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모래 늪 (3)
늦은 밤, 깊은 잠에 빠진 세리아나의 볼을 살짝 쓰다듬은 바이샤가 침대를 빠져나와 테라스로 이어진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목적이 죄인들을 가두기 위함이 아니었던 듯 미노아 궁 구석구석에 남은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테라스에까지 퍼져 있었다.
“진짜 꽃 한 송이 없이도 이리 화려할 수 있다니 우습지 않은가?”
돌을 쪼개어 만든 꽃이 빼곡하게 들어찬 테라스의 난간을 눈으로 훑으며 바이샤가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고 팔짱을 낀 그가 말을 이었다.
“답해봐라, 듐. 그렇지 않나?”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바이샤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태양을 대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는 단 한 군데를 제외하고 온몸을 검은색으로 휘감고 있었다.
“내 그림자들은 움직이고 있나?”
“라누아의 그림자들과 함께 살피고 있으나 수가 부족합니다.”
“오아시스에 남겨두고 온 그림자들이 아쉽군.”
“죄송합니다.”
“내 라누아께 남은 그림자는 하나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래서는 위험하지. 오아시스의 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빈자리를 네가 채워야겠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세리아나는 쥬드를 제외한 모든 호위전사를 차이툰의 사람들을 살피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쥬드도 남기려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치아린이 설득해 간신히 남긴 것이었다.
바이샤는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쿠드라의 그림자가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고작 라젠이다. 그 칼끝이 내 근처에라도 올 수 있을 것 같나?”
“……실언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너의 일이니 이번은 용서하마.”
“감사합니다.”
“작은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쿠드라의 듐이 명을 받습니다.”
붉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바이샤는 자신의 호위전사를 손짓으로 물리며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어서 떠올라야 이 역겨운 땅을 벗어날 텐데. 그는 사막의 메마른 바람을 그리워하며 몇 시간 전 그의 아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떤 일을 벌이려 하는 걸까?”
감시를 붙이고 여럿을 살피고 있지만 바이샤도 아눌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종종 선을 넘는 짓을 벌여온 아눌라였다.
의심은 합당한 것이었고 제대로 된 증거 하나만 찾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아눌라의 목을 확실하게 자를 수 있을 것이다.
‘아눌라가 쥐새끼가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만…….’
바이샤는 혀를 짧게 차며 낮에 보았던 라젠의 왕,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회의 내도록 욕심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의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딸을 보고 싶다 했던가?”
엘라이어가 두크란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를 자랑스럽게 걸고 작은 티파티를 전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쟈캄을 통해 전해 들었다.
라젠의 왕 또한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아니 엘라이어가 직접 그를 찾아가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왕의 침실로 숨어드는 데 도가 튼 여자라고 했으니 그쪽이 가능성이 더 컸다.
욕심 많은 그자가 두크란으로 만든 장신구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이샤는 아주 잠시 엘라이어를 위한 선물로 두크란을 준비한 것을 후회했다.
두크란으로 무슨 소란이 생기든 감당할 자신이 있어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의 범위에 세리아나 역시 포함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세리아나를 불러 무엇을 하려 했을까. 두크란에 관한 것을 물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수작질?”
회의에 들어가기 전 세리아나와 식사를 함께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두크란이 욕심이 나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불순한 목적으로 라젠의 왕실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러니 그 욕심 많은 돼지를 살살 달래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몇 마디를 나눴다.
정말로 고작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치밀어오른 구역질에 바이샤는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욕심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남자가 어떻게 왕의 자리에 앉아 백성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바이샤는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내리누르며 그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세리아나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녀가 라젠 왕의 품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악취가 나는 사내 곁에서 배울 거라곤 똑같이 악취를 풍기는 방법일 뿐이었을 것이다.
“쥐새끼를 달고 움직이는 취미는 없지만 이런 역겨운 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도 않으니…….”
세리아나는 당분간 라젠에 머무르며 누가 불순한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하자 했지만 바이샤는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출발하고 싶다고 세리아나를 설득했다.
이곳에 더 머물러봐야 악취만 더 짙어질 뿐 쥐새끼를 꼬리를 잡아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작 삼 일을 머물렀을 뿐이야. 완벽한 계획을 세우기엔 무리지. 시간을 더 줘서 계획을 보완하게 하느니 차라리 불완전한 계획의 변수를 노리는 편이 안전해.’
오늘 밤이라도 움직여 주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겠지만 모든 일은 최선이 아닌 최악의 상황을 가정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바이샤는 태어나 지금까지 언제나 그렇게 움직여왔다.
‘최악, 최악이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라젠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은 지난 전쟁에서 그가 직접 확인했다.
국경지대에서 치른 전투는 그간의 준비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
가장 치열해야 할 장소에서의 전투가 그러했으니 말랑한 뇌와 기름이 잔뜩 낀 근육을 가진 이들이 가득한 이곳은 어떻겠는가?
라젠에서 쓸 만하다 부를 수 있는 이는 터번 후작 정도일까? 그나마도 바이샤 앞에서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전쟁은 아니다.
이쪽에서 먼저 시작하지 않는 한 라젠이 먼저 이쪽을 공격해 올 리 없다.
‘시간이 좀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명분이 없지. 용기도 없을 테고.’
그럼 뭘까?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바이샤는 가장 최악의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두크란을 욕심내고 있는 건 확실하니 분명 그것을 위해 움직일 터.’
라젠 왕의 욕심은 선명했다.
그렇다면 쥐새끼가 무슨 거래를 청하든 그것은 두크란과 연결된 것일 것이다.
