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모래 늪 (1)
대륙회의가 열리는 아침이 밝았다.
전날과 비교해 비교적 얌전하게 아침을 맞이한 바이샤와 세리아나는 본의 아니게 이른 시간부터 각자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이샤의 본래 계획대로라면 아침을 들기 전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 안에 들어가 치아린에게 혼나지 않는 선에서 세리아나와 건전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바이샤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일방적으로 친목의 시간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세리아나에게 수작질을 벌이는 카디마의 여왕 때문이었다.
덕분에 바이샤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미라스의 멱살을 잡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비체라온 궁의 후원으로 가셨다고?”
“네, 거기에 작지만 연무장이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치아린이 채워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세리아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연무장에서 무슨 싸움이라도 벌일까 싶어 걱정하는 마음이 그 얼굴에 빤히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고 웃음을 삼킨 치아린이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간단하게 검을 교환한다고 들었어요. 쿠드라께서 설마 여기서 카디마 여왕의 목을 자르기라도 하시겠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세리아나는 차가운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켰다.
“카디마의 여왕님도 참 끈질기시네요. 듣기로는 어제도 라누아가 있으신 천막 쪽으로 접근하려는 걸 카얀이 몇 번이고 막았다고 해요.”
“설마 카얀이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게 그것 때문이야?”
“판카가 나타나기 전까진 지루한 대회였으니 카얀도 불만은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카얀은 쿠드라 곁을 지켜야 하잖아.”
“고작 울타리 안의 짐승을 잡는데 쿠드라께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러니 라누아를 지켜드리기로 마음먹은 거죠.”
“미안하네.”
“누누이 말씀 올리지만 라누아께선 그저 당연하게 누리시면 돼요.”
“응, 고마워.”
두 사람은 미아노 궁의 후원에 나와 있었다.
폐궁의 겉과 속을 급하게 정돈하기는 했지만 후원만큼은 어찌하기 어려웠는지 곳곳에 잔디와 잡초가 뒤엉켜 무척이나 어지러운 공간이었다.
차마 그런 곳에 제가 섬기는 주인을 모실 수 없었던 치아린은 이곳에 도착한 직후 시종들을 동원해 후원을 말끔히 정리했다.
물론 넓은 후원 전체를 정리할 순 없었기에 세리아나가 산책을 나와 잠시 머무를 공간, 딱 그만큼만 깔끔히 정리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정리할 걸 그랬나 봐요.”
“고작 며칠 머무는데, 아이들의 힘을 뺄 필요는 없어. 이 정도면 충분해.”
“라누아께서 그러시다면…… 차를 좀 더 준비할까요?”
“아니, 괜찮아.”
바이샤는 회의를 마치는 대로 라젠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 덕분에 세리아나와 치아린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전부 떠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혼자만 여유롭게 있는 것도 미안한데 신경까지 쓰이게 하고 싶지는 않아 세리아나는 차가운 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쿠드라께선 점심도 따로 드시겠다고 해?”
“카디마의 여왕 때문에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 전해달라 하셨어요.”
“그래…….”
“너무 실망하시는데요? 역시 이 치아린으로는 부족하신 거죠?”
“응?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아, 라누아. 이 귀여우신 분! 불충한 감상을 품은 걸 용서하세요. 그런데 정말 어쩜 이다지도 귀엽고 귀여우신지! 헬라임께서 쿠드라께 너무 많은 행운을 내리셨어요!”
자신의 가라앉은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평소보다 과장되게 행동하는 치아린을 보며 세리아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차이툰에 와 바이샤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지만 치아린을 만나고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아주 큰 행운이라고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라누아, 침입자가 있습니다.”
그때였다.
세리아나의 그림자 속에서 솟아난 쥬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보고했다.
쥬드의 등장에 치아린의 얼굴이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보다 아주 조금 늦게 쥬드의 말을 이해한 세리아나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침입자는 즉각 처형하라 일렀을 텐데?”
