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9)
연회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온 세리아나는 첫날과 다르게 혼자 욕조 안에 들어와 있었다.
욕조 바닥 가득 깔린 작고 둥근 두크란이 발가락 사이에 파고드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응, 그런데 왜 또 두크란을 이렇게 가득 넣어둔 거야?”
“소독입니다.”
“소독?”
“네, 소독입니다. 정화라도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차이툰에서부터 따라온 시녀들과 함께 욕실 안에 들어와 있던 치아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체 무엇에 대한 소독이고 정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도 단호한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바이샤도 ‘소독’을 해야 한다느니 두크란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는 했었다.
‘전염병이 도는 건 아닐 텐데……?’
차이툰에선 수로에 두크란을 박아 깨끗한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두크란을 담근 물을 소독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세리아나가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두크란을 이만큼이나 사용한 목욕물이라니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첫날은 긴 여정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라 애써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다 싶어 세리아나는 괜히 발바닥으로 구슬처럼 작은 두크란을 굴려보았다.
“마사지가 준비되었습니다.”
“응.”
뜨거운 욕조에서 나온 세리아나가 대리석으로 만든 침상 위에 엎드려 누웠다.
대리석 위엔 도톰하고 커다란 타월이 미리 깔려 있어 불편함은 느낄 수 없었다.
향유가 몸 위에 뿌려지고 시녀들이 달라붙어 세리아나의 온몸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연회 내도록 긴장해 있느라 딱딱하게 뭉쳐 있던 근육들이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에 세리아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쿠드라께선 어디에 가신 거야?”
“라젠에 숨겨둔 세작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러 가셨어요.”
“……그걸 나한테 말해줘도 괜찮아?”
“라누아이신걸요. 당연히 괜찮지요.”
치아린이 늘상 해주던 말이었지만 오늘은 새삼 당연하다는 그녀의 말에 고마워졌다.
“그리고 심부름을 보냈던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오시겠다고 하셔?”
“네.”
“다행이다.”
대륙회의 기간엔 백작가에 묶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였기에 혹여 내일 사냥대회에 오지 못한다는 답이 올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순순히 오겠다는 답이 돌아온 것을 보니 라젠의 왕의 허락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비밀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어머니의 참석을 허락한 거겠지.’
어머니가 사냥대회에 참석하더라도 다른 귀족들과 어울릴 확률은 낮았다.
아마 세리아나가 머무는 천막에 들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세리아나는 오랜만에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되어 조금은 기뻤다.
‘결혼식 때 잠깐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날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낳아준 어미에 대한 그리움은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시면 모두를 물릴 수 있을까? 둘만 있으면 어머니도 대답이 쉬우실 거고.”
“차이툰에 오시려 하실까요?”
“잘 설득해 봐야지.”
몸의 앞부분까지 마사지를 전부 끝낸 세리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시녀들이 건넨 가운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가 화장대 앞의 의자에 앉자 치아린이 그녀의 젖은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따님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일이니까요. 거절하셔도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그럴게.”
치아린은 그녀가 가짜 왕녀라는 사실은 알아도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저런 걱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아나는 사랑은커녕 어머니의 욕심을 위해 이용만 당했다.
그럼에도 어미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세리아나가 그만큼 어미에 대한 정에 굶주렸다는 뜻이었다.
스스로가 애정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세리아나는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부디 그녀의 욕심을 건드려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욕심이 많은 어머니라면 두크란, 아니 블루워터를 보고 분명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벌써 목욕을 끝내셨나?”
“쿠드라, 다가오지 마세요. 라누아께선 지금 막 씻고 나오셨다구요!”
“내가 내 아내 곁으로 가겠다는 건데 왜…….”
“누가 말려요? 적어도 지금 라누아께서 씻고 나오셨으니 쿠드라께서도 씻고 나와 뭐든 하라는 뜻이에요!”
“……금방 돌아오지.”
