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52화 (52/110)

#52. 세리아나와 엘라이어 (2)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보다 더욱 파리해 보이는 모습에 건강은 괜찮으냐 질문하려던 세리아나의 입을 엘라이어가 막았다.

뱉으려던 걱정이 입안에 고였다가 사라졌다.

“고작 백작부인이 야만족의 왕비를 만나겠다고 몰래 찾아왔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더구나. 전하께서 네가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오라 하시기에 별생각 없이 왔다만…… 정말 들켰니?”

“……들키지 않았어요.”

“그럼?”

“제가 먼저 고백했어요.”

“이 멍청한 것을 어쩌면 좋아!”

호들갑을 떠는 어머니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너 쫓겨나는 거니? 그래서 돌아온 거야?”

“아니에요.”

“알고서도 그냥 받아들여 준다고? 야만족의 왕이라더니 좀 모자라는…….”

“쿠드라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정색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엘라이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딸의 처음 보는 모습에 놀란 것이다.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 지르는 세리아나라니!

태어나던 순간부터 시집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본 적 없는 제 딸이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쿠드라를 함부로 말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차이툰의 왕이십니다. 예의를 지키세요, 어머니.”

“그래, 뭐…… 그러마. 그런데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다니. 너도 야만족에게 많이 물들었구나.”

민망한 듯 냉차를 한 모금 삼킨 엘라이어가 세리아나의 모습을 살폈다.

늘 눈을 내리깔고 몸을 움츠렸던 딸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이상했다.

“잠깐! 너 살쪘니?”

“하아…… 어머니…….”

“세상에 네 허리가 지금 얼마나 두꺼운지 알기나 해? 거기다 장갑은 어디에 뒀니? 설마 맨손으로 계속 돌아다니는 거야? 그러면 손이 얼마나 거칠어지는데! 신발 모양은 또 어떻고! 그렇게 납작한 신발을 신어서는 몸의 태가 안 산단 말이야!”

경악한 엘라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이 망가진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라젠의 연회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광대의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니? 도대체 뭘 얼마나 처먹었기에 몸이 그 꼴이 된 거야!”

바이샤나 치아린은 세리아나의 살을 더 찌우지 못해 안달인데 엘라이어는 몸이 망가졌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망가진 곳은 없었다. 오히려 더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가만히 앉아 어머니의 경박하기까지 한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것도 라젠과 차이툰의 차이일 테니까.’

이해할 수 있다. 라젠에서 태어나 일생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가 이해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라젠과 차이툰의 기준은 달라요, 어머니. 거기다 전 아주 건강하니까요.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렇지! ……아니 잠깐만, 너 목에 걸고 있는 그거……. 서,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그거니?”

“네 맞아요. 블루워터예요. 차이툰에서는 두크란이라고 부르지만요.”

“세상에 귀걸이까지! 바, 반지는? 반지는 없니?”

“차이툰의 사람들은 반지를 끼지 않아요.”

“세상에! 세상에!”

평소 보석에 욕심이 많은 사람답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사파이어와 혼동하기 쉬운 블루워터를 엘라이어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화를 내고 있던 어머니가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며 세리아나가 쓰게 미소지었다.

“가시기 전에 드리려고 했지만…… 여기 어머니 것도 준비했어요.”

“정말? 어머, 세리아나. 내 딸. 네가 어미를 이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구나!”

“쿠드라께서 준비해 주셨어요.”

“반지가 없는 건 아쉽지만 어쩌겠니. 내가 이해해야지. 세상에 이 크기 좀 봐! 전하의 왕관에 박힌 것보다 서너 배는 더 크겠다!”

세리아나의 손에 들린 상자를 낚아챈 엘라이어는 그녀의 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뱉고 있었다.

커다란 두크란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를 연신 손끝으로 쓰다듬는 엘라이어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것을 보며 세리아나는 그녀 몰래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좋은 말로는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고 나쁜 말로는 노골적인 사람. 그게 바로 엘라이어 피오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딸인 세리아나는 어머니의 노골적인 욕망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가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세리아나를 제외하면 라젠, 아니 이 대륙에서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귀한 귀걸이와 목걸이였으니 만족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세리아나가 아는 어머니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기뻐하시네요.”

