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59화 (59/110)

#59. 모래 늪 (6)

치아린의 보호받고 있는 세리아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듐이라고 불린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지금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과 외침이 들려오고 피 냄새가 짙어져 모를 수가 없었다.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파악하는 건 나중의 일이야.’

세리아나는 고개를 저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털어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때였다.

지금 세리아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싸우는 전사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 다소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결론이었지만 최선의 결론이기도 했다.

‘할 수 없는 걸 해내겠다 만용을 부리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야.’

그녀가 가진 무력이란 고작 활을 쏘는 것뿐이다.

지금은 그마저도 손에 쥐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 두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얌전히 숨어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도록, 하다못해 짐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해.’

무사히 오아시스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세리아나는 주먹을 쥐고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등을 동그랗게 말아 몸을 작게 만들었다.

마치 이렇게 하면 자신의 존재가 잊힐 것이라 믿는 것처럼.

“안 돼! 막아!”

그때였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땅이 울렸다.

먼 곳에서 시작된 울림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듐!”

치아린의 비명과 함께 듐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난 여러 마리의 말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 모습에 당황해 잠깐 멈칫한 사이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세리아나와 치아린의 몸이 엉켜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몸을 치아린이 감싸 안지 않았더라면 마차의 뒤쪽 벽면에 부딪혔으리라.

치아린은 제 품 안에 안긴 세리아나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라면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쯤은 손쉽게 해낼 수 있었지만 세리아나는 달랐다.

‘왜 이자들이 여기에 있는 거지?’

조금 늦게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치아린의 눈빛이 매서웠다.

일행이 라젠에서 오아시스로 돌아가기 위해 선택한 루트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선 후엔 본래 계획했던 길이 아닌 지름길을 선택했다.

이는 오아시스에서 그들의 왕과 여왕을 기다리고 있는 차이툰의 귀족들과 백성 중 아는 이가 전무하다는 소리였다.

‘또 다른 쥐새끼가 숨어 있었어!’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몰랐다면 다시 아눌라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차를 갈취해 달아나고 있는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상 아눌라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치아린은 이런 상황에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는 세리아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이를 갈았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피 냄새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 * *

마차의 움직임이 멈췄다.

치아린은 허리에 찼던 검을 한쪽 손으로 뽑아 들며 세리아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내려라.”

치아린은 검 끝으로 자신과 세리아나를 위협하는 거친 인상의 사내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왔다.

짧은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마차를 가운데 두고 자신들을 에워싼 이들은 치아린의 짐작처럼 우루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라옴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사막에서의 생존의 수단으로 삼은 우루는 바이샤에 굴복하지 않은 마지막 부족이었다.

단순한 저항이라면 이리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루 부족의 젊은 족장 가라사는 ‘쿠드라’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단순히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이샤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마차를 등지고 선 치아린과 세리아나는 곧 가라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짙은 피부색과 밀색 머리카락, 그리고 하늘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세리아나는 그의 머리카락이 어린 시절 읽었던 이야기책에 나왔던 사자의 갈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라누아와 라누아의 종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군.”

“그럼 당장이라도 내 주인과 나를 돌려보내지 그래?”

“그럴 수야 있나? 나를 붉은 길로 인도할 분을 이렇게 모셨는데.”

“헛소리!”

“그건 두고 보면 알 테고.”

능글맞은 웃음으로 치아린의 날 선 말을 받아낸 가라사의 시선이 세리아나에게 닿았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처음 보는 ‘라누아’의 모습에 그가 감탄했다.

“그 옛날 이 메마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라누아의 현신이라 하더니 정말로 똑같군.”

바이샤와 대적하고는 있지만 가라사와 그가 이끄는 우루 부족 역시 헬라임을 섬기는 사막의 전사들이었다.

자신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에게서 이어져 온 사막의 전설 속 라누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세리아나의 모습은 그들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루의 가라사,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부족의 전사들을 대신해 고개를 조아리는 가라사의 말투는 경박하기 그지없었다.

세리아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전설’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바이샤를 떠올리게 만들어 세리아나는 두 손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우루의 가라사. 고개를 들어도 좋다.”

다행스럽게도 가라사의 인사를 받은 세리아나의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나지 않았다.

자신을 보호하듯 서 있는 치아린이 있었고 아주 잠깐, 그녀만 확인할 수 있도록 일렁였던 그림자가 세리아나에게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대의 인사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유감이로군.”

“다소 거친 방법이었지만 어쩌겠습니까? 만나 뵈려면 이 방법뿐인 것을.”

“쿠드라께 고개만 조아리면 될 일.”

“하하하,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라.”

고개를 조아리라는 세리아나의 말에 우루의 전사들이 움찔거렸고 바이샤를 자신보다 약하다 칭하는 가라사의 말에 치아린이 이를 악물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한 번씩 주고받은 상황에 주변의 공기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다.”

“라누아의 종께선 제법 뾰족한 목소리를 내시는군. 라누아 어떠십니까? 제가 저보다 순하고 얌전한 종 하나를 새로 바치지요.”

“거절하마. 나는 나의 치아린에게 만족하고 있으니.”

가라사가 검을 빼 들며 이죽거렸고 이번엔 세리아나도 울컥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치아린은 세리아나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친구였다.

그리고 가족이었다.

그런 소중한 존재를 물건처럼 입에 올리는 가라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빈자리가 생기면 다른 생각을 하시겠지요.”

그의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던 우루의 전사들이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치아린이 검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일대다의 싸움은 제법 여러 번 치러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었다.

