일이 다를 뿐, 나 역시 그대들을 벌할 힘을 가지고 있어. 쿠드라께서 덮으셨다면 쿠드라의 영역에서 끝이 났다는 소리지 나의 힘이 미치는 영역까지 끝났다는 소리는 아니야.”
“…….”
“그대가 내게 힘이 되어준다면 그 시작이란 걸 해볼까 해. 그대를 위해서. 슈라를 위해서라고 믿어도 좋아.”
“……슈라를 위해서…….”
“그러니 말해줘. 슈라는 왜 죽은 거야? 아니, 이렇게 물으면 안 되지. 파라간, 말해. 아눌라가 슈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파라간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작은 희망과 망설임이 뒤엉킨 그의 눈빛은 간절해 보였고 동시에 불안해 보였다.
세리아나는 그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파라간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음은 급했지만 재촉할 순 없었다.
그의 오랜 상처를 헤집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가 마음을 정할 때까진 기다려주어야 했다.
“정말로…… 슈라를 위해 움직여주실 겁니까?”
“그래.”
“쿠드라의 뜻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분도 내 뜻을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
“…….”
“파라간, 내가 그대에게 보여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 아니, 나는 그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조차 아무것도 보여준 적이 없어.”
“라누아…….”
“그러니 보여줄게. 나 세리아나 쿤 라누아가 슈라의 죽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에 얽힌 죄인들을 처벌할 거야. 그러면 다른 이들도 알게 되겠지. 내가 누구인지.”
세리아나의 말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으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던 파라간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제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없지만 파라간이 결심했다는 것을 세리아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제 누이, 아눌라는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모든 일에 자신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어떤 이보다 잘나고 앞선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죠. 슈라는…… 슈라는 그런 누이의 앞을 가로막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