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58화 (58/110)

#58. 모래 늪 (5)

라젠의 궁전을 떠난 후 며칠 뒤 바이샤와 세리아나는 빠르게 국경에 닿을 수 있었다.

뒤에서 붙잡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일행들을 재촉한 것이 이동 시간을 단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래 냄새가 나.”

“라누아께서도 느끼시는군요.”

“응. 빨리 돌아가고 싶어.”

“저도 그렇답니다.”

국경 밖으로 나가기 위한 절차를 밟는 동안 잠시 이동을 멈춘 참이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인 탓에 가벼운 멀미를 겪은 세리아나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치아린이 작은 물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고마워.”

“사방이 꽉 막힌 마차라 답답해서 더 멀미가 나는 거예요.”

“정말 그런 거 같아.”

물주머니에서 입을 뗀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화한 느낌이 입 안에 퍼지며 멀미와 가벼운 두통이 가라앉았다.

치아린이 세리아나를 위해 준비한 약초를 우린 물이었다.

그 물주머니를 다시 치아린에게 넘기며 세리아나는 마차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절차치고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아눌라는 어때?”

“불안할 만큼 조용해요.”

“……아눌라가 아닌 걸까?”

“지금 우리의 일행 중 라젠의 왕실과 접촉할 가장 큰 동기와 목적을 가진 이는 아눌라가 맞아요.”

“하지만 증거는 없지.”

“그래서 지켜보고만 있는 거죠.”

멀리서 카얀이 보낸 수신호를 확인한 치아린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었더니 단순히 국경을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경 밖에서 마차 한 대를 들여오기 위한 절차까지 함께 진행한 것이었다.

이제는 세리아나에게 더 익숙한 사방이 뚫린 차이툰의 마차였다.

치아린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른 세리아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치아린은 그런 그녀의 옷자락을 정리해주며 시선을 돌려 아눌라가 서 있는 위치를 눈으로 가늠했다.

“라누아의 말씀대로 쥬드를 보내기는 했지만 저는 불안해요.”

“쥬드라면 잘할 거야.”

“아뇨, 쥬드는 당연히 잘하겠죠. 제가 걱정하는 건 라누아의 안전인걸요.”

세리아나의 호위전사들과 바이샤의 호위전사들은 여전히 일행들의 그림자에 숨어 그들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눌라에 대한 심증이 가장 깊었기에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의 호위전사 중 가장 뛰어난 쥬드를 아눌라의 그림자에 숨긴 것이다.

“쥬드 말고도 감시하는 눈이 있다고 들었어.”

“네, 쿠드라의 호위전사 하나도 붙어 있다 들었어요.”

“정말 그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자가 아눌라라고 한다면 굉장하네. 모두의 눈을 속이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무서운 거랍니다.”

“치아린도 무서운 게 있어?”

“어머, 라누아. 당연히 제게도 무서운 게 있답니다. 전 라누아께 해가 되는 모든 것이 무섭고 치가 떨리게 미워요.”

상큼하게 웃으며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웃고 있는 이가 치아린이어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세리아나의 옷자락을 정리한 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치아린이 마차에서 내려와 냉큼 카얀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뒷모습에 애정이 뚝뚝 흘러넘쳐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마음의 짐을 전부 내려놓아서일까?’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리아나는 헛기침으로 웃음을 지우며 다시 생각에 빠졌다.

아눌라가 라젠의 왕과 거래를 청했다면 분명 그 거래는 세리아나에게 좋지 못한 일일 것이라 바이샤는 말했다.

세리아나도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눌라는 세리아나를 미워했고 그녀가 라누아의 자리를 제게서 빼앗았다 주장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사라지면 라누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거겠지.’

대체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카가 큰 부족이기는 했지만 그만한 규모를 자랑하는 부족은 시카 외에도 바라와 라옴, 두 곳이 더 있었다.