“내 딸이 이 정도 보석을 턱 하니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전하께서도 날 달리 보지 않으시겠니? 그러니 기쁠 수밖에!”

“네? 어머니 무슨…….”

“얘, 세리아나. 이것 말고 더 준비한 건 없니? 전하께 보여드리면 분명 탐을 내실 텐데…… 반지도 없는 마당에 둘 중 하나가 더 빠지게 되면 모양이 이상하잖아.”

“…….”

“당장 준비할 수 없으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목걸이라도…… 그걸 전하께 선물하면 그분이 얼마나 기뻐하실지 상상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구나.”

세리아나는 어머니가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두크란으로 왕비 자리를 받아내려는 것이다.

엘라이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욕심이 더 많은 라젠의 왕이라면 그 거래를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거래에 응하는 척 더 많은 두크란을 받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든가…….

‘후자일 확률이 더 높겠지만.’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엘라이어를 향해 세리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제가 걸친 건 쿠드라께서 제게 선물하신 거예요. 함부로 내어드릴 순 없어요.”

“어쨌든 지금은 네 것이잖니.”

“어머니.”

“매정한 것. 알았다. 알았으니 노려보지 말려무나. 좋은 것을 부모와 나누는 것을 아까워하는 네가 어찌 좋은 왕비가 될는지 이 어미의 걱정이 깊어지는구나.”

예전엔 이렇게까지 속이 답답하고 화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일까?

세리아나는 답답한 속을 냉차로 달래며 한숨을 삼켰다.

어머니는 변하지 않은 것 같으니 아마도 자신이 변해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쿠드라께서 어머니를 뵙고 싶어 하세요.”

“설마 이것 그 쿠, 쿠드라? 아무튼 네 남편을 만나야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거니?”

“……그건 아니에요.”

“그럼 됐어. 내가 왜 그 사람을 만나니. 너는 왕녀로 시집갔고 나는 고작 백작 부인인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쿠드라께선 제가 가짜라는 걸 알고 계세요. 그러니 문제될 건…….”

“잠깐. 잠깐 세리아나. 지금 뭐라고 했니? 가짜?”

황홀한 얼굴로 목걸이의 두크란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엘라이어가 정색하며 세리아나의 말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란 세리아나가 입을 다물자 천막 안에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멀리서 또다시 사냥의 성공을 알리는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뭐가 가짜란 말이니?”

“저요. 제가…… 가짜잖아요.”

“가짜라니. 진짜 너는 따로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아뇨, 제가…… 가짜 왕녀라는 뜻이었어요.”

“세상에, 세리아나 이 멍청한 것.”

상자 안에 목걸이를 내려놓으며 이마를 짚은 엘라이어가 제 몫의 냉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세상 다시 없을 천치를 보는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했다.

“네가 반쪽이라고는 해도 전하의 핏줄임은 틀림없어. 너도 내가 전하를 두고 딴짓을 했다 의심하는 거니?”

“아니요! 아니에요!”

세리아나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엘라이어 피오르 백작 부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녀가 안긴 사내는 오직 이 라젠의 왕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 한 사람뿐이었다.

뒤에서 천박한 엘라이어라 조롱했지만 라젠 사교계의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세리아나, 말해보렴. 왕녀란 무엇이지?”

“왕의 따님을 말해요.”

“네가 이은 피 중 내 것을 제외하고 남은 반쪽 핏줄은 누구의 것이니?”

“……전하의 것이요.”

“그래. 네 몸에 흐르는 피의 반쪽은 다르미안 전하의 것이야. 반쪽짜리 피를 이유로 가짜라고 부른다면 자이로 왕세자와 루미어스 왕녀 또한 가짜겠지! 둘의 몸에 흐르는 것도 반쪽짜리 전하의 피니까!”

억지였다.

왕세자와 왕녀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왕비의 태를 빌어 태어난 ‘진짜’였으니까.

