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세리아나와 엘라이어 (1)
대륙회의 이틀째 아침, 이른 시간부터 끈적하게 피부를 훑는 손길에 간신히 눈을 뜬 세리아나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바이샤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되었다.
반들반들하니 윤기가 흐르는 것 같은 그 얼굴에 불쑥 원망이 치솟은 세리아나가 이불을 끌어 얼굴을 가렸다.
“왜?”
“미워서요.”
“내가 뭘 잘못했나?”
“……어제요…….”
“어제?”
“그만……하라고 했는데……!”
“그랬나? 너무 작아서 안 들렸어.”
“너무해…….”
이불 속에 숨은 채 이번엔 몸까지 돌려버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바이샤가 난감한 듯 볼을 긁었다.
어젯밤 평소 시도해 보지 않았던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 보느라 조금 신이 나버린 게 문제였던 것 같았다.
‘평소보다 많이 울리기는 했지.’
마지막쯤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제발 끝내 달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같기도 하다’라는 건 그쯤의 기억이 반쯤은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흥분이 머리끝까지 올라선 그야말로 짐승처럼…… 조만간 방문을 두드릴 치아린의 분노가 슬쩍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오늘은 최대한 치아린의 눈치를 살펴야겠군.’
결혼 전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제 권위를 인정해 주던 치아린이었지만 자신이 섬길 주인이 생긴 이후 그녀는 가차 없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바이샤에게만.
‘카얀 앞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얌전하게 구는 것 같기는 했는데…… 하여간 불충한 신하라니까.’
치아린이 들었으면 신하가 아니라 라누아의 종이라 대답했을 법한 생각을 하며 이불째로 세리아나의 몸을 끌어안은 바이샤가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토라진 아내가 귀엽기는 했지만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쓸쓸한 일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용서해 줘.”
“……제게는 사과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오직 당신에게만 사과해. 말했잖아. 당신은 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못 믿겠으면 다시 확인을…….”
“아뇨! 아니에요!”
이불 속을 파고드는 엉큼한 손길에 화들짝 놀란 세리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이 정말로 힘들기는 했는지 이불을 꼭 움켜쥐고 엉덩이를 뒤로 슬쩍 빼는 세리아나의 눈가가 붉게 짓물러 있었다.
“치아린에게 혼나겠군.”
“네?”
“아니 혼잣말이야. 오늘 일정은 사냥이었던가?”
“네, 친목을 위한 사냥대회예요. 하지만 바이샤에겐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미리 살찐 사냥감을 풀어놓거든요.”
대륙회의의 절차는 첫째 날의 연회와 마지막 날의 회의만이 고정되어 있을 뿐 둘째 날의 일정은 각 나라의 재량으로 치러진다.
각 나라의 특성에 맞춰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그중 라젠이 선택한 것은 사냥이었다.
“……재미없겠군.”
“그래도 치열하다고 들었어요. 준비된 사냥감이라곤 해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요.”
세리아나는 대륙회의가 라젠에서 열리는 해엔 피오르 백작가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왕명으로 외출을 막기도 했고 그 왕명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어머니의 눈길을 피하려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이었다.
물론 술에 취한 어머니가 자신을 찾으면 끌려 나오는 모양새로 그녀 앞에 서야 하긴 했지만.
세리아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운을 가져오는 바이샤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이었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올랐을 때 사냥이 시작되고 해가 질쯤 끝나요.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거나 누가 봐도 큰 사냥감을 잡은 사람이 승자가 되는 거죠.”
“상품도 있나?”
“……트로피? 황금으로 만든 거라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정말로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짓을 하는군.”
“카디마의 경우엔 얼음낚시래요.”
“…….”
“라젠보다 먼저 대륙회의를 치르는 곳이 카디마거든요. 작년에 참석했던 롤센 남작가의 티파티 때 들은 이야기니까 확실할 거예요.”
“차라리 이쪽이 나은 것 같으니 이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세리아나에게 가운을 건네고 자신의 가운을 찾아 걸치며 긴 한숨을 내쉰 바이샤가 고개를 저었다.
