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모래 늪 (4)
세리아나는 바닥이 없는 모래 늪에 가라앉고 있었다.
몸을 허우적거릴 때마다 더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몸을 삼키는 검은 모래 늪이었다.
탐욕스러운 모래 주둥이가 마침내 그녀를 삼키고 세리아나는 절망했다.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몸과 그녀를 감싸는 어둠,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빛.
희망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모래 늪이었다.
‘세리아나.’
그때 바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이제 티끌만 한 크기로밖엔 확인되지 않는 모래 늪의 입구에서 비치는 빛이 그의 목소리를 세리아나에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마치 헤엄을 치듯 손과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아시스의 물보다 무겁고 거친 모래가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이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세리아나.’
그의 목소리에 답하고 싶었지만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온 모래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세리아나는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팔과 다리에 실었다.
저 깊고 어두운 곳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바이샤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래 늪의 입구에 다다라 세리아나의 입이 열렸다.
“바이샤!”
“세리아나?”
세리아나는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헉헉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세리아나 곁에 바이샤가 있었다.
“악몽을 꿨나?”
“……네, 바닥이 없는 모래 늪 속에 가라앉는 꿈이었어요.”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는 세리아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바이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등을 쓸어주었다.
부드러운 잠옷 위로 닿아오는 따뜻한 손길에 세리아나의 떨림이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무서웠겠군.”
“조금이요. 그런데 바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내 목소리?”
“네, 바이샤의 목소리를 따라서 열심히 움직였어요. 그랬더니 입구가 보여서…… 그래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내 라누아께서 꿈에서도 내 목소리를 찾아주시니 감사하군.”
악몽의 여운을 완전히 털어낸 듯 더는 떨리지 않는 세리아나의 몸을 도닥이며 그녀의 입술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춘 바이샤가 미소 지었다.
그런 바이샤의 얼굴을 보며 그를 따라 미소 지은 세리아나가 몸을 움직여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바이샤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떠나네요.”
“아쉬운가?”
“아뇨, 빨리 오아시스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몸을 일으킨 세리아나는 가운도 입지 않은 채 얇은 잠옷 차림으로 발코니의 창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짐을 챙기고 있는 이들의 소란스러움이 바람을 통해 전해졌다.
“세리아나.”
“정말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거야.”
그녀를 따라 발코니로 나온 바이샤가 낮은 목소리로 답하며 세리아나를 등 뒤에서 가볍게 안아주었다.
이젠 정말로 떠나야 하는 시간이었다.
차이툰의 일행 앞으로 진귀한 물건들을 실은 수레와 마차가 도착한 것은 주인의 명을 받은 카얀과 치아린이 시종들을 재촉하며 빠르게 짐을 챙기던 때였다.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세리아나와 바이샤는 그것들을 늘어놓으며 콧대를 세우는 시종장을 살짝 찌푸린 얼굴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뭐지?”
“전하께서 왕녀께 내린 선물입니다. 시집보낼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하셨는데 이번에 이렇게 기회가 생겼다며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앓던 이를 뽑아버린 듯 기뻐하며 세리아나를 보냈던 라젠의 왕을 기억하는 바이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인 걸까? 지난밤 차이툰의 누구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은 참이었다.
쥐새끼의 꼬리도 찾아내지 못해 기분이 뒤틀린 때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 어서 감사히 받으라 종용하는 시종장의 태도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리고 왕녀의 얼굴을 봐야겠다 하시니 어서 움직이시죠.”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누가 들어도 세리아나를 아래로 내려 보는 말투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짐을 챙기던 시종들과 그 곁에서 그들을 살피던 차이툰 귀족들의 얼굴이 차갑게 변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장은 다시 한번 세리아나를 채근했다.
“뭐 하십니까?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슬리는군.”
“네?”
“잠시만요, 쿠드라. 제가…… 할게요.”
더는 참아주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가는 바이샤를 만류하며 세리아나가 한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따라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시종장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치 세리아나가 제 말을 따를 줄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어서 움직이세요. 더는 전하를 기다리게 만들어선…….”
“내가 왜 그대를 따라가야 하지?”
