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세리아나와 엘라이어 (3)
자신은 어머니에게 무슨 의미인 걸까?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해 왔었다.
왕비 자리를 얻기 위한 핑계? 도구? 어느 것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하던 세월이었다.
“세리아나. 고개를 들렴. 너는 어쨌든 차이툰의 왕비가 아니니? 어미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말렴. 너의 자리를 네가 가볍게 만들지 마. 그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은 엘라이어가 손을 뻗어 세리아나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울 것 같이 일그러진 딸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렸지만 그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엘라이어는 서둘러 세리아나에게서 손을 떼고 물을 한 모금 삼켜 속을 진정시켰다.
“네가 내 성격을 반만 닮았어도 살기가 편했을 텐데, 어찌 이리 미련하고 답답한지.”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에게 한 가지만 일러주마.”
엘라이어는 알지 못했지만, 세리아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어머니가 자신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욕심을 내렴.”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넌 좀 욕심을 낼 필요가 있어.”
욕심을 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 생각했다.
왕비의 자리를 욕심내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보며 무의식중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그런데 엘라이어는 그녀의 딸에게 욕심을 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욕심은 그냥 욕심이야.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거지. 욕심이 없는 인간은 없어. 하물며 신도 욕심을 낸단다.”
“어머니!”
“뭐 어때. 나는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신을 믿지 않고 넌 이제 다른 신을 섬기는데.”
“그래도…….”
“뭐 어쨌든. 욕심내는 것을 너무 나쁘게만 여기지 말라는 소리야.”
“……노력해 볼게요.”
“노력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야.“
“…….”
“가지고 싶은 게 보석이든 권력이든 사람이든! 가지고 싶으면 욕심을 내. 그리고 네 것으로 만들어. 노력은 그럴 때 하는 거야.”
대체 왜 이런 걸 지금 알려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엘라이어는 다시 목걸이와 귀걸이로 시선을 돌렸다.
답답한 딸에게 당연한 것을 설명하느라 노력하는 것보다는 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마음 편했다.
“어머니는…… 욕심으로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으세요?”
“아아, 본처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 자리를 탐낸다고 내게 하는 소리를 들었구나.”
“……네.”
“이기적인 게 뭐 어때서? 사랑은 본래 이기적인 거야.”
“…….”
“왜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소리를 해서 놀랐니?”
어머니의 남들과는 다른 색다른 가치관에 또 놀라버린 세리아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엘라이어가 귀걸이와 목걸이가 담긴 상자의 뚜껑을 덮어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사랑처럼 남에게 있는 힘껏 민폐를 끼치는 일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런 걸 신경 쓰니?”
“민폐요?”
“그럼 민폐지.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하는 짓들이 그 상대에게 전부 좋은 일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데?”
“…….”
“내게는 좋아도 남에겐 나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상대에게 나쁜 일일까 매번 고민할 수는 없잖아.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신경 쓸 바엔 전부 무시하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게 속 편하지.”
“하지만…….”
“얘, 세리아나. 아까부터 하지만, 하지만 하는데. 넌 그럼 다른 사람이 불편해한다고 네 사랑을 포기할 거니?”
“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도 사랑할 수 있어. 그럼 너는 ‘이기적’으로 네 마음만 생각할 수 없다고 사랑을 양보할 거야?”
세리아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교로 두 입술을 붙인 듯 선뜻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넌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란다. 영악하게 머리를 굴릴 줄 모르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뱉는 말들이 세리아나를 치고 달아났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질 않았다.
“이기적으로 살아. 욕심도 내고. 네가 그런다고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또 욕을 좀 하면 어때? 자기들은 안 그러는 것처럼 뒤에서 씹어봤자 안 들으면 그만인 것을.”
엘라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의 구석에 걸려 있던 자신의 로브를 몸에 둘렀다.
보석이 담긴 상자를 한 손으로 쥐고도 능숙하게 로브의 매듭을 짓는 모습을 세리아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다시 오지 마. 고향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니.”
“어머니…….”
“뭐 좋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 여길 온 건지. 다음부턴 네 남편만 보내. 넌 궁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네.”
“전하께는…… 아직 들키지 않았다 전하마. 그편이 우리 둘 모두에게 좋겠지.”
“감사해요.”
“자주는 말고 가끔 편지나 보내렴. 이런 선물도 함께 보내면 좋고. 답장은…… 내키면 보내마. 그렇다고 기대하지는 마. 난 그런 거 질색이니까.”
“…….”
“나오지 마,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 법이야.”
엘라이어가 천막의 출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는 말이 없어 세리아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천막의 입구에 멈춰선 엘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살은 쪘지만 얼굴색은 좋구나. 그 모래땅에서 잘 먹고 잘 지내는 거겠지. 대답은 말아, 나는 그냥 그렇게 믿을 테니. 서로 잘 지낸다 그리 믿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죽든 네가 죽든 소식이 들리면 딱 하루만 슬퍼하고 털어버려.”
“…….”
“구질구질하게 죽은 사람 생각하며 우울하게 보낼 필요 없어.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구차해질 뿐이니 딱 하루만 그렇게 해. 알아들었니?”
“……네.”
세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감추려는지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엘라이어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말하면 세리아나의 착각이라 대답할까? 세리아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지금 행복해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엘라이어는 그 떨림 안에 담긴 제 딸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어요. 그래서 전, 전 지금 행복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걱정을 한다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머니도 행, 복해지세요.”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란다. 시집가더니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서는.”
“편지할게요. 선물도 보낼게요.”
“편지는 너무 자주 보내지 마. 선물도 네 남편이 싫어할지도 모르니 조금씩만 보내고.”
