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60화 (60/110)

#60. 모래 늪 (7)

치아린은 라누아의 종이다.

그녀의 삶 전부는 라누아의 것이고 죽음 이후의 시간까지도 모든 것은 라누아의 것이었다.

그런 치아린은 절대로 세리아나의 명에 항명할 수 없었다.

세리아나의 명령에 마차에 메인 말 한 필을 끌고 온 치아린은 잔뜩 주저하는 모습으로 말의 등허리에 올랐다.

안장은 없었지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한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는 다신 한번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은 안장이 없는 말 위에 오르지도 못했을 테니까.

“출발해.”

“라누아…… 제발 지금이라도 명을 거두어 주시면…….”

“안 돼.”

단호한 세리아나의 목소리에 치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에 슬쩍 제 그림자를 눈짓한 세리아나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눈짓을 따라 그림자를 곁눈질한 치아린은 세리아나의 그림자가 제 것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을 띠는 것을 확인하고 아주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빠르게 표정을 정리했다.

다행히 가라사와 우루의 전사들은 두 사람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나를 걱정한다면 바람보다도 빠르게 달려줘. 그리고 쿠드라를 모셔 와.”

“……명을 받습니다.”

고삐 대신 말의 갈기를 단단히 붙잡은 치아린이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찼다.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가며 달리기 시작한 말은 순식간에 세리아나와 치아린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을 쫓기 위해 우루의 전사 몇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순순히 치아린을 내어줄 생각 따위는 없는 세리아나는 빠르게 우루의 전사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외쳤다.

“누구든! 치아린을 쫓아 움직인다면 이 자리에 나 세리아나 쿤 라누아의 피가 뿌려질 것이다!”

외치는 사이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인지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자신들의 상처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들이 놀라 몸을 굳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가라사는 짧게 혀를 찼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라누아의 권위는 지켜져야 한다.’

그가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선 우루의 전사들이 믿고 있는 전설을 훼손할 수 없었다.

가라사는 치아린의 모습이 저 멀리 까만 점으로 변할 때까지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치아린의 흔적을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순간이 오자 세리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속 그러고 계실 겁니까?”

“아까는 말이 짧더니 다시 내게 존대를 할 생각인가?”

“조금 전엔 라누아의 결단에 제법 놀랐던지라. 용서해 주시지요.”

“입으로만 반성하며 계속 무례를 저지르는 자를 내가 왜 계속 용서해야 하지?”

“자비로운 라누아시니까요.”

“그대에게 나의 자비가 필요하긴 한가?”

세리아나는 무심한 얼굴로 목에 겨누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던졌다.

목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 옷깃을 적셨지만 세리아나의 얼굴엔 그 어떤 고통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라누아야.’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리아나 쿤 라누아였다.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이자 이 사막의 여왕. 쿠드라의 단 하나뿐인 아내. 얕보일 생각은 없다.

그 어떤 틈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세리아나가 해야 할 일이었다.

“코나! 라누아를 모셔라!”

“네.”

가라사의 외침에 코나라고 불린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세리아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정중한 모습에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치켜든 세리아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단순해서 어떤 것의 본질을 알기 전에 그 겉모습에 현혹되어 오판을 하곤 한다.

그것이 야안의 가르침이었다.

세리아나는 우루의 전사들과 가라사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래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못하도록 최대한 당당한 모습으로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누추하지만 당분간 이곳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흙으로 담을 쌓아 만든 작은 집이었다.

아니 집이라고 하기엔 문을 여닫으면 그저 공간이 분리될 뿐인 작은 방에 불과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세리아나는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급하게 꾸민 것이 분명한 공간이었다.

“임시로 마련한 거처로구나.”

“네, 저희 부족은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고 이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막의 흙으로 벽을 쌓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물에 뭉쳐지는 단단한 흙보다는 그 물을 구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이 근처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소리구나.”

“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피부색과 양갈래로 느슨하게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지나치게 순종적인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나라 했니?”

“네, 라누아.”

“여긴 나를 가둬둘 생각으로 만든 곳이겠구나. 맞니?”

“……죄송합니다.”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깊이 숙이는 코나를 보며 세리아나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벽의 가장 높은 곳, 손이 닿지 않을 만한 위치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이 바로 그 증거였다.

저 창에 세리아나의 손이 닿는다 하더라도 어린아이 하나가 간신이 몸을 뺄 만한 크기의 창문으론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루의 족장은 정확히 뭘 원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내 명령이라 해도?”

“용서하세요, 라누아.”

“그럼 내가 너와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구나. 가보거라.”

“……물러갑니다…….”

코나가 문을 닫고 물러간 후 세리아나는 자신을 위해 마련해놓은 것이 분명한 키가 작은 소파로 다가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이었지만 편히 쉴 수는 없었다.

푹신한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세리아나는 그제야 느껴지는 통증에 손끝으로 목덜미를 훑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끈적한 피가 묻어났다.

“아…….”

자신이 낸 상처였다.

쓰라린 통증에 살짝 얼굴이 구겨졌지만 그 작은 상처 하나로 치아린을 구해냈다고 생각하니 마냥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치아린에게 그리고 바이샤에게 혼이 날 것은 분명했지만 뿌듯했다.

처음으로 제 할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치아린이 화를 내면 무서운데…….”

무사히 돌아간다면 치아린의 끝없는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바이샤의 잔소리도…….

“바이샤는 괜찮을까? 어딜 다치기라도 했으면…….”

요란한 쇳소리를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이곳에 끌려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바이샤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렇지, 듐?”

세리아나의 작은 중얼거림에 그림자가 흔들렸다.

