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55화 (55/110)

#55. 모래 늪 (2)

세리아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상식을 뛰어넘는 말에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사람의 상식으로 가능한 일인지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세리아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키륜은 말을 이었다.

“만약 카디마에 라누아께서 오신다면…… 밤마다 수많은 ‘접붙이기 재료’들이 라누아의 방을 찾을 겁니다. 우리의 여왕이 원하는 완벽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끔찍한 말이었다.

세리아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키륜의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확신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미라스가 원하지 않는 ‘완벽하지 않은’ 아이들은 어찌 되느냐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어 질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키륜 왕자께선 내게 카디마엔 와선 안 된다 말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요. 경고를 드리려 하는 겁니다.”

“경고?”

“우리의 여왕은 포기를 모릅니다. 라누아께선 단순한 제안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나…… 라누아를 카디마로 데려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우리 여왕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카디마의 궁으로 끌려왔으니까요.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방심해선 안 됩니다.”

키륜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세리아나의 뒤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치아린은 그의 확신이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세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눈빛을 알아차린 키륜은 쓰게 미소지었다.

“그리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제법 무난한 과정으로 우리의 여왕에게 입양되었으니까요.”

사실이다.

미라스에게 양쪽 부모를 모두 잃고 입양된 자식도 있었으니 고작 금화 몇 푼에 팔려 그녀의 양자가 된 키륜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지금 저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여왕이 라누아를 욕심내고 있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순간 미라스가 세리아나의 결혼 전에 그녀를 만났더라면 납치도 불사했을 것이라는 바이샤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바이샤의 억지라고 생각했지만 키륜의 진지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흘려들을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내게 말해도 되나요?”

“제가 말했다는 사실을 모르실 테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카디마의 여왕께서 그대가 여기에 온 걸 알기라도 하면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해하실 텐데요?”

“모르십니다. 감사하게도 차이툰의 쿠드라께서 우리의 여왕의 눈과 귀를 막아주고 계시니까요.”

그 순간 세리아나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요란을 떨었던 미라스의 행동이 키륜의 계략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라스의 눈을 가리기 위해 바이샤를 이용하다니, 그가 알게 된다면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드라를 이용하다니…….”

“이용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그저 다른 일이 있어 우리의 여왕이 이곳으로 향하는 걸 말릴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말장난이군요.”

“그런가요?”

바이샤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화는 내겠지만 키륜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행동은 세리아나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약간의 심술은 부릴지도 모르지만 눈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웃고 있는 남자라면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을 것 같았다.

“키륜 님이 바쁜 일이 있다는 것을 다른 일행들도 알고 있습니까?”

이제껏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치아린이 입을 열었다.

미라스의 눈과 귀를 다른 곳에 돌렸다 하지만 그녀 외에도 키륜을 지켜보는 눈과 귀는 많았으니까.

치아린은 미라스가 세리아나를 욕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조금의 시빗거리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제가 우리 여왕의 명령으로 마법의 거울을 찾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법의 거울?”

“네, 마법이 존재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거울이라고 합니다. 운명의 상대를 비춘다고 하던가요? 긴 시간 크고 작은 나라를 거쳐 라젠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기록을 찾은 이후 우리의 여왕께선 이번 대륙회의만 기다리고 계셨죠.”

그 순간 세리아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의 거울’이라니. 운명의 상대를 비춘다니……!

그녀의 머릿속에 오아시스의 궁, 자신의 방 한쪽에 자리를 잡은 거울 하나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 자세히 들을 수 있나요?”

“라누아께서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세리아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륜이 말하는 그 ‘마법의 거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품어온 거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풀 만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대 왕국의 어느 한 왕비님을 위해 만들어진 거울이라고 합니다. 운명의 상대를 비춰준다고 하더군요.”

“운명의 상대…….”

“네, 저희가 찾은 기록대로라면 보름달이 뜨는 밤, 거울의 주인과 운명으로 묶인 이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마법 같은 이야기죠.”

“어, 어떻게 생긴 거울이죠?”

“타원형의 긴 거울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장식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 나라의 왕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고풍스러운 디자인이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맞다.

피오르 백작가의 창고에서 자신이 발견했던 그 거울이 분명했다.

‘운명이라니, 바이샤가 내 운명의 상대라니!’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복숭앗빛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 비친 바이샤를 만난 것이, 그와 함께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세리아나의 이런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진 키륜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 거울을 가진 이들은 전부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저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거울의 주인들은 대부분 불행해졌다고…….”

왜? 어째서? 거울 너머 제 운명의 상대를 본 이가 왜 불행해진단 말인가?

세리아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살짝 떨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여름 바람이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너무 오래전의 기록인지라 사실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고 그것이 아직까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여왕께서 궁금하다 하시니 알아볼 뿐이죠.”

그런 게 아직 남아 있을 리 없다 답하는 치아린의 목소리와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보물창고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찾을 수 없을 거라 말하는 키륜의 목소리가 뭉개져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기만 했던 세상이 흐릿하게 일그러지는 듯했다.

“라누아?”

“아…….”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니, 괜찮아.”

치아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세리아나가 간신히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그 어색한 미소에 치아린의 걱정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지만 타국의 사람을 앞에 두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제 이야기가 라누아를 불편하게 했다면 사죄드립니다.”

