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62화 (62/110)

#62. 이름의 무게 (2)

차이툰의 사막을 떠도는 부족들은 보통 천막을 이용해 거처를 마련한다.

이동이 쉽고 사막의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차이툰의 여러 사막을 떠돌며 약탈을 일삼는 우루 부족 또한 염소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천막을 거처로 삼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천막이 아닌 흙벽을 쌓아 만든 작은 집을 세리아나를 가둬두기 위한 장소로 삼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우루 부족은, 아니 정확히 우루의 족장 가라사는 세리아나를 얕봤다.

가라사는 그들이 생활하는 천막 하나를 비워 세리아나를 가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막은 사방이 뚫린 공터와 다르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작은 단검 하나로 조금 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던 문을 만들고 그 안으로 들어가 기껏 잡아놓은 인질을 빼앗길 수도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선 최소 셋 이상의 전사가 천막 주위를 지켜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고작’ 라젠의 왕녀 따위에 많은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바이샤를 불러들이기 위해, 그리고 붉은 길을 걷기 위해 ‘라누아’는 필요했으니 주의는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의 머릿속엔 세리아나가 안쪽에서 천막을 찢고 달아날 거라는 계산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정보’를 얻자마자 가라사는 벽을 쌓았다.

물은 무척이나 귀하고 뭉쳐지는 흙은 구하기는 어려웠지만 흙벽으로 사방을 막은 공간 하나면 라젠의 왕녀쯤은 손쉽게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의 생각은 유효한 듯 보였다.

라누아의 종을 맥없이 놓아주게 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라누아’는 무사히 손에 넣었다.

물론 그 ‘라누아’가 생긴 것과 다르게 조금 요란을 떨기는 했지만 가라사가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코나, 대충 진정된 것 같으면 들어가서 적당히 비위를 맞춰줘.”

“……가라사, 지금이라도 라누아를 돌려보내는 게…….”

“기껏 잡은 사냥감을 내가 왜?”

“사냥감이라니! 그분은 라누아야!”

코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가라사는 짧게 혀를 찼다.

헬라임의 전설을 이용해 이 사막의 왕이 될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신을 믿는 이들을 멍청하다 여겼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코나의 두려움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감정이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어차피 저 여자는 내가 쿠드라가 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그게 아니면 라젠의 여자 따위 내가 상대나 할 것 같아?”

“…….”

“기다려. 내가 붉은 길 위를 걷고 저 라젠의 여자가 내 아이를 낳고 나면 쓸모는 끝나. 그러면 네가 나의 라누아가 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판단해. 넌 그냥 내 말만 따르면 되고. 그게 어려워?”

코나는 자신감이 넘쳐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 가라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라사는 이랬다.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주변을 쉽게 무시하곤 했다.

코나를 라누아로 삼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그의 젖동무로 다루기 무척이나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지 다른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가라사, 난 언제나 너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어.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너무 위험해. 어떻게 라누아를 인질로…….”

“조용히 하라고 했어.”

“가라사 나는……!”

“참아주는 건 여기까지야. 나는 우루의 족장으로 네게 명령한 거다. 네 의견을 듣겠다는 소리가 아니었어. 알아들어?”

“……네.”

코나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가라사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까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이 심상치가 않았다.

“모래 폭풍이 올 시기는 아닌데. 별일이군.”

가라사는 여전히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코나를 내버려 둔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루의 전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쓸모없는 라젠의 여자를 되찾기 위해 그 운만 더럽게 좋은 사막의 왕은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무려 ‘쿠드라’를 맞이하는 자리였으니 성대한 준비가 필요했다.

“헬라임께서 벌을 내리실 거야……. 신벌을 받게 될 거야, 가라사…….”

가벼운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가라사를 보며 코나가 중얼거렸다.

어두워진 하늘과 사나워지기 시작한 바람은 분명 헬라임의 경고다.

가장 사랑하는 첫 번째 자식을 위협하는 어리석은 사막의 백성에게 보내는 헬라임의 경고가 분명했다.

코나는 어두운색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섬기는 신의 분노가 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 * *

세리아나는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손끝이 저리고 팔이 떨려 왔지만 세리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 저 문을 열고 코나나 가라사가 들어올지 몰랐다.

만약 그녀가 엘라이어이고 문밖에 있는 이들이 피오르 백작가의 하녀들이었다면 손쉽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짐작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세리아나가 알지 못하는 낯선 이들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그 소란을 피우고도 바로 연회를 찾아 움직이셨을까?’

항아리 속 물로 겉옷을 적시고 그것으로 벽을 문지르는 반복적인 행동도 힘들긴 했지만 조금 전 이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인 것이 그녀의 체력을 빼앗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세리아나는 방 안의 기물들을 모두 박살 내고 채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단장을 끝마치고 피오르 백작가를 나섰던 엘라이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난동을 부리고도 마차에 오르는 어머니는 아름다웠었다.

지친 기색 같은 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세리아나의 입가에 아주 잠깐 웃음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집중하자.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해야 해.’

어머니를 떠올리느라 벽을 문지르던 손이 느려진 것을 알아차린 세리아나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나 손을 움직였을까? 단단하기만 했던 벽이 물러지며 마치 녹아내리듯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라사의 주의가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벽이기도 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구멍이었다.

쉴새 없이 움직여 만들어낸 새끼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벽과 다르게 빠르고 간단하게 쌓은 벽은 그 작은 틈 하나로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가라사에겐 불행한 일이었고 세리아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세리아나는 몸을 비틀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구멍이 난 벽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었다.

‘가자.’

이제는 넝마가 되어버린 겉옷을 내려놓은 후 세리아나는 자신이 낸 구멍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세리아나가 낸 구멍은 비좁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이 빠듯하게 끼는 구멍 속으로 몸을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세리아나는 흙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있는 힘껏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거기 누구…… 큭!”