“네?”
느슨하게 깍지를 낀 두 손을 배 위에 올리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어깨를 편 세리아나가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시종장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턱을 조금 들어 올리고 눈을 살짝 내리깔며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말해보게. 내가 왜 격식도 예법도 무시한 그 무례한 말을 따라 움직여야 하지?”
시종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작 사생아 따위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다니, 이 가짜 왕녀가 제 위치를 망각한 것이 분명했다.
“전하의 명이십니다! 어찌 감히!”
“내가 라젠의 신하이던가?”
그러나 분노한 시종장과 다르게 세리아나의 표정은 고요했다.
가지고 있던 미련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애달픔은 어머니와의 만남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진 이후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세리아나 피오르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서 있는 것은 세리아나 쿤 라누아였다.
“나는 차이툰의 라누아. 라젠의 왕이 내린다고 하여 받고, 오란다고 하여 가는 이가 아니다.”
“이, 이게!”
“이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네.”
세리아나의 말에 다시 한번 소리를 내지르려던 시종장은 철컹하며 들려온 쇳소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이툰 전사들이 허리춤에 찬 칼 위에 손을 올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칼을 반쯤 뽑아 든 상태였다.
세리아나가 한마디만 던지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그의 목을 칠 것이 분명했다.
설마 이곳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까 싶었지만 노려보는 눈들에 담긴 살기가 시종장의 입을 꽉 틀어막아 버렸다.
그가 주춤거리며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세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준비한 선물은 국교를 다지는 의미로 일부만 받도록 하겠네.”
“그, 그건…….”
“치아린.”
“네, 라누아.”
“부피가 작고 가벼운 것 위주로 몇 가지만 챙겨주겠어? 사막을 건너는데 짐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까.”
“명을 받습니다.”
치아린이 몇몇 시종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세리아나는 미련 없이 시종장에게서 등을 돌려 바이샤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맞이한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역시 내 라누아시로군.”
“놀리시는 거죠?”
“그럴 리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은 바이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치아린과 세리아나, 그리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시종장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은 작자였다.
세리아나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이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 버렸을 것이다.
“운이 좋은 놈이군.”
“누가요?”
“그런 놈이 있어.”
그렇게 대답하며 세리아나와 함께 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바이샤의 시야에 아눌라가 들어왔다.
다른 귀족들과 섞여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제법 침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눌라가 아닌 건가?’
모래 늪에 빠져들어 그 바닥을 찾는 기분을 느끼며 바이샤는 고개를 저었다.
수상쩍은 일을 벌이려는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밤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소리겠지.’
어젯밤 그의 생각처럼 완벽한 계획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준비해야 한다.
그게 아눌라든 다른 누군가이든 쥐새끼처럼 뒤에서 음흉한 일을 벌이려 하는 그자는 실패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카얀.”
“네, 쿠드라.”
바이샤는 불쾌하게 온몸을 감싸는 감각을 무시하며 카얀을 불렀다.
일단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저 시종장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쟈캄에게 내가 명하면 언제든 저것을 치워버릴 수 있게 준비해두라고 해.”
“명을 받습니다.”
그는 본래 뒤끝이 긴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뒤에 거슬리는 뭔가를 남겨두는 성정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런 것을 남겨두느니 깔끔하게 목을 잘라 치워버리는 것을 택해왔던 그가 세리아나를 만난 이후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카얀은 주인의 그런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주인을 섬기는 종일 뿐 주인의 길잡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차이툰의 사람들은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라젠의 궁을 떠났다.
관례대로라면 회의가 열리는 나라의 왕이 손님을 배웅해야 했지만 양쪽 모두가 원하지 않았기에 배웅은 생략되었다.
라젠의 국왕,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은 궁의 가장 높은 곳, 첨탑의 난간에 서서 빠르게 멀어져가는 차이툰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시종장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뒤늦게 찾아온 모욕감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감히 내 명을 듣지 않았다?”
“야만족의 왕비로 지내며 자신이 무엇인지 잊은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남을 길을 알려주려 했더니. 쯧쯧.”