작은 창 너머 새어 들어온 옅은 빛에 흐릿하기만 했던 그림자였다.

그러나 점차 그 색이 짙어지며 흔들림 역시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쿠드라께선 무사하십니다.”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싸고 단 한 부분 얼굴을 가린 베일 하나만이 붉은 이였다.

세리아나는 치아린이 외친 그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쿠드라께서 내 곁에 머물라 하셨니?”

“라누아의 곁에 그림자가 하나도 남지 않은 걸 걱정하셨습니다.”

작지만 선명한 그의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샤만큼이나 세리아나의 안전을 생각하는 치아린이 순순히 그녀의 명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듐의 존재 때문이었다.

만약 그림자 속에 숨어든 듐이 없었다면 치아린은 세리아나의 명령이 있었더라도 절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듐, 미안하지만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이 주변을 파악해줘.”

“길을 찾으라는 말씀이시군요.”

“이 방을 나서는 방법은 내가 찾겠다. 그러니 넌 저들의 눈을 피해 달아날 길을 찾아.”

치아린이 무사히 도망쳤으니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치아린을 먼저 보내기는 했지만 얌전히 붙들려 있을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지금 세리아나 곁에는 듐이 있었다.

자신의 호위전사가 아닌 듐을 부리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우선 생각해야 했다.

“목적지는 어디로…….”

“쿠드라가 있으신 곳.”

“명을 받습니다.”

고개를 숙인 듐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호위전사들만이 익히고 있는 특별한 기술이었다.

쥬드 덕분에 그 특별한 힘에 익숙해져 이제 더는 놀라지 않는 세리아나가 크게 심호흡하며 눈을 살짝 감았다.

세리아나는 듐이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길이 엇나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이샤가 있는 곳이라 했으니 듐은 분명 세리아나를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생각하자. 여기서 달아날 방법.”

듐에겐 길을 찾으라 했으니 세리아나는 이 공간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녀에겐 호위전사들의 특별한 힘이 없었으니까. 세리아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떠올렸다.

라젠에서 읽었던 수많은 책과 야안의 가르침. 그중 분명 하나는 이곳을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두 눈을 감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세리아나가 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 * *

적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불태운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습격과 계획된 것으로 보이는 탈취. 그래 거기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탈취한 마차 안에 세리아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카얀! 흔적은!”

“죄송합니다, 쿠드라.”

고개를 조아린 카얀의 모습에 바이샤가 이를 악물었다.

모래바람에 마차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는 것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뿐, 추적할 방법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치아린과 듐이 라누아 곁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라누아를 지킬 것입니다.”

“안다.”

“분명 연락이 올 겁니다.”

그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쉽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제 손이 닿는 위치에 세리아나가 있었다.

그런데 빼앗겼다.

미처 손을 쓰지도 못한 채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만 봐야 했다.

바이샤는 자신의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우루의 전사들이 어떻게 이 길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파악 중입니다.”

카얀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말을 하는 그도, 듣는 바이샤도 답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정보를 흘린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짐작 가는 이가 없었다.

아주 잠깐 아눌라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적으로 나타난 이가 우루 부족이라는 것이 의심을 옅게 만들었다.

우루와 시카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냥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몹시 나쁘다.

옛 차이툰이 분열되기 이전부터 만들어진 감정의 골이 지난 백여 년의 시간 동안 도저히 메꿀 수 없을 만치 벌어져 버렸다.

그러니 아눌라가 암만 세리아나를 싫어하고 그 자리를 노린다고 한들 절대 우루와 손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찾아내. 찾아내서 내 앞에 데려와.”

“네.”

바이샤는 마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리아나가 저 사막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의 눈에는 여리기만 한 여인이다.

제 품에 보듬고 지켜주고만 싶은 사람이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릎 꿇리는 게 아니라 진작 이 사막에서 지워버렸어야 했다.”

“우루의 가라사는 절대로 라누아께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쿠드라…….”

“자신이 이 쿠드라의 자리에 더 어울린다 오만하게 외치는 자다. 내 자리를 빼앗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내지.”

“…….”

“가라사가 내 라누아께 무슨 짓을 할 수 있을지는 그자 본인이 아닌 이상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세리아나를 인질로 삼아 쿠드라의 자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세리아나를 협박해 붉은 길을 탐할지도……. 그 협박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향일 수도 있지만 매우 거친 방향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카얀.”

“네.”

“가라사가 내 라누아를 인질로 삼고 결투를 청해온다면 내가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나?”

“…….”

카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주인이 그의 아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바이샤는 순서가 다를 뿐 분명 그의 아내를, 세리아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카얀은 당장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바이샤의 마음에 세리아나가 들어와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찾아낸 후 라누아를 안전히 모셔오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다.”

“그렇게 될 겁니다.”

그는 제 주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카얀은 주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내였고 무엇이든 해내야 하는 쿠드라의 종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언제나 그러했든 해낼 것이다.

카얀이 물러간 후 바이샤는 홀로 남았다.

포로로 잡아 들인 우루 부족 전사들을 고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지만 조만간이다.

그들은 결국 입을 열 것이고 바이샤를 세리아나가 붙잡혀 있는 장소로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가라사, 이번에야말로 네 목을 잘라주마.”

사막의 모든 바람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다소 거칠게 반항하는 이들까지 모두 품으려 했던 바이샤였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이유를 마지막까지 반항하던 바람이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우루 부족을 이 사막에서 지울 것이다.

위아래를 구분하지 못하고 연약한 것을 보듬지 못하는 비겁한 바람은 이 사막에 필요 없다.

바이샤는 자신의 분노를 알아차린 듯 거칠게 불어오기 시작한 모래바람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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