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거울의 파편 (2)
“붉은색…… 무슨 일이지?”
차이툰에서 붉은색은 쿠드라와 라누아가 공적인 자리에서만 입는 예복이었다.
세리아나는 거울 속 그가 어떠한 ‘큰일’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일이냐 아니면 미래의 일이냐 하는 점이었다.
최근 들어 ‘미래’의 일을 주로 비춰주고 있는 거울이었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 미래의 일이라는 확신이었다.
세리아나는 필사적으로 바이샤의 모습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움직이던 그녀가 곧 무언가를 찾아냈다.
“이마의 상처…… 지금의 바이샤에겐 없는 상처야!”
꽤 선명한 상처였다.
그리고 ‘지금’의 바이샤는 가지고 있지 않은 상처였다.
이것은 미래다.
거울이 미래의 바이샤를 비춰주고 있는 것이었다.
“바이샤는 무사해! 무사한 거야!”
세리아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직은 바이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지금 그녀가 환호한다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치아린이나 다른 시종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가까스로 소리를 삼킨 세리아나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울이 보여주는 바이샤가 정확히 어느 때의 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래에 살고 있는 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세리아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가 무사할 것이라는, 조만간 눈을 뜰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세리아나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침착한 시선으로 거울 너머의 바이샤를 살필 수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평소보다 더욱더 환하게 웃고 있는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어딘가가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샤?”
거울은 그의 시선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세리아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거울이 비추는 것은 오로지 바이샤, 한 사람뿐이었다.
세리아나는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기 위해 거울 너머의 흐릿한 풍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또…… 붉은색?”
거울 너머의 풍경은 흐릿했지만 두드러진 색깔만큼은 구별해 낼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흐트러지며 내리는 하얀색은 언젠가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차이툰의 백성들이 뿌렸던 꽃일 것이다.
저 파란색은 분명 맑게 갠 하늘, 그리고 바이샤의 발아래 깔린 붉은색은 설마…… 붉은 길?
“어째서?”
생각이 멈췄다.
그가 서 있는 곳이 붉은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세상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세리아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붉은 길, 그 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바이샤. 그리고 그가 걸치고 있는 화려한 붉은 옷.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그림이었다.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 차이툰에 와서 보았던 것들, 그리고 야안에게 배웠던 것들. 그것들을 모두 떠올려 지금 바이샤가 ‘어떤’ 자리에서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내려 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상황을 제외한 다른 상황을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다른, 다른 일일 거야.”
세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미래의 일이라고 한다면 지금 세리아나가 떠올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
그러나 암만 머리를 굴려보아도 거울 너머의 저 모습은…….
“결혼식…….”
세리아나가 아는 한 이 차이툰에서 바이샤가 붉은 길 위에 서 있을 만한 행사는 ‘결혼식’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세리아나와 이미 결혼식을 올렸다.
저것이 미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결혼식일 수도 있어!”
조금 전 바이샤의 이마에 난 상처를 확인한 후였으니 지금 세리아나의 가정은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불길하게 흐르기 시작한 생각을 제자리에 붙잡아 두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됐다.
바이샤의 두 번째 결혼식이라니…… 그런 것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신과 바이샤의 결혼식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이마에 난 상처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그날 바이샤는 저곳에서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가마채가 부서졌고 가마에서 떨어질 뻔한 나를…… 바이샤가 구해주었어.’
이마의 상처도 바이샤의 미소도 모르는 척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바이샤가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의 환희를 기억하는 탓이었다.
기뻤고, 두근거렸고, 벅차오르는 감동에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한 거울 속 바이샤의 모습을 모르는 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이샤가…… 두 번째 신부를 맞이하는 거야?”
세리아나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 두 번째 결혼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차이툰에선 이혼과 재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신의 이름 앞에 부부임을 맹세한 이상 그 인연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다 믿었기 때문이다.
재혼이 허락되는 때는 배우자가 헬라임의 품으로 돌아간 이후, 즉 죽음을 맞이했을 때뿐이었다.
물론 모두가 재혼을 택하지는 않는다.
헬라임의 품에서 기다리고 있을 배우자를 존중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재혼을 택하는 이들의 경우는…… 그 지위가 높아 거느려야 할 이들이 많은 경우, 그리고 자식이 없거나 아주 어려 양쪽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경우였다.
세리아나가 죽어 거울 속 바이샤가 두 번째 결혼식을 치르는 중이라고 한다면 그가 쿠드라였기에, 쿠드라의 짝인 라누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기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의 두 번째 결혼식, 세리아나는 그가 다른 아내를 맞이한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는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먼저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이샤…….”
세리아나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거울 속 바이샤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홀린 듯 그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던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손이 아니라 손끝에 닿는 차갑고 매끄러운 거울의 감촉에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거울 너머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담긴 온기가 세리아나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손을 내민 채 그 손을 잡으라 재촉하듯 살짝 고갯짓하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뒤의 장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멈추라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세리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배려하지 않는 거울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거울 너머의 세상을 세리아나에게 비춰주고 있었다.
