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65화 (65/110)

#65. 거울의 파편 (1)

바이샤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카얀은 그의 등에 박힌 화살을 조심스럽지만 빠른 손길로 뽑아낸 후 상처 난 자리 주변을 단검으로 절개했다.

마취 없이 생살을 찢었지만 바이샤는 이를 악문 채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대로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카얀이 베어낸 상처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카얀은 허리에 차고 있던 물주머니의 입구를 열어 두크란으로 정화한 깨끗한 물로 바이샤의 상처를 씻어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화된 물로 입 안을 가볍게 행군 후 바이샤의 등에 난 상처에 입을 가져다 댔다.

독을 빨아내고 뱉어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이어졌다.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부축을 받으며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구하다 바이샤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빠르게 다가와 부축한 치아린이 아니었다면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누아, 정신 차리세요. 지금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바이샤가 나, 나 때문에……!”

“라누아 탓이 아니에요! 쿠드라께 일이 생긴 이상 라누아께서 중심을 잡으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 독을 빨아낸 후 다시 한번 상처 난 자리를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입 안을 헹군 카얀이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오아시스로 돌아가야 합니다!”

카얀의 목소리에 이를 악물고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바이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예상한 최악의 상황에는 없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차이툰의 쿠드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화살을 챙……기고 우루의 남은, 전사들을 모두 잡, 아와.”

“쿠드라!”

“라누아, 의 안전, 이 우선이다.”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쿠드라! 독을 전부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느리게 호흡하세요. 심장이 빨리 뛰면 독이 더 빠르게 퍼집니다.”

“나도…… 알아…….”

카얀의 다급한 목소리에 간신히 답하며 바이샤가 몸을 일으켰다.

독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지금은 똑바로 일어서서 그의 전사들을 바라봐야 했다.

“오아시스의 궁으로 간다.”

말끝이 조금 흔들렸지만 막힘없이 한 문장을 뱉어낸 바이샤가 비틀, 쓰러질 뻔한 순간 따뜻한 무언가가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 덕분에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한 상황을 모면한 바이샤는 코끝에 스치는 라일 꽃의 향기로 그를 부축한 온기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우루의 임시 거처에 마차가 있어! 당장 전사들을 보내서 가져와!”

“네, 라누아.”

“쿠드라, 정신을 놓으시면 안 돼요!”

“세리……아나…….”

“네, 당신의 라누아, 세리아나가 곁에 있어요. 헬라임의 부름에 응하지 마세요. 제발……!”

평소처럼 가벼운 농담을 하며 세리아나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열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바이샤는 입을 다물었다.

당장은 어지럽지만 어려서부터 독에 대한 면역을 길러온 자신이라면 분명 괜찮을 것이다.

바이샤는 스스로가 이 정도 독에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세리아나가 그 화살에 당했다면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세리아나의 몸에 기대어 눈을 감은 바이샤는 최대한 호흡을 느리게 뱉으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를 노린 이에 대한 분노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당장은 그 분노를 누르고 평정을 되찾아야 했다.

등 뒤로 아직 태양의 열기가 남은 모랫바닥이 느껴졌다.

언제 제 몸이 뉘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바이샤는 주변의 소란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카얀과 치아린이 얼마나 유능한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라면 분명 세리아나를 오아시스의 궁까지 무사히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흑, 바이샤.”

뺨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과 그의 살갗 위로 방울져 떨어져 내린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자신이 베고 누운 것은 세리아나의 무릎일 것이다.

상처 난 부위는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몸을 떨며 울고 있을 세리아나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울지 말라 말해야 하는데…….’

영혼이 바닥없는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늪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축 늘어진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리아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점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 그의 몸을 뒤덮는다 느낀 순간 바이샤는 정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 * *

오아시스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날아온 화살, 자신을 감싸는 온기, 거대하기만 했던 남자가 제 품에 무너졌다는 거짓말 같은 진실. 부분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단 하나 바이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고 자신 때문에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아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빨리 바이샤를……!”

쿠드라의 방으로 바이샤를 옮긴 후 다급하게 찾아온 치료사를 향해 세리아나가 소리 질렀다.

시커멓게 죽은 안색을 하고 숨을 몰아쉬는 바이샤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자신의 수명이 깎여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카얀의 빠른 응급처치와 어려서부터 기른 독에 대한 면역력 덕분에 가장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치료사의 말에 안도한 것은 잠시였다.

독이 묻은 화살을 자신의 연구실로 가져간 치료사가 제자들과 함께 해독약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바이샤가 죽어버릴 것 같다는 공포감에 세리아나는 물을 삼키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라누아, 조금 쉬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아니야. 쿠드라의 곁에 있을게.”

“라누아께서 쓰러지실 것 같아 그래요. 해독제도 찾고 있고 아주 위험한 순간은 넘겼다고 하니…… 제발 라누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셔야 해요.”

치아린이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세리아나는 쉽게 바이샤의 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을 구하려다 일어난 일이었다.

안전한 장소로 돌아왔지만 두려움과 죄책감이 세리아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쿠드라께선 일어나실 거예요.”

“……그럴 거야.”

“그러니 제발 조금이라도 쉬세요, 라누아.”

“하지만…….”

“쿠드라께서 눈을 떠 지금 라누아를 보게 되면 걱정하실 거예요.”

“…….”

치아린은 마지막 말이 세리아나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보다 상대의 마음을 더 걱정하는 것이 너무나도 세리아나다웠다.

“쿠드라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린다 생각하고…… 방으로 돌아가세요. 깨끗이 씻고, 식사를 하고,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제가 다시 모시겠습니다.”

