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거울의 파편 (3)
아눌라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계획이 틀어졌다.
아니,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녀는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지를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살폈다.
오아시스의 궁에 딸린 창문이 없는 방, 그녀가 바라던 라누아의 방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초라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아눌라는 이곳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어째서……!”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뒤의 말을 삼켰다.
방 안 곳곳에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에 분명 쿠드라와 라누아의 호위전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이번 일에 자신이 엮여 있다는 약간의 힌트도 흘려서는 안 됐다.
‘라젠의 돼지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믿음이 가지 않던 자였다.
그러나 그 밀라니안 공작이라는 자가 국왕의 머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믿어보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아눌라는 이 간단한 계획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밀라니안 공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처음 우루의 전사들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제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하리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습격을 예상했던 공간에 나타난 것은 ‘진짜’ 우루의 전사들이었으니까.
아눌라의 계획대로라면 습격자는 우루의 복식을 갖추고 우루의 활을 쏘는 라젠의 병사들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며 사절단의 선물 사이사이 우루의 물건들을 숨겨온 것이다.
거기다 그 ‘습격자’를 위해 일행의 뒤를 쫓을 수 있는 흔적을 남기고, 더 나아가 앞질러 갈 수 있는 길을 안내까지 해주었다.
사막의 길을 읽는 데 탁월한 시카의 후계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식을 만들어 입에 퍼 넣어줘도 못 삼킬 머저리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호의를 베풀었다.
그런데 그 계집애 하나를 못 죽이고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
‘다 죽었겠지?’
아눌라는 그녀가 준비했던 습격자들을 떠올렸다.
세리아나가 납치되고 얼마 되지 않아 차이툰의 전사들은 습격자들을 모조리 포획했다.
수가 적다고는 하나 차이툰의 전사들은 모두 일당백을 해내는 이들이었기에 정리는 손쉬웠다.
바이샤는 붙잡힌 포로들을 보고 분노했지만, 아눌라는 내심 우루의 전사들이 그 라젠의 계집애를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생아로 태어난 부정한 여자가 라누아라니,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치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상상도 잠시뿐이었다.
포로들을 살피는 와중에 진짜 우루의 전사들 사이에 섞여 있는 라젠의 병사들을 발견한 것이다.
길을 제대로 찾아오긴 한 것인지 우루의 전사들과 반대 방향에서 활을 날리던 이들이 바로 라젠의 멍청이들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아눌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누구든 저들을 자세히 살피게 된다면 진짜 우루의 전사들이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납치된 세리아나를 신경 쓰느라 바이샤가 아직 포로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눌라는 우루의 전사들로 변장한 라젠의 병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헬라임이 그녀를 돕는 것인지 바이샤가 카얀과 몇몇 전사들을 데리고 습격자들의 추적을 위해 자리를 뜬 것이다.
아눌라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포로들에게 나누어줄 물주머니에 독을 탔다.
주변 상황이 어수선했던 터라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아눌라는 이 상황을 오아시스의 궁에 알린다는 핑계를 대고 시카의 시종 몇과 함께 자리를 떴다.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독이 아닌데다 라젠의 병사와 우루의 전사들 모두의 물주머니에 독을 탔으니 누구도 자신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자라하가 의심하는 듯했으나 떠나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행들에게서 떨어져나온 아눌라는 시종들을 먼저 오아시스로 보내고 우루의 전사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일이 어그러지기는 했으나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리아나가 우루의 손에 죽어주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눌라가 직접 손을 써 죽이더라도 모두가 우루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쿠드라가 그딴 년을 구하기 위해서 움직인 거야!’
바이샤를 앞질러 우루의 거처에 도착했고 세리아나가 달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아눌라는 몰래 세리아나의 뒤를 쫓았고 화살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조합한 독을 흠뻑 적신 화살촉이 사생아의 심장에 박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년이 맞아야 했어! 쿠드라가 아니라 그년이 그 화살을 맞고 죽어야 했다고!’
바이샤의 어깨에 화살이 박히는 장면을 보고 아눌라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저 화살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냥 죽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한 것이다.
미친 듯이 말을 몰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아시스로 향하던 시카의 시종들과 합류한 것은 천운이었다.
그리고 이 꼴이다.
쓰러진 바이샤가 오아시스로 돌아왔고 대륙회의를 위해 오아시스를 떠났던 모든 이들이 궁 안에 감금당했다.
차이툰의 귀족이나 각 부족의 후계자, 시종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이샤가 깨어날 때까지, 혹은 그의 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격리되어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이 방 안에 있어야 하지?”
“라누아께서 허락하실 때까지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에 아눌라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라젠에 함께 갔던 이들은 그 망할 여자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저 시종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분명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불결한 사생아를 아직도 라누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눌라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시카의 아눌라다! 누라비의 첫 번째 자식을 계속해서 가둬둘 수는 없어!”
“라누아께서 원하신다면 언제까지고 가능합니다.”
아눌라는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답하는 시종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다 자신이 라누아의 자리를 빼앗겼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선 저 시종의 혀부터 잘라낼 것이다.
그리고 그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생긴 여자의 고향을 밀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증거를 지워야 해.’
계속 아쉬운 소리를 해대는 라젠 국왕의 입을 막기 위해 써준 계약서가 있었다.