세리아나가 욕실을 나온 타이밍에 맞춰 방 안으로 들어왔던 바이샤가 얌전히 욕실로 사라지자 방문 밖에 있던 카얀이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물론 세리아나에게 정중하게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한 이후였다.
“쿠드라께 너무 그러지 마.”
어쩐지 라젠에 온 이후 치아린의 잔소리가 더욱 심해진 것 같아 세리아나가 거울 너머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치아린은 당당했다.
오늘 아침 세리아나의 하얀 피부를 뒤덮었던 울긋불긋한 흔적들이 파란 멍으로 변한 걸 확인한 이후였다.
멍 자국을 최대한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원망이 바이샤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걱정 마세요, 라누아. 쿠드라께선 제 잔소리에 풀이 죽거나 반성을 하실 분이 아니시거든요.”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곁에 선 시녀에게 넘긴 치아린이 빗질을 시작했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관리로 건강해진 머리카락에 빗이 오갈 때마다 빛이 흘러 반짝거렸다.
“내가 하지.”
금방 나오겠다는 말을 지키듯 샤워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온 바이샤가 치아린으로부터 빗을 건네받았다.
아직 다 말리지 못한 그의 검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제가 닦아드릴게요.”
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치아린과 시녀들이 모두 물러간 이후였다.
아직 제 머리의 빗질이 끝나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길대로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맡긴 바이샤가 손에 들었던 빗을 내려놓으며 화장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작군.”
“네?”
“당신의 물건들은 전부 작아.”
“바이샤가 너무 큰 거예요.”
거울을 꽉 채운 바이샤의 모습에 살짝 미소지은 세리아나가 손을 신중히 움직이고 있었다.
취급이 좋지 못했다 하더라도 귀족의 여식으로 태어나 차이툰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여인이 된 세리아나였다.
다른 누군가를 시중드는 일에 익숙할 리 없는 그녀의 서툰 손길이 바이샤의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이제 말해줘.”
“네?”
“카디마의 여왕이 당신에게 제안한 게 뭐야?”
거울 속 세리아나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확인한 바이샤가 눈을 감았다.
여기서 곤란한 얼굴을 한 그의 아내를 보았다간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질문을 철회할지도 몰랐다.
그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그런 얼굴에 몹시도 약했다.
그러니 지금은 세리아나의 얼굴을 보아선 안 된다.
답을 들어야만 했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겼다 이후에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사양이었다.
“세리아나?”
“그게…… 카디마로 오지 않겠냐고…….”
“……뭐?”
“제가 사생아고 가짜 왕녀라는 걸 이미 아는 듯했어요.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니…… 그때에 카디마로 오라고…….”
“미친 늙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바이샤가 이를 갈았다.
그 자리에서 늙은 여왕의 멱살 드잡이라도 한번 해줘야 했는데! 분개하며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한 바이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 한 발짝 물러난 세리아나는 그것마저 자신의 잘못인 거 같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뭐?”
“저 때문에 괜히…….”
“지금 여기서 당신이 내게 사과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데 나한테 설명을 좀 해주겠어?”
“화내고 계시잖아요.”
“그 미친, 아니 망할 늙은이 때문이지.”
“카디마의 여왕님이 제게 한 제안 때문이잖아요. 제가…… 가짜가 아니었다면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장담하는데 그 늙은이는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똑같은 제안을 했을 거야. 결혼한 이후에 만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납치라도 불사했을걸?”
“네? 그건 좀 억지…….”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어쨌든 확실한 건 여기서 당신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
카디마의 여왕이 지내고 있을 비체라온 궁이 있는 방향으로 세리아나 모르게 온갖 욕을 뱉던 바이샤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좀 전보다는 한껏 누그러진 얼굴이었으나 불만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당신은 왜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을 사과하는 거지?”
연회가 열리는 펄킨 홀에 처음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 지금처럼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었다.
