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름의 무게 (1)
눈을 감고 앉아 야안이, 치아린이, 그리고 바이샤가 알려줬던 사막에 대한 기억을 더듬던 세리아나는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작은 창문 너머 보이는 하늘이 한정적이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 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세리아나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세우고 허리에 힘을 줬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세리아나 쿤 라누아.’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이자 이 모래사막의 여왕. 그러니 그 누구도 자신을 얕볼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자가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심호흡을 한 세리아나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답했다.
“들어오라.”
“라누아, 물을 가져 왔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코나였다.
물병과 물잔이 올려진 접시를 들고 나타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와 세리아나 앞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식사는 곧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잔에 물을 채운 코나가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라누아?”
“그 물이 안전하다는 것은 어찌 보장하지?”
“네, 네?”
“마셔 보아라.”
“네, 라누아.”
코나의 얼굴에선 불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미처 세리아나의 불안을 챙기지 못한 것을 죄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코나는 세리아나가 자신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천히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이는 소리와 함께 잔을 채운 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코나는 컵을 두 손으로 든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세리아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고 있었다.
다행히 코나가 준비한 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했다.
코나의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그녀의 신체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세리아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코나가 다시 잔에 물을 채우고 고개를 조아렸다.
“우루의 족장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거지?”
“…….”
“대체 우리의 움직임은 어떻게 파악한 거고?”
“…….”
“그것도 말할 수 없다면 이것에는 확실하게 답하거라. 우루의 족장은 날 언제까지 이곳에 묶어둘 생각인 거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있느냐?”
“라누아께서 라누아의 종을 보내셨으니까요.”
코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다.
줄곧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리던 가라사의 눈동자와는 다른 온도를 띠고 있는 눈동자였다.
“네가 짐작하고 있다면 우루의 족장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
“네.”
“그럼 우루 족장의 다음 계획은 무엇이지? 나를 인질로 삼아 쿠드라께 거래라도 청할 건가?”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라누아.”
코나는 답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답을 재촉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답을 알든 모르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물을 더 가져오너라.”
“네?”
“음식은 필요 없다. 깨끗한 물을 가져오거라.”
“명을 받습니다.”
코나가 순순히 고개를 조아리며 방을 나선 후 세리아나는 아주 잠시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코나의 것이라 짐작되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재빠르게 일어나 물병을 들고 방에 들어온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항아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단순한 장식품인지 아니면 우루 부족의 필수품인지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항아리였지만 지금 세리아나에겐 무척이나 필요한 물건이었다.
세리아나는 항아리에 가까이 다가가 가장 적당해 보이는 크기의 항아리 뚜껑을 열고 그 안이 빈 것을 확인한 후 물병의 물을 그 안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항아리 안 물의 높이를 대강 눈으로 확인한 세리아나는 코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의 양이 충분하기를 기도했다.
항아리의 뚜껑을 닫고 제자리로 돌아온 세리아나는 물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컵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 서 있을 코나를 향해 들어오라 명한 세리아나는 급히 물을 들이켜는 척 컵을 입에 대었다 떼며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닦았다.
“물을 가져왔습니다.”
“마셔 보아라.”
“네.”
이후로도 세리아나는 계속해서 코나에게 깨끗한 물을 요구했고 그녀에게 그것이 깨끗한 물임을 증명하게 했다.
그것을 멈춘 것은 항아리의 절반을 물로 채웠을 때쯤이었다.
아직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했지만 더는 요구할 수가 없었다.
예고 없이 나타난 우루의 족장, 가라사 덕분이었다.
“라누아께서 물을 이리 좋아하실 줄 몰랐군.”
“내게는 물을 대접하기 아까운가?”
“그럴 리가.”
코나 대신 물병을 들고 들어온 가라사는 세리아나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세리아나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거칠 것이 없는 행동이었다.
“왜 더 드시지 않고?”
“이번엔 그대가 그 물이 깨끗한 것임을 증명할 건가?”
“코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나?”
“문제가 있나?”
“아니 없지. 코나는 내가 준비한 라누아의 종이니까.”
그가 말한 치아린보다 순하고 얌전한 종이 코나였던 모양이었다.
세리아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평온하게 유지하며 가라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우루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들이 아직 바이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이 거친 방법으로 약탈을 일삼는 부족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세리아나가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정보로는 가라사가 무엇을 원해 자신을 납치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사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라젠에도 눈앞의 사내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은 늘 과하게 욕심냈고 과하게 과시하려 들었다.
그녀가 바로 본 것이라면 가라사는 분명 세리아나가 묻기도 전에 입을 열 것이다.
그런 세리아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고요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극받은 듯 가라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음을 터트린 후 누가 묻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라젠의 왕녀라더니 그 비루먹은 것들 사이에서도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오긴 하는군.”
“…….”
“왜? 물건이라 칭해 기분이 나쁘신가?”
“…….”
“얌전하게 굴기로 했나? 아주 현명한 생각이야.”
이죽거리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세리아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일 순 없었다.
“궁금할 거야. 그렇지? 아아,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젠 것들의 머릿속은 빤하니까.”
문밖에서 보여주었던 태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론 그마저도 세리아나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지만 다른 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가라사는 세리아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라젠의 왕녀에게 길게 설명하기는 귀찮으니 짧게 말하지. 나는 쿠드라가 될 것이다.”