“쿠드라는…….”

“카얀이 있어요. 그와 호위전사들이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도록 쿠드라 곁을 지킬 거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누아. 이 목숨을 걸고 쿠드라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묵묵히 서 있던 카얀까지 말을 보태자 세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이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쿠드라는…… 바이샤는 깨어나실 거야. 그렇지?”

“네. 일어나십니다.”

“……응.”

치아린의 대답에 가까스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세리아나가 엎드려 누워 있는 바이샤의 이마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정말로 괜찮아지고 있는 것인지 열은 많이 내려 있었다.

“곧 돌아올게요. 그때엔 웃으며 반겨주세요.”

세리아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치아린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바이샤를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는 자신의 방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걸으며 다시 헬라임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쿠드라의 상태를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네, 그리 조치해 뒀습니다.”

궁에 도착해 바이샤를 옮기며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람들의 입단속이었다.

바이샤의 상태가 궁 밖으로 흘러나가선 안 된다.

그런 이유로 라젠 행을 함께했던 차이툰의 귀족들과 각 부족의 후계자들은 오아시스의 궁 안에 억류되었고 길을 함께 따라나섰던 시종들 또한 궁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금지당했다.

“우루의 전사들은?”

“족장과 그 전사들 역시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가두어 뒀습니다.”

“아무도 접촉할 수 없게…… 감시해야 해.”

“네, 라누아.”

“그리고 세 부족의 후계자들은…….”

“그들도 전부 억류된 상태입니다. 우선은 몸을 쉬게 하는 것만 생각하세요, 라누아.”

치아린의 걱정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멀게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목욕 준비를 하는 시녀들을 바라보며 푹신한 쿠션 위에 몸을 기대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새의 깃털이 가득한 쿠션이 끝없이 그녀의 몸을 삼키는 것 같았다.

치아린은 그런 세리아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몸에 걸친 것들을 하나하나 조심히 벗기고 욕의를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목욕 때면 따라오던 치아린의 장난스러운 말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세리아나의 휴식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치아린과 시녀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욕조 가득한 물을 헤집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수면향을 피울까요?”

“……아니, 억지로 잠들면 악몽을…… 꿀 것 같아.”

“라누아…….”

욕조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온 세리아나가 몸을 휘청거렸다.

시녀들이 서둘러 손을 뻗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져 버렸을 것이다.

치아린은 커다란 타월을 가져와 젖은 욕의의 물기를 제거하고 서둘러 그것을 벗겨냈다.

그리고 깨끗한 타월 한 장을 더 가져와 세리아나의 몸을 닦았다.

사치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마사지를 거부한 세리아나는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자 시녀들이 바지런히 움직여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초승달이 머리 꼭대기에 오른 어두운 밤, 촛불 하나만을 밝혀 놓은 방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우유를 한 잔 데워왔습니다. 수면향만큼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거예요.”

“고마워.”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우유를 한 모금 삼켜 보았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을 타고 넘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한 모금 더 삼킨 세리아나가 아직 잔에 가득 남은 우유를 치아린에게 다시 건넸다.

치아린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마셨다간 전부 게워낼 것이 분명했다.

“누워 있다 보면 잠이 올 거야.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네, 언제나 그러했듯.”

조금 흐트러진 이불을 세리아나의 턱 끝까지 닿도록 끌어올린 치아린이 애써 미소 지었다.

세리아나는 겁쟁이에 잘난 것 하나 없는 자신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바라봐 주는 치아린이 너무도 고마웠다.

“치아린이 곁에 있어 줘서…… 다행이야.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쉬세요, 라누아.”

“치아린, 혹시 쿠드라께 무슨 일이 생기면…….”

“네, 바로 달려와 라누아를 쿠드라께 모셔가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응.”

치아린이 방을 나가고 세리아나는 홀로 남았다.

바람이 두꺼운 커튼을 비집고 들어와 방 한쪽의 빈 새장을 흔들었다.

아로의 것이었다.

“사냥을 나갔구나…….”

영리한 새는 입구가 훤히 뚫린 큰 새장을 자신의 집으로 삼았다.

본래 있었던 잠금장치는 아로의 날카로운 부리와 튼튼한 발톱에 뜯겨나간 이후였다.

사막의 하늘을 자유롭게 누리는 새가 어째서 저런 새장을 자신의 둥지로 삼았는지는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 새장을 집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흔들리는 새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가 결국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휴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화살이 날아와 바이샤의 어깨에 박히던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이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상냥한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라리 내가 그 화살을 맞았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을 구하려다 바이샤가 위험에 처했다.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 세리아나의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자신의 기도가 신에게 닿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라젠에서 백작가의 저택, 자신의 방에서 수십 수백 번을 신을 향해 기도했지만 신은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 당신께 기도하는 것 외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세리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며 간절하게 헬라임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그를 데려가지 말라고,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식인 쿠드라를 부디 지켜달라 매달렸다.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기적처럼 그녀의 애원에 답하기라도 하듯 거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눈꺼풀 너머 느껴지는 환한 빛에 눈을 뜬 세리아나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거울이 빛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초승달이 뜨는 밤이었다.

꽉 찬 보름달이 뜨는 밤이 찾아오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 어째서……?

“이게 무슨…….”

침대에서 내려온 세리아나는 홀린 듯 거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거울을 가린 흰 천을 걷어냈다.

그리고 빛나는 거울 안쪽에서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건강한 바이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바이샤!”

거울 너머 화려한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그가 마치 세리아나를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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