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68화 (68/110)

#68. 거울의 파편 (4)

“라누아의 홀로 가겠어.”

“준비하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라누아.”

카얀과 치아린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커다란 손을 힘주어서 한번 잡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조각이 박혔던 발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탓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라누아!”

“……고마워, 치아린.”

서둘러 다가온 치아린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도움을 받으며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 발을 조심스럽게 옮기기 시작했다.

바이샤가 깨어나기 전에 그를 위해 이런 일을 벌인 이를 알아내고 벌줄 것이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가 그런 의지를 담고 빛을 내고 있었다.

라누아의 홀에 도착해 자신의 자리에 앉은 세리아나는 홀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와 가라사를 눈에 담았다.

두 사람 다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해 퀭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양팔이 뒤로 묶인 채 꿇어앉은 두 남자의 뒤로 붉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라누아의 호위전사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드물게도 라누아의 홀에 들어온 카얀이 치아린과 함께 세리아나가 앉은 자리 양옆에 서서 죄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인들은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치아린의 목소리가 라누아의 홀에 울려 퍼졌다.

“제, 제 이름은 딜란트입니다. 소속은 라젠의…… 미끼 노예입니다.”

“……라젠?”

예상치 못한 말에 딜란트의 옆에 꿇어앉아 있던 가라사마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루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가 우루의 전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대충 그를 압박하기 위한 미끼라고 생각했는데 라젠이라니……. 딜란트를 바라보고 있던 가라사의 시선이 세리아나를 향해 돌아갔다.

“저, 저는…….”

자신을 딜란트라 소개한 남자가 말을 잇는 순간, 짙은 살기가 라누아의 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어느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홀을 지키고 있는 차이툰의 모든 전사가 내뿜는 살기였다.

“어째서 라젠에서 온 자가 우루의 옷을 입고 있지?”

평소의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세리아나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그 말에 흠칫 몸을 떤 딜란트가 마른침을 삼킨 후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미친…….”

고개를 들어 세리아나를 바라본 딜란트는 순간 제 처지를 잊고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정뱅이와 소매치기의 신에 맹세컨대 그는 홀 안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연둣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와 붉은 과실을 머금은 듯한 입술.

그녀가 라젠에서 가장 유명한 사생아이고 그들의 왕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무례하다!”

떠밀렸다 생각하자마자 바닥에 엎어진 딜린트는 볼에 차가운 돌이 맞닿고 제 목을 누르고 있는 누군가의 발바닥이 느껴지는 순간, 제 목뼈가 부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놀라움에 흐릿해졌던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빛을 되찾았다.

지금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할 때였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저는 그냥 제가, 제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딜란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했다.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여자가 뭐라고 떠들던 이 넓은 공간의 주인은 분명 저 아름다운 라젠의 반쪽 왕녀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들은 소문 중에 저 왕녀가 포악하다는 소리는 없었으니 분명 그를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딜란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인지 그의 목을 누르고 있던 발이 사라졌다.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하라.”

“네, 네! 저는 투기장의 미끼 노예입니다!”

“라젠은 노예를 부리는 것이 불법이다. 나를 속이려는 것이냐?”

“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라젠의 왕녀이시자 이 모래 왕국의 라누아이신 분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딜란트는 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바닥에 엎드려 필사적으로 외쳤다.

라누아가 무엇인지는 감옥에서 병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 신이라고 했어. 신의 자식이라고……! 저 여자가 나를 살리겠다고 하면 분명 살려줄 거야!’

그가 매달릴 수 있는 동아줄은 세리아나 한 사람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

자신을 스스로 미끼 노예라 소개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자존심은 그의 명줄보다 값어치가 없는 물건이었다.

“라젠의 높으신 귀족 나리들이 근래에 몰래 즐기고 있는 놀이입니다.”

“…….”

“투기장에 검투사 노예들을 밀어 넣고 돈을 거는 겁니다. 저, 저 같은 미끼 노예들은 검투사 노예들이 나서기 전에 나리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지는 역할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라누아 홀에 든 모든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구역질이 나는 이야기였다.

유흥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이용하다니……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왕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몰래몰래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왕 전하께서도 투기장에 제법 자주 들르시는…….”

딜란트는 말꼬리를 흐리며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라젠의 왕은 세리아나의 아비였다.

제 아비를 나쁘게 말하는데 좋아할 자식이 있을까? 하지만 딜란트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세리아나의 얼굴에선 ‘투기장’에 대한 불쾌함 그 외에 다른 감정은 읽어낼 수 없었다.

“라젠의 국왕이 그대들을 보냈나?”

“정확히는 밀라니안 공작님이…….”

“어째서?”

“그…… 투기장의 주인이 밀라니안 공작님입니다. 노예들의 실소유주이기도 하고…….”

노예가 불법인 나라에서 공작이라는 자는 노예를 부리고 국왕이라는 자는 그 노예들의 목숨을 유흥거리로 삼는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올랐다.

세리아나는 손을 들어 딜란트의 말을 막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일단은 이야기를 더 들어보아야 한다.

감정에 흔들려 해야 할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노예 이야기는 그만해도 된다. 그러니 내 첫 질문에 답하라. 어째서 그대가 우루의 옷을 입고 있지?”

“공작님이 이걸 입으라 했습니다.”

“그걸 입고 무얼 하라 했지?”

“라누아님을 데려오라고…….”

“뭐?”

“상하지 않게 데려오라 했습니다.”

“어째서?”