만약 그의 의심대로 아눌라가 그 쥐새끼라고 한다면 그녀가 두크란을 미끼로 라젠의 왕에게 청할 수 있는 거래는…….
“내 라누아뿐이지.”
생각이 계속해서 아눌라에게로 흘렀다.
그녀가 범인이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 했지만 그간 아눌라가 해온 짓들이 있어 쉽게 생각을 돌릴 수 없었다.
바이샤는 아눌라가 라누아의 자리를 욕심내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차이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재주를 지녔다면 바이샤는 아눌라를 아내로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에겐 라누아의 자리를 내어줄 만큼의 무언가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눌라는 시카의 후계자였다.
가장 먼저 그의 발치에 엎드린 시카에겐 이미 많은 혜택이 돌아갔고 누라비는 그것을 이용해 차이툰 안에서 시카의 자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부족들의 눈에 ‘특혜’를 입었다 눈총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카의 후계자를 라누아로 들인다면 겨우 목적지에 다다른 대통합에 분란 거리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바이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시카의 누라비도 충분히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떼를 쓰는 것은 아눌라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이샤에게 아눌라가 라누아가 되기에 모자란 사람이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눌라라면 분명히 세리아나의 목숨을 노리는 거겠지.’
차이툰에서 이혼은 용납되지 않는다.
재혼이 허락되는 때는 배우자가 죽었을 때뿐이었다.
아눌라가 라누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세리아나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리아나가 존재하는 한 아눌라는 기회조차 노려볼 수 없었으니까.
‘누라비의 머리를 반만 닮았더라도 그런 멍청한 생각은 안 했을 테지만…….’
아눌라는 멍청하지 않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도 종종 멍청한 짓을 저지르곤 한다.
거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라젠에 함께 온 차이툰의 사람 중 라젠과 몰래 접촉해 이익을 얻으려 움직일 만한 사람이 아눌라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아눌라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최악의 상황인 거지.’
아눌라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목적을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다른 의미로 최악이기는 했다.
그땐 정말로 일이 터진 이후에나 무슨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빠져 있던 바이샤는 테라스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드러낸 세리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것인지 흐릿하게 잠겨 있는 연둣빛 눈동자에 졸음이 가득했다.
“나 때문에 깬 건가?”
“아뇨, 그냥 바이샤가 곁에 없길래…….”
“그게 나 때문이라는 소리야.”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응답하듯 천천히 걸어 그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가슴에 볼을 살짝 비비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걱정되세요?”
“아니.”
“잠을 못 주무시잖아요.”
“그냥 생각이 많아진 것뿐이야.”
세리아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바이샤가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살 내음을 맡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따뜻하게 열이 오른 그녀의 살갗에서 그리운 라일 꽃의 향기가 느껴졌다.
“빨리 돌아가고 싶군.”
“저도 그래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듯 대답한 세리아나가 눈을 감았다.
고작 몇 개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막에 익숙해진 것인지 메마른 모래의 냄새가 그리웠다.
“이만 들어가 자도록 하지. 당신이 조금이라도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치아린이 날 잡아먹으려 덤벼들걸?”
“바이샤의 탓이 아닌걸요.”
“치아린은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모든 일의 원인을 나라고 믿고 있을 거야.”
라누아의 종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충성스러운 사람인지 이제는 잘 알고 있는 세리아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받아 혼나느니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당신 생각은?”
“……그냥 얌전히 자요.”
은근슬쩍 허리를 야릇하게 쓰다듬는 바이샤의 손길을 무시하며 세리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치아린에게 혼나는 것도 무섭지만 내일부턴 다시 차이툰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이전보다 체력이 많이 붙었다고는 해도 밤새 바이샤에게 시달린 몸으로 피곤함에 절어 귀환길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내 라누아께서 이리 매정하실 줄이야. 조금 쓸쓸해지려 하는데?”
“그럼…… 키스까지만…….”
“원하신다면 해드려야지.”
상처받은 것처럼 눈꼬리를 늘어트렸던 바이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붙여왔다.
이번에도 그의 연기에 속았다는 걸 알아차린 세리아나가 눈을 흘기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삼킨 바이샤가 그녀의 숨을 훔쳤다.
진한 입맞춤은 집요하게 달라붙었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입술 덕분에 숨이 막힌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두드리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당신은 너무 달아. 중독될 것 같아.”
“바이샤…….”
“그런 눈으로 유혹하지 마.”
“유, 혹, 한 적…… 없어요.”
“당신의 모든 게 나에겐 유혹이야.”
“그게 뭐예요.”
“그렇다는 거야.”
다시 한번 입술을 붙여 세리아나의 호흡을 짧게 빼앗은 바이샤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디단 숨이 흘러넘치며 온몸이 간질간질 달아올랐다.
“오아시스의 궁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안 끝내.”
“네?”
“이제 진짜 들어가서 자야 할 시간이야.”
“잠깐만, 바이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들으면 무서워할 말.”
“바이샤?”
“치아린에게 혼나기 싫으니 자, 어서 들어가자고.”
모르는 척 등을 떠미는 바이샤의 손길에 테라스의 열린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리아나는 뭔가 중요한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아내의 그런 찜찜함을 풀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웃는 얼굴로 그녀를 침대 위로 이끌었다.
“무슨 말을 하신 건지 안 알려주실 거예요?”
“돌아가면 알게 될 거야.”
“……바이샤는 가끔 이상한 고집을 피워요.”
“아마 가끔이 아닐걸?”
세리아나의 곁에 누워 그녀를 품에 안은 바이샤는 연둣빛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오늘 밤은 아내의 체온과 향기로 어느 정도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아시스의 궁으로 돌아간 이후에…… 다른 것은 그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