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이름의 무게 (4)
가라사의 아버지이자 우루의 선대 족장 샥은 종종 어린 가라사를 무릎에 앉히곤 사막의 여러 전설을 들려주곤 했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머리엔 꼭 이런 이야기를 붙이곤 했다.
[백 년 전 차이툰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너는 분명 쿠드라가 됐을 거다.]
그저 자식에게 기대를 가지는 평범한 부모의 평범한 바람이었다.
어린 가라사도 그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아버지를 따라 웃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자라나며 우루의 가장 강한 전사가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족장의 자리에 올랐을 땐 그 말의 의미는 달라져 있었다.
‘나라면 분명 쿠드라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고 승리가 쌓일 때마다 그 생각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해갔고, 바이샤가 쿠드라의 이름으로 사막의 바람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엔 제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가라사는 분노했다.
고작 그 오아시스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쿠드라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은 불합리했다.
실재할 리 없는 신이 내린 자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곳에서 왕이 태어나고 그 이름이 핏줄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라사는 사막의 다른 부족들 역시 이 부조리함에 반발할 거라 생각했다.
망해버린 왕조의 핏줄 따위는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시카의 누라비가 바이샤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시카는 유랑을 택한 사막의 부족 중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부족이었다.
사막의 환경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막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부족들과 교류를 나누는 시카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큰 덩치를 가진 시카가 작은 전투 하나 없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작은 부족들이 그 뒤를 따르듯 바이샤의 발등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바라나 라옴은 저항하는 듯 보였지만 그들도 다른 부족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은 자가 쿠드라라 불리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우루 내부에서도 바이샤를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가라사는 무시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꺼내는 자가 있다면 그 혀를 뽑아 버릴 것이라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다소 충동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가라사 역시 족장의 첫 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교육을 받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그는 차이툰과 우루의 체급 차이를 확실하게 인지한 후 그들을 상대할 방법으로 게릴라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차이툰의 전사들을 막아냈다.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리라 확신했다.
성공이 코앞이라 믿었다.
그런데…….
“어째서!”
가라사는 있는 힘껏 칼을 휘둘렀다.
상상 속에선 몇 번이고 베었던 바이샤의 목은 베어낼 수 없었다.
아니, 머리카락 한 올도 잘라낼 수 없었다.
공격은 번번이 막혔고 그의 검을 받아내는 바이샤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고작 이 정도냐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도발까지 해온다.
이건 아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가?”
“무, 무슨 헛소리를! 크윽!”
바이샤의 검을 내리쳤다 도리어 튕겨 나온 제 검의 손잡이를 간신히 붙잡은 가라사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거친 숨을 내뱉었다.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순 없어……. 이건 말이 안 돼!”
“내가 너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핏줄만 타고난 너 따위가 어째서!”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쿠드라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난데없는 물음에 가라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이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려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성과는 없었다.
“태어나 첫울음을 터트린 그 순간부터 신의 이름을 짊어졌다는 뜻이다.”
“네 핏줄이 좋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눈도 채 뜨지 못한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바이샤는 예언을 가지고 태어난 망한 왕조의 유일한 자손이었다.
바이샤의 아비이자 선대의 쿠드라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를 진짜 ‘쿠드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왕조를 부흥시킬 유일한 희망이자 신의 이름을 짊어질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란 바이샤는 그가 내쉬는 숨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 가운데 홀로 서야만 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중압감과 모두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한 사람의 어깨에 이렇게 많은 짐을 얹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샤가 신을 믿지 않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쿠드라의 이름을 가지겠다 했지? 그렇다면 넌 그 이름의 무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나?”
“시, 시끄러워!”
“내가 특별하게 태어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쿠드라가 될 수 있었다 생각한다면……. 너는 내 사막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딱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바이샤의 기세가 변했다.
이제껏 가라사의 검을 받아주기만 하던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려치는 검에 무게가 실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내미는 걸음에 가라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라사를 응원하던 우루의 전사들은 입을 다문 지 오래였다.
가라사는 강했다.
그것을 부정할 사람들은 없었다.
애초에 그 강함을 알기에 쿠드라가 되겠다는 그에게 동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엔 작은 오류가 있었다.
‘강하다.’
우루의 전사들이 하나둘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가라사는 강했다.
그러나 저 사막의 왕은, 그들의 쿠드라는 더욱 강했다.
검을 한번 내리칠 때마다 공기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일었고 그 쇳소리는 지켜보는 이들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오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검을 뽑아 든 차이툰의 전사들 등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이샤가 다치기라도 할까 불안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바이샤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카얀과 치아린의 여유를 믿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일방적이니 아주 조금 불쌍하네요.”
“쿠드라께 싸움을 걸었으니 저 정도는 감당해야지.”
“카얀, 내 사랑. 같이 날뛰고 싶은 거예요?”
“…….”
“남자들은 다 자라서도 애들이라니까.”
등 뒤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가벼운 대화를 들으며 세리아나는 아무도 모르게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싸움을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이 싸움은 일방적이다.
바이샤가 끝내려 한다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는 싸움. 그러니 자신도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리야.’
가라사의 칼끝이 바이샤를 향할 때마다 불안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없었다면 진작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싸움은 끝에 치달았다.
가라사는 제가 든 검이 더는 버티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남자가 힘의 전부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길 수 없다.
가라사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릎을 꿇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자신의 마음까지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승부를 내야만 할 때였다.
“죽어!”
검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실은 가라사가 몸을 날렸다.