‘버틸 수 있을까?’

혼자였다면 상대하지 않고 바로 달아났을 것이다.

불리한 위치에 선 싸움은 피하는 것 역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녀의 뒤엔 세리아나가 있었다.

‘무조건 길을 만든다.’

우루의 전사들 몇을 베어 수를 줄이고 틈을 만들어 달아날 것이다.

치아린은 세리아나를 제 뒤로 바짝 숨기며 호흡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시작은 우루의 전사 하나가 치아린을 향해 덤벼들며 시작됐다.

다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피 냄새가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공기는 날카롭게 변했고 세리아나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세리아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다못해 활이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치아린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지금 자신은 치아린의 짐이다.

세리아나는 사냥대회 이후부터 외출을 할 때면 습관처럼 허리춤에 꽂아 챙기곤 했던 단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치아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치아린의 피와 우루 전사의 피가 모래 위에 뿌려졌다.

지금 당장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아주 빠르게 치아린은 한계를 맞이할 것이다.

지키기 위한 싸움은 그렇지 않은 싸움보다 힘든 법이라는 것을 이젠 세리아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도움이 될 방법, 그걸 찾아야…… 아!’

세리아나는 제 손에 쥐어진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우루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알아차린 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히 이 방법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물론 치아린은 반대하겠지만…….

‘지금은 내가 치아린을 지켜야 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치아린이다.

그러니 세리아나는 제 인생을 바친 치아린의 삶이 허무하게 지지 않도록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자.’

치아린에게 혼나는 건…… 일이 모두 해결된 다음의 일이다.

그리고 치아린이라면 분명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금방 용서해줄 것이 분명했다.

세리아나는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그 검집을 벗겨 바닥에 던졌다.

“모두 멈춰!”

세리아나의 외침에 마법처럼 싸우고 있던 이들의 움직임이 바로 멈췄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확신을 얻은 세리아나가 단검을 들어 올려 가라사를 향해 겨눴다.

“그 검으로 저를 찌르기라도 하시려고 그러시나?”

“그럴 수도 있지.”

“하하, 라누아께선 무모한 도전을 즐기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

가라사의 비아냥에 세리아나가 싱긋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가라사가 다시 입을 열려 한 순간 그를 향해 겨누었던 단검을 세리아나가 거둬들였다.

“지금 무슨……!”

“라누아!”

그리고 치아린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가라사를 향해 겨누었던 단검의 날카로운 칼날을 제 목에 겨눈 세리아나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치아린은 물론이고 우루의 전사들 역시 경악했다.

세리아나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위에 위협스럽게 빛나고 있는 단검의 날이 마치 그들의 심장 위에 놓인 듯 섬찟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라누아! 위험합니다!”

가라사가 으르렁거렸고 치아린이 애원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단검을 치우기는커녕 더욱더 제 목덜미에 가져다 붙이며 입을 열었다.

“검을 거두어라.”

“라누아!”

“여기서 죽기라도 할 작정인가?”

“우루의 가라사, 그대는 날 죽게 할 생각인가?”

세리아나의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 가라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세리아나의 생각대로였다.

그는 전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전사들은 다르다.

세리아나는 가라사가 전사들의 두려움을 무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말하라 우루의 가라사. 그대는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인 나 세리아나 쿤 라누아의 피를 이 사막에 뿌릴 작정인가?”

“큭!”

“우루의 전사들은 모두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은 첫 번째 자식의 피를 본 헬라임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루의 전사들이 세리아나의 외침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가라사의 말은 무시할 수 없는 족장의 명령이었지만 세리아나의 외침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경고였기 때문이었다.

“모두 검을 버려라.”

툭, 툭. 모래 바닥 위로 쇠붙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나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우루의 전사들을 눈으로 훑은 후 가라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리아나를 노려보던 가라사도 결국 검을 던졌다.

“라누아!”

“치아린 괜찮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온 치아린의 얼굴 곳곳엔 피가 묻어 있었다.

검을 쥔 손엔 팔뚝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고여 있었다.

상처 입은 와중에도 오로지 자신만을 걱정하고 있는 치아린을 보며 세리아나는 애써 미소지었다.

“치아린.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줄 거지?”

“라누아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그러니 제발 칼을 내려놓으세요!”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미소 지은 세리아나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가라사를 한 번 더 노려봐준 후 치아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단검 외에도 치아린에게 혼날 일을 하나 더 벌일 생각이었다.

“마차에 메인 말 한 필을 가져와.”

“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사이 라누아께선 말을 타고…….”

“아니, 말을 타는 건 치아린이야.”

“……라누아?”

예상치 못한 세리아나의 말에 치아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라누아 무슨……!”

“우리 둘 다 여기서 몸을 뺄 수는 없어.”

“그러니 제가!”

“아니, 치아린. 나는 안 돼.”

세리아나가 사막에서 말을 모는 일에 조금은 익숙해졌다곤 해도 이 모래땅에서 태어난 우루의 전사들보다 빠르게 말을 몰 수는 없었다.

치아린이 아닌 세리아나가 달아난다면 분명 얼마 안 가 붙잡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도주 시간을 벌기 위해 몸을 던진 치아린은 어떻게 될까? 세리아나는 그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타, 치아린. 그리고 빠르게 달려서 쿠드라께 내가 여기에 있다고 전해.”

“라누아!”

“치아린도 확인했지? 저들은 절대로 날 해치지 못해.”

“하지만!”

“치아린.”

“…….”

“가, 명령이야.”

단호하게 말을 뱉은 세리아나는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치아린을 향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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