거기다 차이툰의 다른 귀족들도 그 부족들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 말은 세리아나가 사라지더라도 아눌라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는 뜻이었다.

영리한 아눌라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아눌라의 그런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럼 바이샤의 마음? 하지만 바이샤는 아눌라에게 마음이 없는걸.’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눌라에게 닿아 있지 않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바이샤가 진심으로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다는 치아린의 증언도 세리아나의 그런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모르겠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끔은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알 수 없는데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리아나는 멀리서 자라하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아눌라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고개를 돌렸다.

가운데 낀 두르히가 힘들어 보여 그를 구해줘야 하는 건가?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그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보다도 아눌라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라누아, 움직입니다.”

“응.”

멀리서 커다란 문이 무겁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그토록 그리웠던 모래사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불어와 세리아나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고작 며칠이었지만 이 모래 냄새가 무척이나 그리웠었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움직이는 마차 위에 앉은 세리아나는 라젠의 궁에서부터 국경까지 끈질기게 따라왔던 멀미와 두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본격적인 모래땅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황량한 대지가 그녀가 다시 차이툰으로 돌아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모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일행은 마치 평지를 달리는 사람들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 덕분에 국경을 벗어나 며칠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꽤 많은 거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라젠으로 향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렇다고 세리아나가 처음 차이툰으로 와 오아시스의 궁으로 가기 위해 올랐던 길도 아니었다.

변수를 안고 오랜 시간을 이동하기엔 위험부담이 컸기에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움직이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지만 궁으로 이어진 최단거리의 길 위에서 사람과 짐을 나르는 짐승 모두가 쉬지 않고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곧 암석지대에 이릅니다. 마차가 조금 흔들릴 수도 있어요.”

“많이 험한 곳이야?”

“보통은 둘러서 피해 가는 곳이에요.”

“하지만 지름길인 거지?”

“네.”

“나는 걱정하지 말고 쿠드라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시라 전해줄래?”

“네, 라누아.”

마차의 난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치아린이 움직이는 마차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일행의 선두에 있는 바이샤에게 세리아나의 말을 전하기 위해선 빠른 뜀박질이 필요했지만 치아린에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아시스가 보고 싶어.”

빠르게 멀어지는 치아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마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위치에 그들을 숨기고 이동하는 라젠과는 다르게 일행의 선두엔 늘 바이샤가 서 있었다.

차이툰에선 가장 강한 이가 가장 앞에 서서 뒤의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것은 전투를 벌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헬라임의 마지막 자식이자 사막의 왕, 그 사막에서 가장 강한 전사인 쿠드라는 가장 선두에서 전사들을 이끄는 자였다.

그래서 모래사막의 전사들은 쿠드라의 곁에서 싸우는 것을 가장 영광으로 여겼고 그와 함께 싸우는 것을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 여겼다.

“바이샤에 비하면 난…….”

쿠드라에게 보호받는 라누아. 세리아나는 자신이 바이샤의 짐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이제 제법 능숙하게 활을 쏘기는 했지만 바이샤의 곁에 서기엔 한참은 모자란 실력이었다.

“돌아가면 야안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달라고 해야겠어. 미뤄뒀던 데옴의 일정도 빠르게 당겨야지.”

그렇게라도 바이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리아나는 오아시스의 궁으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바이샤에게 그녀의 말을 전하러 움직인 치아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삐익! 삐익!

그때였다.

호각 소리가 짧게 두 번 울리며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날카로워졌다.

세리아나는 빠르게 마차의 훤히 뚫린 세 면을 등지고 방어 자세를 잡은 전사들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짧은 호각 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습격이다! 마차를 지켜!”

“라누아를 보호해라!”

“방어태세!”

소란이 일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뒤엉켜 세리아나의 고막을 찢을 듯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꺼운 천이 내려와 환하게 열려 있던 마차의 네 면을 가렸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큰 소란이 일었다.