백 년간 막아뒀던 문을 연 이후 이웃 나라들과 국교를 다지고자 참여한 첫 대륙회의였다.
그런데 이렇게 쓸모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었다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바이샤는 이번 대륙회의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돌아갈 생각이었다.
거기다 언제까지 모래사막 안에서만 살아갈 수 없기에 국가 간의 교류는 차이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도태될 수 없기에 이런 쓸데없는 짓도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같이 씻을까?”
“……정말 미워할 거예요.”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진심이 담긴 대답이 돌아와 머쓱해진 바이샤가 욕실 안으로 혼자 걸어 들어갔다.
세리아나에게 진심으로 미움받기 전에 시원한 물로 몸에 오른 열기를 씻어내야 했다.
바이샤의 예상처럼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시녀들과 함께 찾아온 치아린은 엄청나게 매서운 눈길로 그를 방에서 쫓아냈다.
어제의 자국에 더해 이번엔 잇자국까지 남은 세리아나의 하얀 피부를 보고 쏟아진 분노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분노를 터트리는 치아린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애써 외면하던 카얀이 보기 드물게 풀이 죽은 바이샤를 위로하며 방을 나선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주의해 주십사 간청했는데!”
“…….”
“오아시스의 궁에 있을 때보다도 심하잖아요! 거기다 잇자국이라니! 라누아! 왜 참고 있으셨어요!”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바이샤가 깨무는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세리아나는 분통을 터트리는 치아린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치아린은 세리아나가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오늘 준비한 옷이 몸을 전체로 감싸는 스타일이라 다행이지! 진짜 무슨 생각으로 허리에까지!”
저도 모르게 허리에 남은 잇자국과 붉은 흔적을 내려다본 세리아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대로 가만두었다간 라누아의 종이 쿠드라에게 덤벼드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흥분한 치아린의 손을 잡았다.
“진정해, 치아린.”
“그치만……!”
“치아린이 준비한 옷을 어서 입고 싶은데 도와줄래?”
“……라누아께선 정말, 정말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분명해요! 그런데 쿠드라는 이런 분께!”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정도로 팔불출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세리아나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치아린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이샤를 대하는 모습이 종종 선을 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 조마조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 치아린. 나는 정말 괜찮고 쿠드라께선 잘못하지 않았어.”
정말이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세리아나도 기뻤으니까.
“라누아…….”
“그러니까 어서 준비하자. 오늘은…… 어머니를 뵈어야 하니까.”
“네, 알겠어요. 오랜만에 어머님을 뵙는데 늦을 순 없지요.”
할 말이 잔뜩 남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라누아의 충실한 종답게 치아린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준비된 의상은 어제와 다르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으로만 준비되었다.
달라붙는 반팔 상의와 얇은 천을 겹겹이 쌓아 만든 바지는 어제의 붉은색 옷과 비슷했으나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얇게 뜬 레이스로 만든 베일로 그 위를 휘감은 것이 달랐다.
하얀 레이스 중간중간 금사와 은사로 포인트를 넣어 그냥 두어도 화려한 문양에 고급스러움을 더한 베일이 어깨 위에서부터 늘어져 허리를 한번 감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베일 하나가 머리 위에 더해졌다.
굵게 땋아 아래로 늘어트린 머리카락 위에 진주를 구슬처럼 꿰어 장식한 후 베일의 끝자락을 장식하고 있는 레이스가 이마를 살짝 가리도록 올려준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대부분 레이스로 뒤덮여 몸에 피어난 붉은 자국을 가리게 되자 비로소 안심한 치아린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 덕분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세리아나와 다른 시녀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오늘은 쿠드라와 따로 움직이실 거예요.”
세리아나의 양쪽 귀와 목에 두크란으로 만든 장신구를 걸고 마지막으로 양쪽 손목과 발목에 은을 가늘게 뽑아 만든 링 팔찌와 발찌를 여러 개 끼우며 치아린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본래 오늘은 라누아께서 참여하실 필요가 없는 행사였는걸요. 쿠드라께서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아 오시면 그때 얼굴을 비추시면 될 거예요.”