“하지 마…… 싫어…….”
애처롭게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세리아나는 거울에게 애원했다.
늘 그를 비추며 세리아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거울은 이번엔 그녀에게 절망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녀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거울 너머의 바이샤가 드디어 흐릿하게만 비치는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바이샤의 손을 중심으로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거울이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던 세리아나는 환한 빛을 내는 거울 너머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는 바이샤의 얼굴에 금이 가는 것을 확인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더이상 밝아질 수 없을 만큼 환하게 빛나던 거울의 빛이 한순간 사라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망막에 맺히던 빛이 사라진 걸 느낀 세리아나가 천천히 눈을 뜨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마치 거미줄이 친 것처럼 금이 간 거울 너머 여러 개로 쪼개어진 세리아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리아나의 행복한 꿈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마법의 거울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진다던 키륜의 목소리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넋을 놓은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가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가 거울의 금이 간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 순간 손이 닿았던 부분을 시작으로 잘게 쪼개어진 거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유리가 쏟아지는 소리에 놀란 치아린이 달려와 그녀의 안전을 살폈지만 세리아나는 여전히 깨어진 거울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라누아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요?”
“…….”
“움직이지 마세요, 라누아. 거울 조각을 치운 다음에……. 라, 라누아!”
자신을 걱정하는 치아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세리아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 조각 몇 개가 발바닥에 박혀 그녀의 빠른 걸음 아래 붉은 발자국을 계속해서 남겼다.
놀란 치아린이 뒤따라 달리며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세리아나는 듣지 않았다.
아니, 치아린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에 닿지 못했다.
지금 당장 바이샤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세리아나의 두 귀를 막아버린 것이다.
“라누아! 제발 멈추세요! 치료를! 하다못해 유리 조각만이라도 빼낼 수 있게!”
“바이샤를…… 바이샤를 만나야 해!”
“라누아!”
세리아나는 길고 긴 복도를 달렸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잠옷을 입고 달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길을 터 주었다.
어스름한 초승달의 빛을 받으며 하얀 잠옷을 입고 달리는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카얀! 당장 고개를 돌려요! 너희들도! 누구든 라누아의 잠옷 끝자락이라도 눈에 담으면 그 눈을 파내버릴 거니까!”
이윽고 다다른 바이샤의 방 앞에서 치아린의 엄포에 눈을 돌린 카얀과 시종들을 밀치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간 세리아나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잠들어있는 바이샤를 발견했다.
그의 느린 숨소리와 있는 힘껏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세리아나의 호흡이 섞여 기묘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라누아, 제발 발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세요.”
“…….”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애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바이샤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새하얀 침구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그 검은빛이 어지러워 세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바이샤…… 나는…… 당신은…….”
그의 침대 아래 털썩 주저앉은 세리아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뻗어 침대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바이샤의 손끝을 붙잡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줄을 붙잡은 것처럼 절박하게,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 가장 연약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애처롭게,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바이샤의 손끝을 매만졌다.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덕분에 세리아나의 발바닥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낼 수 있었던 치아린의 흑요석처럼 검은 두 눈동자가 세리아나에게 닿았다.
그 잠깐 사이 무슨 악몽을 꾼 것일까?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바이샤를 바라보는 세리아나를 보며 긴 한숨을 삼킨 치아린이 뒤로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조용히 다가온 시종이 내민 약초와 붕대로 세리아나의 발을 치료한 치아린은 들리지 않을 인사를 남긴 후 아주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세리아나는 치아린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바이샤의 얼굴 단 하나만이 담겨 있었고 그녀의 두 귀엔 그의 느린 호흡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난…… 나는…… 바이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터져 나오지 못한 울음이 뒤섞인 작은 목소리였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바이샤에게 답을 구하던 세리아나는 자신을 지키려다 쓰러져버린 그의 모습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무슨 자격이 있다고!’
세리아나는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속으로 집어삼켰다.
거울이 깨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바이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해 보였던 그의 미소는 세리아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 설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주제도 모르고 그의 곁을 욕심내서…… 그래서 바이샤가 지금 이렇게…… 이렇게!’
그 독이 묻은 화살은 자신이 맞아야 했다.
거울 너머 바이샤의 두 번째 결혼식을 보고 나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화살을 맞고 죽어 그의 옆자리를 비워줘야만 했던 거다.
‘그 거울을 가진 이들은 전부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조금 전 갑작스럽게 떠오른 키륜의 한마디가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왔다.
그때엔 그저 그 말을 불길하다 여겼을 뿐이다.
운명의 상대를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도 불행해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잠시 미뤄두었던 생각이다.
그러나 이 순간 세리아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바이샤를 가리키지만 바이샤의 운명은 세리아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주 볼 수 없는 화살표였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손끝에 매달려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뱉어내지 못한 울음소리가 그녀의 폐를 누르고 심장을 조여왔지만 세리아나는 그 울음소리를 밖으로 토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