“너는 세리아나 위니 다르미안으로 왕실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진짜’ 왕녀야. 어미가 왕비가 아니라 해도 그것만큼은 사실이지.”

“…….”

“그러니 다시는 ‘가짜’니 어쩌니 하는 말은 입에 담지 마. 너는 전하의 딸이야! 알겠니.”

“그럴게요.”

분명 억지였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의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자신조차 스스로를 ‘가짜’라고 생각했는데 낳아준 어미가 그것을 정면에서 부정해준 것이었다.

어머니의 그 말이 세리아나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생경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엘라이어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어머니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뭐니?”

“저와 같이 차이툰으로 가요.”

“뭐?”

“그곳에선 아무도 어머니를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도 어머니를 그, 그 별명으로 부르지 않을 거라고 맹세해요. 원하는 것은 제가 전부 구해드릴게요. 전 이제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머니…… 저와 같이 차이툰으로 가요.”

생활 방식이 달라 처음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리아나도 적응했으니 어머니 역시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며 안달하는 것보다 그편이 행복할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게 되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면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너무 먼 곳까지 생각하지 말자. 당장은 어머니와 함께 차이툰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쿠드라께서도 허락하셨어요. 어머니만…… 어머니만 그러겠다 하시면 이번 대륙회의를 끝내고 우리와 함께 차이툰으로 갈 수 있어요.”

“정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왜 그런 곳으로 가야 해?”

“그곳에선 어머니가 원하는 것 전부를 드릴 수 있어요.”

“전하는 안 계시잖니.”

“네?”

“그 모래땅에 내 전하는 안 계셔.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거니?”

예상하지 못한 엘라이어의 대답에 세리아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아 왕비의 자리를 욕심낸 것이 아니었나? 처음으로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텄다.

“어머니…… 왜 왕비가 되고 싶으신지 여쭤봐도 되나요?”

“뭘 새삼스럽게? 아아, 너도 내가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왕비 자리를 탐낸다고 생각하는구나?”

“…….”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라젠에서 여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그곳이니.”

태연한 얼굴로 빈 잔의 표면에 남은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엘라이어가 답했다.

“그 욕심이 없다고는 말 못 하지.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욕심이 있지.”

“뭔가요?”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당당하게 서고 싶은 것뿐이야.”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리아나의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어머니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탓에 세리아나는 진심으로 당황해 버렸다.

사랑이라니……. 어머니가 사랑 때문에 왕비 자리를 욕심냈다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분이 라젠 최고의 부를 움켜쥔 남자라서, 그리고 최고의 권력을 가진 남자라서, 단순히 그 이유로 내가 왕비의 자리를 탐낸다 생각하는 거니?”

“저는…….”

“물론 나는 그분이 움켜쥐고 있는 권력과 금은보화를 좋아해. 그런데 그게 뭐? 그것들 역시 내가 사랑하는 그분의 일부일 뿐이야.”

모든 사랑의 형태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 세리아나는 엘라이어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아주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

“너만 알고 있으렴. 내가 전하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분이 전하라는 사실을 몰랐단다.”

“네?”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엔 혼자서 집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웠던 남작 영애가 국왕 전하의 얼굴을 어찌 알았겠니? 다들 내가 작정하고 전하를 꼬셨다고 말하지만…… 막 성인이 된 귀족 영애가 꼬리를 쳐봤자 그게 코르티잔의 기술에 비할 바나 돼?”

“그럼…….”

“그래, 우습게도 말이야. 첫눈에 반했단다.”

진심으로 재미나다 여기는 듯 엘라이어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어린 소녀의 웃음소리 같았다.

“우습지? 난 어렸을 때도 욕심이 많은 아이였는데 그날 그 순간엔 첫눈에 반한 그 남자가 가난한 귀족 나부랭이였어도 상관없었어. 다행히 가난뱅이가 아니라 국왕 전하셨지만.”

목이 마른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 마시는 어머니가 낯설었다.

“너를 낳은 것도 그 때문이야. 어렸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지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으니까. 내가 좋지 못한 어미라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세리아나, 알아두렴.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야. 사랑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미워한 적은 없어.”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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