바이샤의 승리를 단언하는 치아린의 말에 세리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샤가 사냥으로 누군가에게 패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차이툰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인지라 그들은 그들의 쿠드라가 너무 많은 사냥감을 잡아 다른 이들의 사냥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단장을 마치고 느긋하게 이동한 세리아나는 라젠 측에서 내어준 천막 안에 자리를 잡았다.
폐궁을 내어줄 때와 마찬가지로 세리아나가 사용할 천막은 다른 나라의 주요 인물들이 사용하고 있는 천막과 꽤 많이 떨어진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이젠 화도 안 나네요.”
“조용해서 좋은걸.”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정말이야. 여기면 어머니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어머니의 이번 방문은 비공식적인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면 이편이 나았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를 배려해서 이 위치의 천막을 내어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인걸.’
물론 라젠의 왕이 그러한 배려를 해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해본 세리아나가 치아린이 정리해 준 의자에 앉았다.
사냥대회가 시작되고 시간이 꽤 흘렀으니 조만간 어머니가 도착할 것이다.
“긴장된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말이 무엇이었더라? 세리아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두 사람의 마지막은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어머니의 일방적인 투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직 백작 부인에 머무는 자신이 불쌍하지 않냐고 하셨었지?’
욕심이 많은 어머니였다.
분명 지금도 자신이 불쌍하다 여기고 있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그래도 조금은 어머니가 변했기를 기도하며 시녀가 가져온 냉차로 입을 축였다.
천막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가 사냥의 성공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가 사냥에 성공했나 봐.”
“네, 그런데 환호성이 너무 자주 들리는데요?”
“울타리가 쳐진 사냥터니까. 손님들을 위해 평소보다 많은 사냥감을 풀어뒀을 거야. 좁은 곳에 많은 짐승을 풀어뒀으니 끊임없이 환호성이 들리는 게 당연하지.”
“……그건 사냥이 아니잖아요.”
“라젠에선 그걸 사냥이라고 해.”
이해할 수 없어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치아린을 보며 세리아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젠과 차이툰 모두 사람이 사는 땅이었지만 사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그 차이를 단시간에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엘라이어가 도착한 것은 환호성이 다섯 번 정도 더 들려온 이후였다.
처음엔 사냥에 성공한 이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던 치아린이 그것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는 하니?”
“어머니.”
얼굴을 가린 로브의 후드를 벗으며 대뜸 불평부터 내뱉는 엘라이어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변했기를 바라던 세리아나의 작은 기대를 단번에 박살을 내버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세리아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은 얼굴로 엘라이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왕비씩이나 되어서 이런 취급이라니. 지내는 곳도 폐궁이라 하더구나?”
“왕비가 아니라 라누아…… 아니, 아니에요. 어머니는 여전하시네요. 다행이에요.”
“다행? 내가 아직도 왕비가 아닌데 다행이라니.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날 무시하는 거니?”
“그럴 리가요. 이쪽으로…… 여기에 앉으세요. 입고 있는 로브는 옆의 아이들이 받아줄 거예요.”
“당연한 것을 베푸는 것처럼 말하지 마.”
“……네.”
시집간 딸을 거의 반년 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엘라이어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리아나는 자신보다 먼저 의자에 앉아 천막 안을 살피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치아린과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엘라이어를 바라보던 치아린이 시녀들을 고갯짓으로 물렸다.
“다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러주세요, 라누아.”
“고마워.”
“그래도 왕비이니 특별한 것을 내어줄까 했더니 냉차에 퍽퍽해 보이는 쿠키라니. 네 취급은 거기서도 변함이 없는 것 같구나. 하긴 너나 나나 타고난 팔자가 다 그렇지 뭐.”
울컥하는 얼굴로 물러나는 치아린을 보며 한숨을 삼킨 세리아나가 엘라이어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다만 어머니를 바라보는 세리아나의 시선에 변화가 있었다.
어머니의 찬란한 금발은 여전했으나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얼굴은 세리아나의 눈에 더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숨이 끊어질 듯 조여 놓은 코르셋은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
“말해보렴, 세리아나. 들켰니?”
언제나 그러했듯 딸을 배려하지 않는 어미의 한마디가 세리아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