세리아나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딱딱하게 굳어 마차 가운데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무지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가시풀 하나 자라지 않는 암석지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차이툰의 전사들은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음에도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적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라누아!”

“치아린!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습격입니다!”

“바이샤, 아니 쿠드라께선?”

“가장 앞에서 적을 상대하고 계십니다.”

두꺼운 천을 걷고 빠르게 마차 안으로 들어온 치아린이 세리아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안전한 곳에서 보호 받고 있는 그녀였지만 혹시라도 상한 곳이 있을까 세리아나의 몸을 살피는 치아린의 눈동자가 제법 날카로웠다.

세리아나 곁으로 돌아오는 동안 적을 상대한 듯 평소엔 그녀의 허리춤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던 검이 치아린의 손에 들린 채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치아린의 얼굴에 그녀의 것이 아닌 피가 묻어 있었다.

“화살이 날아온다!”

“막아! 라누아께 닿아서는 안 된다!”

밖의 상황이 다시 변했다.

마차의 한쪽 면을 지키고 있던 전사 하나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곧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몇몇 화살이 두꺼운 천을 뚫고 마차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치아린이 재빠르게 검으로 막아내지 않았다면 세리아나에게 닿았을 것이다.

“저것들이! 감히 라누아께 화살을 날려?”

치아린의 분노한 목소리가 쇠와 쇠가 부딪히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세리아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넘쳤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전투 한가운데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누아! 정신 차리세요! 괜찮습니다. 이 치아린이 곁에 있어요.”

“나, 나는……!”

“괜찮아요. 쿠드라가 계십니다. 이 사막에서 그분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어요!”

전사 하나가 쓰러지며 붙든 것인지 마차의 한 면을 가리고 있던 두꺼운 천이 찢겨나갔다.

훤히 드러난 마차의 창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며 세리아나를 등 뒤에 숨긴 치아린이 외쳤다.

전투를 겪어본 적 없는 그녀의 주인을 상처 하나 없이 지켜내는 것이 치아린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한 명의 전사가 화살에 쓰러졌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화살비가 세리아나가 탄 마차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듐!”

“라누아를 지키십시오.”

날아오는 화살을 바라보며 손에 쥔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던 치아린은 쓰러진 전사를 대신해 화살비를 막아내기 시작한 남자의 등을 확인했다.

카얀을 제외하고 쿠드라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르며 그분의 명으로만 움직이는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다른 호위전사들은 이미 전투에 뛰어든 상태였다.

라누아의 호위전사들 또한 적이 마차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쿠드라의 호위전사인 듐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치아린은 잠시 치솟은 의문을 빠르게 한쪽으로 밀어버리며 듐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화살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은 이 전투가 끝난 후에 직접 물어 해결하면 되었다.

‘대체 누가?’

치아린의 등 뒤에 숨어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무력한 자신을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대체 누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일까? 이 사막에 바이샤를 향해 검을 뽑아 들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라젠? 아니면 카디마? 설마…… 아눌라가?’

라젠의 왕과 카디마의 여왕, 마지막으로 아눌라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아눌라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흔적을 남기며 움직이는 것은 아눌라답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녀를 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세리아나가 파악한 아눌라는 절대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누군가의 약점을 목줄 삼아 제 손에 쥐고 뜻대로 부리는 것이 아눌라의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이 방법은 바이샤를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거친 방법이었다.

‘암만 라누아의 자리가 욕심이 나더라도 바이샤의 명예에 흠집이 날 만한 일을 벌일 리 없어.’

라젠도 아니다.

그들은 차이툰에 패했다.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아직 복구도 하지 못한 상태다.

거기다 오랜 시간 안쪽에서부터 썩어온 고국이었다.

바이샤를 상대로 검을 뽑아 들 만한 용기를 가진 이가 라젠에 남아 있을 리 없다.

세리아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설마 카디마의 여왕이……?’

세리아나의 귓가에 미라스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키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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