“따로 팔 곳이 있다고……. 히익! 사, 살려주십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아린이 검을 뽑아 딜란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수위를 넘은 이야기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감히!”

“치아린, 나는 아직 들을 이야기가 남아 있어.”

“하지만 라누아!”

“치아린.”

이를 악문 치아린이 물러났지만 딜란트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노예가 되기 전 고작 좀도둑에 불과했던 그가 치아린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고 버텨낼 리 없었다.

“댁의 고향, 듣던 것보다 더 많이 썩어 있군.”

가라사가 세리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굴욕적인 자세였지만 가라사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엎드린 채 몸을 떨고 있는 딜란트와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라누아께선 네가 입을 열어도 좋다 허락하지 않으셨다.”

“쿠드라의 종께선 그 와중에도 침착하시고. 라누아의 종과는 비교되는군.”

“가라사!”

“저건 오줌을 안 지린 게 용한 상태잖아. 그러니 이젠 내 차례지.”

여유로운 그의 말투엔 독기가 빠져 있었다.

세리아나는 그것이 바이샤와의 결투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딜란트는 이야기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으니 가라사의 말을 들어볼 차례라는 말에 수긍한 것이다.

“우리 우루는 라젠과 관련 없다. 그딴 놈들의 손을 빌릴 바엔 그냥 다 같이 죽고 말지.”

“믿겠다.”

세리아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샤에게도 이를 드러냈던 우루가 라젠과 손을 잡을 리 없었다.

“나에게 묻고 싶은 건 두 가지겠지. 하나는 독, 남은 하나는 습격이 가능했던 이유.”

“……말해줄 텐가?”

“내 전사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말해주지.”

“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믿어보겠어.”

망설임 없이 답하는 세리아나를 잠시 바라본 가라사가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정직하고 간절하게 빛나고 있는 세리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우선은 독. 그건 우리랑 상관없어. 내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우리 우르는 독 같은 비겁한 수는 쓰지 않아.”

“……그래.”

“습격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래 오칸 덕분이야.”

“모래 오칸?”

“사막의 짐승입니다. 누런 털을 가진 주둥이가 길고 다리가 짧은 짐승으로 모래 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짐승이나 벌레를 먹고 삽니다. 후각이 발달해 추적용으로 훈련 시켜 사용하는 짐승 중 하나입니다.”

치아린의 설명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안의 수업 중에 그 이름을 한번 들어봤던 것 같았다.

“모래 오칸으로 무얼 했지?”

“우연히 목함에 든 쪽지를 발견했을 뿐이야. 그 쪽지에 그쪽 일행의 움직임이 남겨져 있었고.”

“뭐?”

“친절하게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거라는 안내도 되어 있더군.”

가라사의 말을 듣는 순간 카얀은 그 목함을 남긴 것이 바이샤가 찾고 있던 쥐새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젠을 떠나기 전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일 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길을 잘 아는 자야.”

세리아나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가라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만하고 무례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왜 이리 순순히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막을 모르는 사람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상세히 적혀 있었어. 아마 저것들을 안내하기 위한 장치였겠지.”

가라사의 시선을 따라 세리아나의 시선도 딜란트를 향해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진정된 듯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리 협조적인 거지?”

“내 사람들을 살려야 하니까.”

“…….”

“나는 쿠드라에게 졌어. 이제껏 해온 일이 있으니 나는 죽겠지. 하지만 내 사람들은 아직 쿠드라와 라누아의 자비에 기댈 기회가 있을 테니까.”

담담한 목소리였다.

세리아나는 가라사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과연 바이샤가 저 사내를 어찌 처리할까 생각해 보았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들을 아끼는 바이샤였다.

그리고 가라사는 바이샤가 탐낼 재주를 가진 자였다.

물론 그의 말처럼 한 짓이 있으니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거야.’

세리아나는 어떤 식으로든 바이샤가 그와 그의 전사들을 거둘 것이라 생각했다.

“라젠의 딜란트.”

“네, 네!”

“독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아니, 아니요. 모릅니다. 독을 쓰라는 말은 없었어요.”

“……내가 그대를 믿어도 되나?”

“저는 살고 싶, 습니다. 죽기 싫어요! 거짓말은 안 했습니다! 진짭니다!”

딜란트의 필사적인 외침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명예를 아는 자는 아니었으나 제 목숨을 끔찍하게 아끼는 자였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이 자리에서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처분은 이후에 결정하겠다. 두 사람을 본래 있던 자리로 데려가라.”

세리아나의 명에 전사들이 딜란트와 가라사를 일으켜 세워 라누아의 홀에서 끌고 나갔다.

순순히 끌려나가는 가라사와 다르게 딜란트는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 살려달라 외쳤지만 홀에 남은 이들은 그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살려두실 작정이신가요?”

“응.”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아도 살려둬야 해. 특히 저 딜란트라는 자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세리아나와 치아린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카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건 치아린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렇지?”

“……네.”

카얀이 답했다.

라젠이 독을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라젠의 국왕과 공작이 세리아나를 노리고 직접 ‘습격’을 명했다.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차이툰이라는 나라 자체가 우스워진다.

그러니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세리아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저자는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명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증인이자 살아 있는 증거야.”

“하지만…….”

“치아린, 나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도 잘 몰라. 하지만 사교계의 다툼은 조금 알고 있어.”

치아린은 조용히 세리아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곳의 피가 튀지 않는 싸움에도 명분은 중요해. 누가 먼저 약점을 드러냈는지, 누가 빌미를 제공했는지…… 그 작은 싸움도 그러한데 나라 간의 전쟁에도 명분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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