“전하의 크나큰 은혜를 모르는 괘씸한 년입니다. 그리 마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생아라고는 하나 세리아나는 왕의 핏줄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를 깎아내리는 시종장과 그 말을 듣는 다르미안 왕,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자가 넘겨준 것은 확인했나?”
“네, 야만족이 가져온 선물 중 ‘그것’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작정하고 준비를 해왔군.”
라젠의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에서 몸을 돌렸다.
차이툰의 일행들은 이미 그의 시야를 벗어난 뒤였다.
그는 천천히 첨탑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투기장의 노예들은 준비되었나?”
“네, 밀라니안 공작이 직접 선별한 검투사들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욕심 많은 돼지 놈이 블루워터를 보더니 눈이 돌았나 보군. 검투사 노예까지 내어놓다니.”
평소 밀라니안 공작에게 과할 정도로 의지하며 호의를 보내던 라젠의 왕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는 밀라니안 공작의 출렁거리는 살들을 떠올리며 이맛살을 구겼다.
주인의 기분이 나빠진 것을 빠르게 눈치챈 시종장이 빠르게 다가와 그의 구겨진 옷을 정리하는 척 입을 열었다.
“전하의 명이 있었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 돼지 놈에게 블루워터를 보여준 것이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연회가 있던 밤, 몰래 찾아온 ‘손님’이 거래 조건으로 내어놓았던 커다란 블루워터를 떠올리며 다르미안은 입맛을 다셨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블루워터는 그도 태어나 처음 만져본 것이었다.
하필이면 밀라니안 공작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그 귀한 것을 보여주는 바람에 이번 계획에 그 욕심 많은 돼지가 손을 보태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밀라니안 공작을 그 자리에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 사실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감히 전하의 손에 들어온 것을 탐하려 하겠습니까? 그 귀한 것을 두 눈에 담을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엎드려야 하는 것을요.”
“허허, 역시 시종장 그대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한단 말이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시종장의 말에 단번에 기분이 좋아진 라젠의 왕은 자신의 금고 안에 고이 모셔놓은 블루워터를 떠올렸다.
일을 끝마치면 지금의 것보다 서너 배는 더 큰 블루워터를 두덩이 더 받기로 했다.
구두로 한 계약은 믿을 수 없다며 확실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 억지를 부려 받아놓은 계약서도 그 금고 안에 함께 있었다.
“엘라이어가 받은 선물도 그렇고…… 그 야만족이 사는 땅에 블루워터의 광맥이 있다는 소문이 거짓말은 아닌 거야.”
“광맥이 아니더라도 그 야만족들의 창고에 블루워터가 쌓여 있는 것만은 확실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약금으로 그런 걸 내놓을 리 없지요.”
라젠 왕의 두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잘만하면 약속받은 두덩이 외에 더 많은 것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카디마의 늙은 마귀는 어떻지? 정말로 그것에게 관심이 있던가?”
“가짜 왕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밀라니안 공작에게 일러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살려서 데려오라 이르게. 죽은 것처럼 꾸미는 건 일도 아니지 않나.”
“그 괘씸한 가짜를 살려 어찌 하시려구요?”
“카디마의 늙은 마귀에게 비싼 값에 팔아야지. 어차피 약속은 그것을 ‘치워주는’ 것이지 않나. 치우는 방법이 꼭 죽음일 필요는 없고.”
“과연 현명하십니다, 전하.”
시종장의 듣기 좋은 아부에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가짜 왕녀 하나로 얻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오늘 밤 엘라이어를 부르게. 선물 받은 귀걸이와 목걸이는 꼭 하고 오라 전해.”
“네, 그러겠습니다.”
라젠의 왕은 저의 욕심 많은 애첩을 떠올리며 그녀가 가진 블루워터를 어떻게 하면 제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루미어스에게 내어주면 그의 사랑스러운 딸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리라.
제가 가진 블루워터를 보존하면서도 딸에게 생색을 낼 귀한 기회를 라젠의 왕은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름다우나 멍청하니 살살 구슬리면 되겠지.”
다시금 크게 웃음을 터트린 그의 푸른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