“아닙니다, 그저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빠르게 답하며 키륜을 향해 미소짓는 세리아나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어둡고 불안해 보이던 표정은 감쪽같이 사라져 마치 그것을 보았던 순간이 착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키륜은 의아함이 남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이야기 어디에서 세리아나가 불편함을 느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제가 섬기는 이는 아니었으나 이럴 땐 모르는 척 제 의문을 덮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해야 할 말은 모두 전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오래 자리를 비워 좋을 것은 없었기에 키륜은 앉았던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세리아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무례를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라누아.”

“이미 용서한 일입니다. 거기다 나를 위해 움직여 주신 것이니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리 생각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린 키륜이 몸을 돌렸다.

바르게 난 길을 이용할 순 없으니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키륜은 몇 걸음을 채 움직이지 못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서 망설임을 읽은 세리아나가 치아린에게 신호를 보내 다시 키륜을 제 앞으로 불러들였다.

“남은 말이 있으신가요?”

“차이툰의 일에 카디마의 사람인 제가 입을 붙이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한 일이 있으니 듣겠습니다.”

“……또 한 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라누아. 라젠의 왕족과 은밀한 만남을 추진하는 차이툰의 인물을 발견했습니다.”

“…….”

“기다란 로브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잠깐 드러났던 피부색과 억양은 분명 차이툰의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발견했죠?”

“라젠의 왕실을 살피던 중에 우연히…….”

지금 키륜의 말은 카디마의 눈이 라젠과 차이툰 모두에 골고루 퍼져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젠의 왕녀이자 차이툰의 여왕인 세리아나에겐 어떤 식으로든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문제였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던 키륜은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왜 내게 알리는지 질문해도 될까요?”

“위험을 피해 가셨으면 하니까요.”

“…….”

“라누아께 위험한 일은 우리 여왕에겐 기회일 테니까. 그것을 피해 가셨으면 합니다.”

“그대의 여왕님을 싫어하나요?”

“늦은 질문이십니다.”

키륜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으로 그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인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배고픈 제게 따뜻한 음식을 내어줬던 그분을 좋아하지만 절 ‘재료’로 사용하는 그분을 증오하기도 하고, 간절히 바라는 단 하나를 얻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그분을 동정하기도 합니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키륜은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으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확실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키륜은 다시 몸을 돌려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가 치아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키륜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누구일까?”

키륜의 말을 전부 믿을 순 없다.

분명 세리아나를 걱정해서, 또 다른 불행을 막기 위한 선한 마음에서 움직인 것일 테지만 세리아나는 차이툰의 라누아였다.

그저 느낌만으로 사람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리아나는 의심하는 동시에 믿어야만 했다.

키륜이 세리아나에게 거짓을 전해 얻을 이익은 없었으니까. 사람이 아닌 상황을 보고 판단하라. 야안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저는 아눌라가 의심스럽습니다.”

“……치아린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라젠 왕실에 은밀히 접촉할 만한 사람. 차이툰의 사람 중 라젠 왕실에 호감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이 세리아나를 받아들인 것은 아주 특수한 경우였다.

누라비는 차이툰의 백성들이 세리아나를 ‘라젠의 왕녀’가 아닌 ‘라누아의 현신’으로 받아들이도록 정성을 들여 소문을 퍼트렸다.

만약 그 작업이 아니었다면 세리아나가 오아시스에 적응해 살아가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의도로 접촉한 건 아닐 겁니다. 라젠과 우리 차이툰 사이엔 좋은 감정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전이라면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폈을 치아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라젠을 언급했다.

세리아나의 일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치아린은 그녀의 주인이 라젠에 남은 모든 미련을 털어버렸다는 것을 바이샤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세리아나가 오직 차이툰의 라누아로 살겠다 마음먹은 것을 알아차린 치아린은 거리낌 없이 라젠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라젠의 귀족도 아니고 왕실과 접촉했습니다. 그리고 차이툰과 라젠 왕실의 연결점은 라누아뿐이시죠. 라누아에 관한 문제로 접촉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아눌라가 유일하죠.”

키륜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조차 증명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아눌라라는 증거가 있을 리 없었다.

심증이었고 그저 의심일 뿐이다.

그러나 세리아나와 치아린은 라젠의 왕실과 접촉한 것이 아눌라일 것이라 확신했다.

“짐 정리를 천천히 하라 일러야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이샤는 회의가 끝난 후 바로 라젠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에 맞춰 차이툰의 시종들은 이미 짐 정리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어떤 위험을 끌어안았는지 파악조차 못 했는데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쿠드라께 회의에 들어가시기 전 점심을 함께했으면 한다고 전해줄래?”

“바로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쥬드.”

“네, 라누아.”

세리아나의 부름에 쥬드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가린 붉은 베일 외엔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싼 그녀를 바라보며 세리아나가 명령을 내렸다.

“호위전사의 수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알지만 힘을 좀 써야겠어.”

“네.”

“전부를 살펴줘. 붙잡지는 말고 살피기만.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 파악하기 전까진 우리가 알아차렸다는 걸 그 누군가는 몰랐으면 해.”

“라누아의 쥬드가 명을 받습니다.”

주먹을 쥔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 쥬드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따로 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쥬드라면 아눌라를 특별히 더 감시하라고 다른 호위들에 명할 것이다.

세리아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키륜이 던지고 간 말들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카디마의 여왕, 그녀의 소원, 마법의 거울, 운명의 상대, 수상한 움직임. 복잡하고 불길한 말들이었다.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것만…… 거울은 나중에 생각하자.’

어디선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나는 그것이 무언가의 징조가 아니길 바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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