엘라이어는 그 말을 끝으로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천막을 뚫고 들어온 볕이 홀로 남은 세리아나를 감쌌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온기 때문에 세리아나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슬프거나 서글프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찰나에 스친 볕이 너무 따스해서 그래서 세리아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사냥대회의 승자는 당연하게도 바이샤였다.
미리 풀어놓은 사냥감을 잡는 것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그였다.
실제로 대회 중반까지 그가 잡은 사냥감이라곤 살찐 수사슴 두 마리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세리아나에게 녹용을 선물할 생각으로 잡은 것이지 다른 의욕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승자가 된 이유는 살찐 사냥감이 가득한 공간을 침범한 다른 짐승을 그가 잡았기 때문이었다.
겁도 없이 사람이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온 짐승은 라젠의 깊은 숲에서만 서식하는 판카였다.
고양잇과의 맹수로 곰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이 검은 짐승이 왕성의 사냥터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보기 힘든 짐승이 울타리를 넘어온 이유는 간단했다.
사방에 흐트러진 피 냄새 때문이었다.
살찐 짐승의 피 냄새가 판카를 자극했고 숲에서 상대를 찾아볼 수 없는 포식자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담장이 인간이 쳐놓은 울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왔다.
만약 판카를 처음 발견한 것이 바이샤가 아니었다면 큰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운 좋게 내 눈앞에 나타난 거지. 사막에서도 비슷한 걸 찾기 힘든 맹수더군.”
“……보통 그런 상황에선 운이 나쁘다고 하지 않나요?”
라젠 왕이 준비한 트로피를 사양하고 판카의 사체를 부상으로 받아온 바이샤는 곧장 세리아나가 있는 천막을 찾아왔다.
죽은 짐승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세리아나를 배려해 판카의 사체는 미리 미아노 궁으로 보낸 이후였다.
깨끗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바이샤의 몸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세리아나는 새삼 자신의 남편이 무척이나 호전적인 차이툰의 쿠드라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운이 좋았지. 들어보니 짐승의 모피가 무척이나 귀하다더군. 여름에 걸치면 시원하고 겨울에 걸치면 따뜻하다나? 그래서 그런가 카디마의 늙은이도 탐내던데?”
만족스러운 사냥감을 잡은 것도 그렇지만 카디마의 여왕을 놀려준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지 바이샤의 얼굴이 밝았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은 세리아나가 핏물에 절은 수건을 시녀에게 넘겼다.
깨끗한 물로 손을 씻은 뒤 바이샤 곁에 다가간 세리아나가 이번엔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피는 당신에게 주지. 계절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하니 깔개로 사용해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큰 짐승인가요?”
“당신에게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지. 깔개로 만들기 전에 본을 떠서 가져오라 할까?”
“아뇨, 설명만으로도 충분해요.”
당장이라도 명령을 내릴 듯 몸을 일으키려는 바이샤를 진정시킨 세리아나가 그의 머리에 붙은 작은 풀잎들을 전부 떼어내고 빗을 잡았다.
그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세리아나는 바이샤가 해주는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슴도 두 마리 잡았어. 뿔이 아주 크더군. 늦봄에 새로 자란 녹용이 좋다고 하던데 아쉬워. 그래도 녹각이 되기 전의 녹용이니 효과가 아주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야.”
“설마 그것도 제 몫이에요?”
“당신은 약하잖아. 건강해져야지.”
“……당신이 밤에 조금만 덜 괴롭혀도 지금보다는 건강해질걸요?”
“원망하는 거야?”
“그냥 그렇다구요.”
바이샤가 손을 뒤로 뻗어 세리아나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 손길에 반항하지 않고 이끌려 그의 허벅지 위에 비스듬히 앉은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눈을 피했다.
“울었나?”
“……조금이요.”
“어머니랑 헤어지는 게 슬퍼서?”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럼?”
“그냥요, 그냥…… 눈물이 났어요.”
“내 라누아께선 울보셨군.”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바이샤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전하를 사랑하신대요, 그분을 사랑해서 저를 낳으셨대요. 전…… 오늘 처음 알았어요.’
세리아나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리 내어 말했다간 가슴속에 꼭꼭 숨기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까 봐 겁이 나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머니, 잘못 아셨어요. 전 이미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걸요.’
그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그의 아내로 그의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이 이상 욕심을 부리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행복마저 잃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전 여기까지만 욕심부릴게요.’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런 세리아나의 모습에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그녀 안의 어린아이를 불러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차이툰에는 오지 않겠다고 한 모양이군. 나와의 만남도 피했고.’
아내에게 묻지 않아도 답이 뻔했다.
세리아나에겐 미안하지만 바이샤는 엘라이어를 차이툰에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세리아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쟈캄의 보고로도 알고 있었지만 천막 앞을 지키고 있던 치아린의 얼굴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엘라이어는 결코 좋은 어미가 아니었다.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가? 힘들어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내일 대륙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어떻게든 이 라젠을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대충 분위기도 살폈고 세작들이 무사히 뿌리를 내린 것을 확인했으니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 전에 요리법은 챙기고. 쟈캄 녀석 게으름 안 피우고 잘 하고 있겠지?’
어젯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미아노 궁을 찾은 쟈캄에게 라젠의 요리법을 전부 모아 책으로 엮어두라 명했으니 그가 게으름만 피우지 않으면 떠나는 날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수십 수백 가지나 되는 요리법을 고작 이틀 만에 전부 엮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쟈캄의 일이었다.
처음 목표는 요리사를 구하는 것이었지만 믿을 만한 요리사를 구하는 것은 세리아나의 걱정처럼 몹시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책을 엮는 것이었다.
바이샤는 지금쯤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요리책을 엮고 있을 쟈캄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침울하게 가라앉은 세리아나의 등을 계속해서 도닥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