“……뭐?”
예상치 못한 말에 세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저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막 최강의 전사라는 칭호를 받다니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아니 라젠의 것들은 그런 당연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천치들이니 불합리하다는 뜻조차 모르고 있겠지.”
“쿠드라가 되겠다니 무슨 뜻이지?”
“멍청한 년. 말 그대로다. 난 쿠드라가 될 거다. 바로 널 이용해서.”
“무슨, 무슨 헛소리를……!”
“라누아의 손을 잡고 붉은 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멍청한 소리다.
그는 절대로 붉은 길 위를 걸을 수 없다.
가라사 역시 사막의 전사다.
붉은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저 당당한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는 붉은 길 위를 걸을 수 없다.”
“그래, 당장은 그럴 수 없지. 하지만 헬라임께 인사 올린 후 그대의 손을 잡는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세리아나는 가마를 타고 붉은 길 위를 통과했다.
하얀 돌을 밟고 제단을 올랐고 바이샤와 부부가 되었음을 헬라임에게 고한 후 세리아나 쿤 라누아가 되어 붉은 길 위를 걸어 내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가라사의 저 말은 세리아나와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라누아다.”
“알지.”
“이 차이툰의 여왕이고 바이샤 쿤 쿠드라의 아내다. 그런 내가 그대와 왜 붉은 길 위를 걸어야 하지?”
“죽을 테니까.”
“뭐?”
“정확히는 내가 그 운만 더럽게 좋은 쭉정이 새끼의 목을 잘라버릴 거니까.”
세리아나는 드디어 가라사가 자신을 납치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치아린을 순순히 보내준 이유 또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미끼였다.
바이샤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미끼.
그리고 동시에 바이샤의 목을 죌 인질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세리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사막의 전사가 어떻게 쿠드라께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품을 수 있어!”
“네가 쿠드라라고 부르고 있는 그놈은 내게 증명한 적 없어.”
“신에게 증명은 필요 없어.”
“라젠의 왕녀가 오아시스에서 멍청한 물이 들었군. 아니 태어나기를 그리 태어났나?”
“이 이상의 무례는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으면? 여기서 내게 신벌이라도 내릴 건가? 할 수 있으면 해보지그래?”
가라사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온몸을 떨고 있는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로 흔들리는 가녀린 몸뚱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절로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하지? 그래 못할 거야. 넌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그 쭉정이 놈도 마찬가지야!”
“그만!”
“심장을 찌르고 목을 비틀면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인간이다!”
“그만해!”
세리아나가 두 주먹에 힘을 주며 외쳤다.
바이샤를 죽이겠다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가라사의 헛되고 과한 꿈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놈을 죽이고 차이툰의 쿠드라가 될 거다. 그리고 넌 내 곁에서 나의 위대함을 장식할 라누아가 되는 거야.”
세리아나의 분노로 이글거리는 연둣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라사는 아까와는 다르게 담담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넌 라누아로 나의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러니 얌전히 이 안에서 기다려. 결혼 선물로 바이샤 쿤 쿠드라의 목을 가져다줄 테니.”
가라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그의 목소리가 벽을 넘어 세리아나의 귓가에 닿았다.
그녀는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가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누굴…… 죽인다고?”
분노에 가득 차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는 대신 바닥에 가라앉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어둡고 어두운 감각이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이샤를? 나의 바이샤를 죽이겠다고?”
누가 그것을 허락한단 말인가?
“라, 라누아…….”
“나가!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 코나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세리아나의 외침에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문이 닫힌 후 세리아나는 벽에 나란히 서 있는 빈 항아리들을 들어 바닥에 내던지기 시작했다.
항아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바닥에 그 조각들이 흩어졌다.
그 파열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방을 채운 항아리의 수가 제법 되기도 했고 그것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던지는 세리아나의 행동이 느려지기도 한 탓이었다.
마침내 가진 모든 힘을 짜내 마지막 빈 항아리를 바닥에 내던진 세리아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요란을 떨었으니 한동안은 그 누구도 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피오르 백작가에서 이렇게 난동을 부릴 때도 그랬다.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도 감히 문을 두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리곤 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라왔던 세리아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벌었어.’
세리아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애써 추슬러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항아리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라사가 오기 전까지 물을 몰래 옮겨두었던 항아리였다.
‘물에 뭉치는 흙을 이용해 만든 벽이라고 했어. 분명 될 거야.’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 방을 엉망으로 만든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여기에 남은 것은 탈출을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한 사람뿐이었다.
세리아나는 겉옷을 벗어 항아리에 담근 후 그것을 물에 흠뻑 적시곤 곧장 벽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톱이 박혔던 자리가 쓰라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돌처럼 단단한 벽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나가 계속해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자 벽이 아주 조금씩 뭉개지기 시작했다.
‘듐이 길을 찾는 동안 난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해.’
화가 난 것은 사실이다.
반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지금도 가사라의 말만 떠올리면 화가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이샤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자신이 바이샤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바이샤, 오지 말아요. 제가 갈게요. 그러니 여기엔 오지 말아요.’
누더기로 변한 겉옷을 벽에 문지르며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걸음이 빠르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