그리고 시카의 공을 높이 사 바이샤가 직접 내린 두크란도 그자의 손에 있었다.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 습격의 배후 역시 밝혀질 것이다.
물론 그녀가 라누아의 자리에 오른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바이샤는 죽어선 안 된다.
그는 제 손을 잡고 붉은 길을 걸을 때까진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죽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세리아나가 되어야 했다.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해. 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해.’
밖으로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누라비는 분명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올 것이다.
그녀의 아비는 딸을 아주 많이 사랑했으니까. 만약 아비가 안 된다면 하누라도 불러들여야 한다.
사랑에 눈이 먼 그 착실하고 멍청한 계집애는 이번에도 제 사랑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줄 테니까. 그것이 비록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라도 상관없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이니 두 번째는 더 쉬울 것이다.
아눌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소식을 전할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 * *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곁에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밥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바이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과 붉은 길을 걷게 될 그 여자가 누구냐고.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여인이 그녀냐고.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버릴 것이냐고.
그러나 지금의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얕은 숨을 내쉬며 기절한 듯 잠들어있는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조차 닦아줄 수 없는 상태였다.
“라누아, 제발…….”
치아린이 애원했지만, 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손을 놓아버리면 다시는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바이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치료사는?”
“해독제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서두르라고 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최선을 다해선 안 돼. 무슨 방법을 써도 좋으니…… 쿠드라를 무사케 할 해독제를 만들어 당장 가져오라고 해.”
세리아나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억지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매달릴 곳이 없었다.
죄책감과 초조함이 뒤엉켜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폐를 눌러 호흡을 가쁘게 했다.
“쿠드라는 깨어나실 겁니다.”
“나도 알아.”
“알고 계신다면 라누아. 당신의 종이 간청하는 대로…….”
“아니. 나는 여기에 있을 거야, 카얀.”
“라누아.”
“카얀은 치료사에게 한 번 더 다녀와. 상황을 보고해. 더는…… 더는 내가 버틸 수 없으니 당장, 당장 쿠드라의 눈을 뜨게 할 약을 가져오라고 해.”
치아린의 훌쩍임이 들려왔다.
그녀에겐 미안했지만 지금은 바이샤가 우선이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먹지도 잠들지도 않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제 호흡과 바이샤의 호흡을 바꾸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이 참담한 일에 대해 책임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카얀과 치아린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웃는 얼굴만을 보여주었던 그들의 라누아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쿠드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이 지금 그녀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한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애원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라누아를 저대로 둘 수 없어요.”
“라누아께서 원치 않는 일을 우리가 할 순 없어.”
“알아요! 나도 알지만……!”
“쿠드라께서 깨어나지 않으신다면 라누아께서도 잠들지 않으실 거야.”
카얀은 울고 있는 치아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주인들은 지금 위험한 상태였다.
바이샤가, 그들의 쿠드라가 깨어날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저대로 라누아를 내버려 두었다간 긴 잠에서 깨어난 쿠드라가 분노할 것이다.
두 사람의 종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모습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섬겨야 할 주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슬금슬금 기어올라 두 사람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때 시종 하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한쪽 손을 내밀었다.
라누아의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쿠드라의 시종들이 사용하는 신호였다.
밖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손짓에 치아린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카얀이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얀 님.”
“무슨 일이냐?”
“포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몇이나?”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죽어 나간 포로들을 제외하고 이곳 오아시스의 감옥에 옮겨진 이는 다섯.
겨루기라도 하듯 빠르게 죽어 나가던 죄수들이 겨우 하나를 남기고 모두 죽었다.
카얀은 팔짱을 낀 채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말하는 바가 너무 선명하군.”
하나가 살아남았다.
전부 죽어 나갔는데 오직 하나만,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그 하나는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카얀은 확신했다.
“물과 음식을 주고 대기시켜라.”
“네.”
“우루의 전사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가라사는 자존심이 강한 자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특별히 신경 써서 감시해라.”
“네.”
병사를 돌려보낸 후 잠시 생각을 정리한 카얀이 쿠드라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의 상태는 아까와 똑같았다.
치아린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제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주인은 카얀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라누아. 포로가…… 자백을 하겠다고 합니다.”
솔직히 그는 이 사실을 세리아나에게 알려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했었다.
그의 주인이 저리 누워 있는 이상 이 차이툰을 이끌고 지탱할 이는 라누아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카얀의 고민은 짧게 정리되었다.
판단은 그가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섬기는 신의 자식들은 그리 나약한 이들이 아니었다.
카얀은 고개를 숙인 채 세리아나의 답을 기다렸다.
“……자백하겠다고?”
“네.”
“…….”
“어찌할까요?”
“……가라사는 어쩌고 있지?”
“여전히 입을 다문 상태입니다.”
“자백을 하겠다는 포로와 가라사, 두 사람 모두 내 앞에 데려와.”
“라누아, 그건 몸을 추스르신 후에 하셔도……!”
“아니, 지금 들을 거야. 하나가 자백을 하면 가라사도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을 거야. 그러면 쿠드라에게 무슨 독을 쓴 건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죄인을 만나겠다는 말에 반색하며 휴식을 취하라 애원하려던 치아린은 단호한 세리아나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주인을 주인의 침소로 모시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안다.
알고 있어서 치아린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