몸을 빼기가 무섭게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몸을 움츠린 것도 잠시. 자신을 향해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세리아나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듐이었다.

축 늘어진 우루의 전사를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내려놓은 듐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누아.”

“아니, 때맞춰 와줬어.”

듐이 아니었다면 다시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삼엄한 경비와 감시 속에서 바이샤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탈출하겠다는 마음이 앞서 성급히 움직이느라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세리아나가 손짓으로 듐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은 반성이 아니라 탈출이 우선이었다.

“길은?”

“찾았습니다.”

“안내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앞장서는 듐의 뒤를 쫓아 세리아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듐은 우루 전사들의 동선을 전부 파악한 것 같았다.

그의 도움을 받아 말이 묶여 있는 곳까지 어떤 방해도 없이 움직인 세리아나는 말을 묶어놓은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을 풀어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추적이 시작될 겁니다.”

“어느 방향으로 달려야 하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그곳에 쿠드라가 계신가?”

“네.”

듐이 대답했다.

세리아나의 그림자에 숨어 움직이는 동안 곳곳에 남겨놓은 표식과 치아린의 안내가 합쳐진다면 적어도 몇 시간 안에 그가 섬기는 왕과 여왕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과 여왕의 그림자와 종들은 그 주인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된다.

그녀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불안한 듯 투레질을 하는 말 곁으로 다가가 그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세리아나의 손길에 말이 진정하는 듯 보이자 듐이 다가와 말 위에 세리아나가 오를 수 있도록 빠르게 안장을 얹고 그 고삐를 쥐었다.

“이것을…….”

“활?”

등자에 한쪽 발을 올렸던 세리아나가 발을 내리고 듐이 내민 활을 받아들었다.

오아시스에서 그녀가 다루던 것과 다르지 않은 활과 화살이었다.

세리아나는 활의 시위를 가볍게 손끝으로 튕기고 화살이 담긴 화살집을 어깨에 둘러 등에 고정했다.

“고마워.”

“아닙니다.”

자신을 지킬 무기 하나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달리는 말 위에서 쏘아봐야 명중률은 극악으로 떨어질 테지만 위협용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활과 화살을 단단히 몸에 고정하고 말 위에 오른 세리아나가 고삐를 쥐었다.

멀리서 교대를 위해 다가오는 우루 전사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크게 심호흡하며 이를 악문 세리아나가 고삐를 세게 쥐고 듐에게 눈짓으로 신호하자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쾅!

듐의 발길질 한 번에 두껍고 단단해 보이던 마구간의 문이 부서졌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말들이 날뛰기 시작한 건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우루의 전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마구간을 뛰쳐나온 말들을 진정시키려 하는 사이, 세리아나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말의 고삐를 짧게 쥐고 그 등허리에 몸을 바짝 붙인 세리아나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녀보다는 늦었지만 듐도 날뛰는 말 한 마리를 잡아채 세리아나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잡아!”

“쫓아라!”

“말을 끌고 와!”

가라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울려 퍼지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들. 그것들이 올가미가 되어 날아오는 듯했다.

세리아나는 이를 악물고 달리는 말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는 듐이 중간중간 암기를 날려 추격자들을 견제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곧 끝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야 해.’

거친 모래바람이 그녀의 뺨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점점 더 거세어지는 바람에 피부가 따갑고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세리아나!”

그때였다.

거칠고 날카로운 바람에 섞여 그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시야를 방해하는 모래바람에 제대로 앞을 바라볼 수 없었지만 세리아나는 그 그리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바이샤!”

그 순간 마법처럼 모래바람이 멈췄다.

어두운 구름이 빠르게 걷히며 아름다운 노을이 진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마법과 같은 순간이었다.

“세리아나!”

그리고 그곳에 그가 있었다.

마치 태양을 짊어진 사람처럼, 붉게 물든 하늘을 등진 채 빠르게 말을 몰아 달려오는 바이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적, 혹은 마법. 그 외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바이샤가 달려오는 길을 따라 마치 길을 열 듯 하늘을 채웠던 검은 구름이 갈라지고 사라졌다.

쿠드라, 헬라임의 마지막 자식이며 헬라임이 가장 사랑하는 첫 번째 자식의 선택을 받은 자. 용맹한 사막의 전사이며 동시에 이 사막의 위대한 왕.

“바이샤!”

세리아나는 일렁이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려 눈물을 털어냈다.

기뻤다.

벅차올랐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이샤의 뒤로 차이툰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너무 멀었다.

이대로라면 바이샤가 도착한 이후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이샤가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위험해지는 것을 지켜볼 생각도 없다.

망설임은 아주 잠시였다.

세리아나는 고삐를 잡아당겨 달리던 말을 급하게 세우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녀를 향해 달려오던 바이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듐!”

우루의 전사들을 견제하며 세리아나의 뒤를 쫓던 듐은 제법 가까운 곳까지 이동해 있었다.

세리아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 후 등자에 걸친 발에 힘을 주고 무릎을 펴 마치 땅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듐이 곧 말을 버리고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세리아나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그런 행동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가 활과 화살을 손에 들었다.

갑자기 사라진 듐의 모습에 우왕좌왕하던 우루의 전사들은 곧이어 날라온 화살 하나에 놀라 그것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발견했다.

라누아,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이며 헬라임의 마지막 자식을 손에 넣은 자. 사막의 자애로운 여왕이며 전사들의 영혼을 헬라임의 품으로 인도하는 자.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등지고 활을 든 채 자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세리아나를 보며 우루의 전사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 왔던 사막의 전설 하나를 그렇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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