“어젯밤 라누아께서 만난 이들 중 하나입니다.”
쥬드는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 세리아나의 그림자 속에 숨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림자 속을 벗어나는 순간은 오로지 세리아나가 바이샤와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순간뿐이었다.
어젯밤 연회에도 세리아나의 그림자 속에 숨어 주변을 살피던 쥬드는 그녀의 주인에게 일방적인 약속을 몰래 던지고 사라졌던 남자의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디마의 키륜이라는 자입니다.”
“키륜?”
“네.”
세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디마의 사람이 왜 자신을 보겠다며 찾아온 것일까? 거기다 쥬드가 침입자라는 표현을 썼으니 분명 몰래 숨어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어리둥절한 세리아나와 다르게 치아린은 연회장에서 키륜이 미라스의 눈을 피해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찾아오겠다더니 정말로 찾아왔다.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치아린이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리아나뿐이었다.
“어제 카디마의 여왕을 달래 데려간 이입니다. 조금 알아보니 여왕의 양자라고 합니다.”
“양자?”
“네. 정확히는 서른여섯 번째 자식입니다.”
예상치 못한 숫자에 세리아나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여섯이라고 말해도 놀라울 판에 서른여섯이라니……. 아무리 양자라지만 수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디마의 여왕께선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나 봐.”
“글쎄요.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더 알아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세리아나가 쥬드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쥬드는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세리아나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륜이라는 자, 혼자 왔어?”
“네, 혹시나 해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자 외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길을 이용해서?”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숲을 통해 이 궁의 뒤쪽으로 접근했습니다. 담을 넘기 전 저희가 발견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묶어두었습니다.”
“다른 말은 없었어?”
“라누아를 만나 뵙고 전할 말이 있다고 말한 후 입을 다물었습니다.”
세리아나는 고민에 빠졌다.
비공식적으로 찾아온 카디마의 사람을 자신이 만나도 되는 것일까? 심지어 그는 미라스의 양아들이라고 했다.
카디마로 찾아오라던 미라스의 제안을 기억하고 있는 세리아나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치아린.”
“네, 라누아.”
“주변의 경비를 조금 더 강화하라고 해줄래?”
“만나시려구요?”
“응, 혼자 몰래 찾아와 전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
“네 알겠습니다.”
쥬드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치아린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신호를 보냈다.
세리아나는 키륜과의 만남을 누구에게도 보일 생각이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치아린은 이 주변으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할 정도의 빽빽한 경계를 명령한 후 세리아나의 빈 찻잔을 다시 채웠다.
잠시 후 후원의 뒷길을 통해 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를 줄에 묶인 키륜이 뒤따르고 있었다.
줄에 묶이면서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것인지 제법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시커먼 로브를 몸에 두른 상태였다.
“차이툰의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거칠게 맞이했음에도 정중한 인사 감사합니다. 이리로 앉으세요.”
세리아나의 손짓에 그를 단단히 묶고 있던 줄이 풀려나갔다.
묶였던 자리를 주무르며 세리아나의 맞은편에 준비된 의자에 앉은 키륜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무례한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턴 미리 서신을 전하는 게 좋겠네요.”
“지켜보는 눈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이제는 제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자연스러워진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치아린이 키륜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채웠다.
생각 같아선 이 무례한 침입자에게 시원한 물 한 잔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세리아나가 손님으로 맞이한 이상 그만큼의 예의는 보여주어야 했다.
키륜은 자신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치아린을 무시하며 제 앞에 놓인 시원한 차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리고 아주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여왕께서 차이툰의 라누아께 한 제안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단도직입적인 키륜의 말에 세리아나와 치아린, 두 사람 모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 여기를 찾아온 이유를 밝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긴 탐색전을 생각하고 있다가 이렇게 바로 말을 던지는 키륜의 모습에 당황했던 세리아나가 서둘러 표정을 정리했다.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이에게 제 속내를 빤히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던 야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카디마의 여왕께서 아드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는군요.”