답답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제 것이 아닌 주변의 허물까지 덮어쓰려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아 바이샤의 눈길이 조금 사나워졌다.
“벌을 주려 했는데…… 방법을 바꿔야겠군.”
“네?”
“당신이 계속 사과하는 건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무슨, 자, 잠시만 바이샤!”
세리아나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몸을 덥썩 끌어안아 들어 올린 바이샤의 걸음이 곧장 침대로 향했다.
간지럽지도 않은 버둥거림에 그녀가 입고 있던 가운의 허리끈이 느슨해졌고 그때까지도 손에 들려 있던 타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오늘 당신의 위치가 어떤 건지 제대로 알려주지.”
“위, 위치요?”
“그래.”
그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 번 더 질문하려던 세리아나의 입술이 막혔다.
뱉어내려던 말 대신 바이샤의 뜨거운 숨을 삼킨 세리아나는 등 뒤에 닿는 폭신한 침구의 느낌보다도 그녀의 몸을 쓰다듬는 그의 뜨거운 손길을 먼저 느꼈다.
두 사람의 숨결이 엉키듯 세리아나의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바이샤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이불 위에 흐트러져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쯤 바이샤의 입술이 떨어졌다.
가쁜 호흡을 내쉬는 세리아나의 입술과 떨어지기 아쉬운 듯 바이샤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리고 몸이 뒤집혔다.
세리아나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바이샤의 가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바, 바이샤!”
순식간에 그의 허리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되어버린 세리아나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은 바이샤의 손길 때문에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베개를 겹겹이 쌓은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댄 그는 웃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아니, 잠시만…… 잠시만요! 내려줘요!”
“차이툰의 쿠드라를 내려볼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야.”
“알았으니까 제발!”
“아니, 당신은 몰라.”
바이샤의 허리 위에서 내려가기 위해 애쓰던 세리아나는 진지한 얼굴로 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버둥거림을 멈췄다.
장난기 하나 없는 호박색 눈동자가 세리아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 쿠드라를 지상으로 이끈 여신, 인간을 위해 눈물을 흘려준 첫 번째 여왕, 그게 바로 라누아, 당신이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라누아를 신과 소통하는 신녀이자 쿠드라의 아내로 인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모래땅에 신들이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는 달랐다.
헬라임이 가장 사랑하는 첫 번째 자식.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았다.
차이툰에선 첫 번째 자식이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법칙이었고 그것은 곧 헬라임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이가 라누아라는 뜻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눈에 보이는 검이 더 무서운 법이지. 그래서 다들 잊고 있는 것뿐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 자비보다 눈에 보이는 칼날이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라누아가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쿠드라와 라누아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도 사람들은 은연중에 쿠드라의 아래에 라누아가 있다고 착각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를 턱 끝으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야. 그러니 당신을 낮추지 마.”
“네…….”
“전에도 그렇게 답했지. 그러고선 오늘도 내게 두 번이나 사과했고. 못 믿겠어.”
“어떻게 하면 믿으시겠어요?”
“당신이 해.”
“네?”
“오늘 밤은 당신이 해보라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 원하는 대로.”
잠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리아나는 엉덩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단단한 무엇인가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바이샤가 아직 걸치고 있는 샤워가운을 가운데 두고 느껴지는 노골적인 감각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부끄러워진 것이다.
“당신이 내키는 대로 해. 부드러워도 좋고 거칠어도 상관없어. 나는 오늘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일 테니까.”
다시 장난기가 돌기 시작하는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리아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으로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인지 아니면 흥분으로 몸이 바짝 달아오른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를 느리게 오고 가며 쓰다듬는 바이샤의 커다란 손이 세리아나의 긴장과 흥분을 부추겼다.
“해봐.”
이건 벌이 맞았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세리아나가 함부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뱉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은 세리아나의 떨리는 손끝이 바이샤가 걸친 가운의 허리끈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