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이름의 무게 (3)
붉은 활을 든 여신. 라누아는 보통 그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막의 사람들은 입술만큼이나 붉은 활을 들고 한쪽 어깨엔 쿠락을 올린 채 그들을 자애롭게 내려다보는 여신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자라난다.
봄의 사냥대회가 오직 활로 잡은 사냥감만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단에 올리는 것 또한 활을 든 라누아를 기리는 것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과 전통이 이르듯 활은 라누아에게서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의 물건이었다.
그런데 생김부터 전설에 이르는 ‘라누아’와 닮아 있는 세리아나가 활을 들고 우루의 전사들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들에게 잠시 잊고 있던 신에 대한 경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뭐 하는 거야!”
전사들의 망설임을 읽은 가라사가 짜증을 담아 외쳤다.
자신이 쿠드라가 되기 위해선 ‘전설’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 이 모습은 결코 자신이 원한 그림이 아니었다.
고작 라젠의 여자 따위에 겁먹고 주춤거리는 우루의 전사라니! 가라사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가라사는 자신의 전사들을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날아온 화살 하나가 그의 입을 막았다.
제법 먼 거리에서 날아왔음에도 힘이 실려 있는 화살은 가라사의 뺨에 붉은 선을 긋고 지나가 바닥에 박혔다.
고작 ‘라젠의 여자’라고 무시하고 있던 세리아나가 날린 화살이었다.
우루의 전사들은 무의식중에 세리아나의 화살이 박힌 자리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라사의 눈동자에 깃들기 시작한 것은 분노였다.
“세리아나 쿤 라누아의 이름으로 말한다. 누구든 가장 먼저 나서는 자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세리아나의 외침에 가라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새삼 그 ‘라누아’라는 이름에 눌린 것은 아니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화가 났지만 우루의 전사들을 더는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됐다.
가라사는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바이샤!”
“……고작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나의 라누아께서 내 심장을 여러 번 내려놓게 만드시는군.”
세리아나가 우루의 전사들과 가라사의 발을 묶은 사이 다가온 바이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화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바이샤의 얼굴을 곁눈질한 세리아나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물으며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가라사를 향해 겨누고 있는 활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내가 늦었군.”
“딱 맞춰 오신걸요.”
“……할 말은 많지만…… 일단 저것들부터 정리하도록 하지.”
바이샤의 눈동자가 세리아나의 상처 난 목덜미와 벽을 문지르느라 엉망이 된 손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겨누고 있는 활까지 찬찬히 살핀 바이샤가 가라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더니 이렇게 다시 보는군.”
“운만 더럽게 좋은 새끼.”
“여전히 불경스럽고.”
“닥쳐!”
“건방져.”
바이샤는 자신을 노려보며 이를 가는 가라사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막에 남은 마지막 ‘부족’ 우루. 그리고 그 우루의 젊은 족장 가라사. 사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자신답지 않은 자비를 베푸느라 뿌리를 뽑지 못한 녀석들이었다.
“어지간하면 거둘 생각이었지만 너희는 선을 넘었다.”
“거둬?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쿠드라의 자리를 꿰찬 네놈 따위가 누굴 거둔다는 거지?”
가라사의 그 말에 우루의 전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하며 부족의 족장인 가라사를 따르고는 있었지만, 조금 전 세리아나에게서 본 ‘여신 라누아’의 모습 탓에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이 껄끄러워진 것이었다.
자신의 전사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가라사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루는 이제껏 정면에서 차이툰의 전사들과 정면에서 겨뤄본 적이 없다.
수적열세를 해결하기 위해 기습을 중심에 둔 게릴라 전으로 그들을 상대해온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임시거처에 남은 우루의 전사들 모두를 끌고 와도 전면전으론 승산이 없다는 걸 가라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합류해 검을 뽑아 든 차이툰의 전사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왕족으로 태어났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다못해 차이툰의 오아시스에서 태어났더라면 저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오아시스가 아닌 변방의 약소한 부족의 후계자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핏줄 하나로 그 자리에 오른 네가 무슨 사막 제일의 전사라는 거냐!”
가라사의 외침에 동요하는 이들은 우루의 전사들뿐이었다.
차이툰의 전사들은 그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사람들처럼 서 있었고 세리아나는 치아린에게 붙잡혀 잔소리를 듣느라 그의 목소리에 반응할 틈이 없었다.
“라누아! 어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세요!”
“치, 치아린.”
“제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아세요? 지금 제 배를 갈라 안을 들여다보면 오장육부가 전부 불타 재만 남아 있을 거예요!”
세리아나가 들고 있던 활을 건네받은 후 그녀의 목에 난 상처를 살피며 치아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독수리 밥으로도 쓰지 못할 쓰레기가 감히 그녀의 귀하디귀한 주인에게 상처를 내었다.
물론 세리아나 스스로 낸 상처였지만 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했으니 절대로 가라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마.”
“농담이라뇨! 저는 라누아의 종입니다! 제 생은 라누아를 위한 것이에요! 앞으로는 저를 버리시고……!”
“아니, 싫어.”
“네?”
작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던 치아린은 단호한 세리아나의 대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가 치아린을 비추고 있었다.
바이샤에게서 눈을 돌려 치아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세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치아린을 버리는 일 같은 건 없어.”
“라누아!”
“치아린은 내 소중한 가족이야. 어떻게 치아린을 버리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그녀의 물음에 치아린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라누아의 종으로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교육받았고 기꺼이 그런 삶을 살겠다 맹세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의 주인은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도 치아린이 계속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 그건 당연한…….”
“계속이라는 건 내가 헬라임의 품에 안기는 순간까지를 말하는 거야.”
“라누아…….”