“제가 누구인지 알고 계시는군요.”
“서른여섯 번째 자식이라 들었습니다.”
양자라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이 쉽게 입에 올릴 단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륜은 그런 세리아나의 배려를 알아차린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작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여왕께선 많은 아이를 ‘가지고’ 계시죠. 제 밑으로 스물두 명의 아이들이 더 있다는 것도 아십니까?”
“……아이를 참…… 좋아하시는군요.”
키륜이 서른여섯 번째 자식이고 그 밑으로 스물두 명이 더 있다고 하면 미라스는 몇 명의 자식을 밑에 두고 있는 것일까?
세리아나는 머릿속으로 그 수를 셈하며 그중 미라스의 친자는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았다.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여왕께선 그저 아이를 ‘가지고’ 싶은 것이니까요.”
“……그게 내게 전할 말과 관련이 있나요?”
“네.”
“카디마의 여왕께서 내게 한 제안과 그분의 양자들이 무슨 상관 있죠?”
찻잔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던 세리아나가 얼굴을 굳혔다.
이제껏 감정이라는 걸 느낄 수 없었던 키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세리아나는 그 흔들림에 담긴 여러 감정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들이 매우 격렬하고 부정적인 것이라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카디마의 여왕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늙지 않는 저주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저주로 인해 여왕들이 무엇을 잃어야 했는지도 아십니까?”
“진심으로 원하는 한 가지를…….”
“카디마의 현 여왕인 미라스 판 디가는 아이를 원합니다.”
“아이?”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늙지 않는 대신 가장 소원하는 단 한 가지를 얻을 수 없는 저주에 걸린 여왕이 원하는 것이 아이라니. 그 많은 자식을 가지고도?
“설마…….”
“네, 우리의 여왕은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도 원했기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
미라스가 왜 자신의 아이를 간절하게 바라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수많은 양자를 들인 것을 보면 정말로 간절하게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라스의 제안은 카디마로 넘어와 자신의 자식이 되라는 소리였던 걸까?
“그럼 혹시 내게 했던 제안은…….”
“지금 생각하고 계신 그것이 맞습니다. 절반이지만요.”
수수께끼처럼 이어지는 키륜의 말에 세리아나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 말을 꺼낼 때엔 요점만 찔려 들어오는 것 같더니 말이 이어질수록 요점을 벗어나 어딘가를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내게 전할 말이 있다면 똑바로 말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놀림당하고 있다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할 순 없을 것 같군요.”
키륜이 미라스의 양자, 그러니까 카디마의 왕자이기에 예의를 갖추고 있었을 뿐이다.
그간 바이샤의 노골적이고 부끄러운 가르침 덕분에 세리아나는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키륜이 계속해서 말을 돌린다면 지금껏 베풀었던 것을 거둘 것이다.
세리아나는 차이툰의 라누아였고 그 이름을 짊어진 이상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을 방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우리의 여왕은 ‘완벽한’ 아이를 원합니다.”
“…….”
“저와 다른 자식들은 바로 그 완벽한 아이를 위한 재료입니다.”
“무슨…… 사람이 어떻게 재료가 될 수 있죠?”
“우리의 여왕은 그것을 ‘접붙이기’라고 부릅니다.”
불쾌하다.
세리아나는 키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사람을 두고 재료를 운운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 ‘접붙이기’라는 단어는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것은 세리아나의 뒤에 서 있던 치아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세리아나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잔뜩 찌푸린 치아린의 얼굴엔 경멸마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말을 뱉은 키륜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까의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파란 눈동자는 무척이나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의 여왕이 바라는 각각의 아름다운 부분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접붙여’ 그 장점만을 가진 아이를 낳게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 말은 카디마의 여왕이 나를 그 접붙이기의 재료로 원한다는 말인가?”
“라누아의 눈동자는 우리의 여왕이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아이’가 가져야 할 눈동자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