그런 가라사를 바라보며 바이샤 역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앗!”
위에서 내려친 가라사의 검과 아래에서 올려친 바이샤의 검이 부딪쳤다.
세리아나의 눈에 그 모든 장면이 담겼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에 세리아나는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마지막 노을빛이 검의 표면에 반사되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라사의 검 표면이 갈라졌다.
아니, 갈라졌다 느낀 순간 부서졌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비산하는 검의 조각들이 세리아나의 눈에, 바이샤의 눈에, 그리고 가라사의 눈에 담겼다.
“젠장-!”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잡았다.
날이 부서진 검 자루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은 가라사가 소리를 질렀다.
모래땅 위에 흩어진 검의 파편이 마치 그의 오만한 꿈을 비웃는 것 같았다.
“네가 졌다.”
바이샤의 선언에 우루의 전사들이 일제히 무릎 꿇었다.
검은 손에서 놓아버린 지 오래인 그들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제야 자신들이 누구와 대적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왜…… 진 거지?”
“내가 짊어진 것의 무게가 더 무거웠으니까.”
“……이름……인가?”
바이샤는 가라사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몸을 돌렸다.
차이툰의 전사들 너머 이제야 안도한 얼굴로 서 있는 세리아나가 보였다.
“당장 목을 자르려 했지만 네가 대답해야 할 것이 있으니 나는 참겠다.”
“뭐?”
“결정은 라누아께서 하실 거다. 나의 라누아께선 자애로우시니 살고 싶으면 혓바닥을 늘리든 머리를 굴리든 알아서 해봐.”
세리아나를 빼앗긴 것은 자신의 잘못이다.
바이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세리아나에게 위협을 가한 가라사를 처벌할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그 모든 권리는 세리아나에게 있었다.
그래서 바이샤는 가라사의 목을 이 자리에서 잘라버린다는 선택지를 얌전히 포기했다.
“그래도 네놈이 멀쩡히 살아 있는 꼴은 보기 싫으니 베갯머리 송사라도 벌여볼까?”
“……무슨…… 뭐?”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 가라사를 뒤로하고 바이샤는 천천히 세리아나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은 녀석들도 모두 붙잡아라.”
“네, 쿠드라.”
바이샤의 손짓에 차이툰의 전사들이 무릎을 꿇고 앉은 우루의 전사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묶기 시작했다.
마중을 나온 카얀에게 검을 가볍게 던진 바이샤가 세리아나 앞에 섰다.
슬쩍 눈치를 살핀 치아린이 우루의 남은 전사들이 모여 있는 위치를 자신이 안다며 슬쩍 카얀의 손을 잡아당겨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기셨네요.”
“당연히.”
“네, 그럴 줄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짓는 세리아나의 얼굴을 본 순간 바이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거림을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피딱지가 앉은 목덜미와 엉망으로 변한 손이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박혔다.
‘스스로 목에 칼을…….’
머릿속에 그 상황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다.
제 목숨줄을 가지고 적을 협박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아니라 치아린을 탈출시키다니. 세리아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행동했는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이해를 거부했다.
바이샤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리 없는 세리아나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다 그의 뺨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가라사의 검이 부서지며 날아온 파편에 스친 자국이었다.
아주 작은 생채기였지만 세리아나의 눈에는 커다랗게만 보이는 상처였다.
“상처가……!”
“지금 누가 할 말을!”
깜짝 놀라 바이샤의 뺨에 손을 올리려던 세리아나는 화난 얼굴로 제 손을 잡아채는 바이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이샤 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내 상처보다 당신의 목에 난 그 칼자국이 나는 더 거슬려!”
“아…….”
그러고 보니 치아린을 탈출시키려다 베인 상처가 있었다.
조금 쓰라리긴 하지만 피는 멈췄고 빠르게 아물 거라는 생각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바이샤에겐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세리아나는 불꽃을 뿜을 것 같은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를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그래도 제 잘못은 아는가 싶어 바이샤가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던 순간 어디선가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바이샤였다면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려 위험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길한 소리가 세리아나를 향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바이샤는 몸을 피하는 대신 세리아나를 끌어당겨 제 품 안에 감췄다.
“윽”
“쿠드라!”
빠르게 날아온 화살이 바이샤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바이샤와 세리아나, 두 사람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금 먼 곳에 떨어져 있던 치아린이 그것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적이다!”
“두 분을 보호해라!”
“저기다! 잡아!”
카얀과 치아린, 그리고 다른 전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우루의 전사들을 밀쳐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몇몇 전사들이 달려나갔다.
남은 이들은 바이샤와 세리아나를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듯 서서 다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바, 바이샤…… 화, 화살이…… 화살이!”
“진정해, 나는 괜찮아.”
한발 늦게 바이샤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발견한 세리아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곧 숨이라도 넘어갈 듯한 얼굴로 그를 걱정하는 세리아나를 달랜 바이샤는 화살이 박힌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빠르게 그를 침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땅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빠르게 휘저으며 초점을 잡으려 애쓰던 바이샤는 자신의 몸이 기우뚱 기우는 것을 느꼈다.
세리아나의 비명이 다시 들려온 것도 같았다.
“바이샤!”
시야가 빠르게 빙글 돌아가고 주변의 소리가 웅웅 거리는 소음으로 변해갔다.
바이샤는 지금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떨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세리아나의 손을 붙잡고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카얀을 향해 말할 수 있었다.
“……독, 이다…….”
“쿠드라!”
“당장, 오아시스로…… 라누아를 지켜라, 카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