“오래오래 내 곁에 함께 있어 줬으면 해.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싱긋 미소 짓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치아린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제 주인은 그 부탁이라는 것이 그녀가 내리는 어떤 명령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라누아의 종은 언제든 그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세리아나가 싫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치아린의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무척이나 무거운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치아린의 마음을 환희로 가득 채우게 하는 부탁이기도 했다.
‘더 강해지겠습니다, 라누아.’
라누아의 종으로 그 사명을 따르며 오래도록 주인 곁에 머무르는 방법은 치아린 자신이 강해지는 방법뿐이다.
치아린은 다시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가라사와 대치 중인 바이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졌다.
세리아나와 치아린이 대화를 주고받는 잠깐 사이 우루와 차이툰 사이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가라사는 이 긴장감의 주도권을 가진 쪽이 바이샤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이샤가 손짓 하나만 해도 이 균형은 무너질 것이다.
가라사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물러날 수 없었다.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군. 설마 나 하나뿐이었다면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닌가? 이 사막에서 가장 강한 전사는 바로 나야!”
“어리석은 자가 오만한 확신을 하는군.”
말에서 내려온 바이샤가 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놀란 우루의 전사들이 일제히 검을 뻗어 바이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으나 차이툰의 전사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가끔은 이리 직접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지.”
“뭐?”
“검을 들고 땅 위로 내려와라, 가라사. 네게 기회를 주마.”
“……일대일로 겨루겠다고?”
가라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바이샤를 상대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에겐 확신이 있었다.
‘왕족으로 태어나 누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해본 적 없는 자다. 그런 자의 검 따위 두렵지 않아! 문제는…….’
가사라의 시선이 차이툰의 전사들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을 읽은 바이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도 이 정도면 재주였다.
선만 넘지 않았다면 살려서 광대로 써먹어도 좋았을 것이다.
“네가 내 목을 자른다 하더라도 내 전사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를 함정에 빠트릴 생각이라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바에야 지금 당장이라도 내 전사들을 움직여 우루를 짓밟는 게 더 편하지.”
“그래도…….”
“혀가 길군. 왜? 자신이 없나?”
“하! 그럴 리가!”
말에서 내려와 검의 손잡이를 다잡는 가라사를 바라보던 바이샤의 시선이 아주 잠깐 세리아나에게 머물렀다.
애써 담담한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걱정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세리아나를 빼앗기고 태어나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무능한 자신에게 분노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치아린이 홀로 돌아와 세리아나가 제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는 소리를 전했을 땐…… 솔직히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뻔했다.
말을 전한 것이 치아린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 목을 비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듐이 세리아나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다는 말에 정신을 다잡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말을 몰았다.
겁도 없이 제 목을 내건 세리아나에게 화가 났다.
만나기만 한다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다짐을 받아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래바람 너머 세리아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로지 속도를 높여 그녀의 곁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제게로 향하던 말머리를 돌려 그 자리에 멈춰 서는 세리아나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작 화살 하나로 난폭한 우루의 전사들을 협박하는 세리아나라니! 웃긴 것은 그 협박이 먹혔다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며 움직이지 못하는 우루의 전사들과 가라사의 뺨을 긁으며 날아간 화살을 본 순간 불안함에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이 진정되기는 했지만 쉽게 넘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리아나에게 경고를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세리아나의 목에 난 상처가 들어왔고 엉망이 된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만 그 대상이 세리아나에서 가라사로 바뀌었다.
‘약탈꾼 주제에 감히 나의 라누아에게 저딴 짓을 했단 말이지?’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다시금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냥 뭉개는 것으로는 이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아 자신답지 않은 짓을 허락했다.
바이샤는 저를 노려보고 있는 가라사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네가 나보다 뛰어난 전사임을 증명해 보아라.”
증명하지 못한다면 죽음뿐. 처음부터 죽일 생각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그 전에 이 화를 푼다고 헬라임이 벌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아끼는 자식을 납치한 녀석을 혼내주었다 상을 내릴지도 모른다.
물론 신이 존재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진짜로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르지.’
바이샤는 가라사처럼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남자였다.
자신을 위해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옛이야기로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하압!”
먼저 움직인 쪽은 가라사였다.
그는 검면이 넓고 두꺼운 칼을 빠르게 휘둘러 바이샤의 목을 노렸다.
스스로를 사막 제일의 전사라 부를만한 깔끔한 동작이었다.
단번에 상대의 목을 잘라버릴 법한 힘과 속도가 실린 그 칼을 바이샤는 간단한 동작으로 막아냈다.
“제법 힘 조절을 할 줄 아는군.”
“시끄러워!”
놀리는 것이 명백한 바이샤의 말에 가라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증명하라는 말에 울컥하면서도 먼저 덤벼든 것이다.
그러나 있는 힘껏 내려쳤음에도 상대는 미동조차 없고 오히려 검의 손잡이를 쥔 제 손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 정도는 내 전사들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설마 그 정도의 힘으로 쿠드라의 이름을 얻겠다고 설친 건 아니겠지?”
“이제 시작이야!”
“그래, 부디 시작이길 빈다. 고작 이 정도 힘을 가지고 내 이름을 탐낸 거라면 무척이나 실망스러울 테니.”
가라사의 검이 다시 바이샤를 향해 날아들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메마른 사막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부딪힐 때마다 작게 모래바람이 일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 가라사 쪽을 조금 더 쳐줄 수 있을 만큼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검이 부딪혔다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라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다.
자신이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왜?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나?”
검이 맞물린 상황이지만 바이샤의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지금 막 궁금해져서 하는 질문인데…….”
“크윽!”
“설마 이제껏 너를 잡지 못한 것이 네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가라사를 노려보는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