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8)
“미라스 님, 여기는 카디마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귀빈들도 함께하는 자리이니 그쯤에서 멈추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바이샤와 미라스의 대치가 길어진다 싶을 때쯤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움직였다.
미라스와 마찬가지로 하얀 옷에 늑대의 모피를 두른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시선 끝에 서 있었다.
춤을 추기 전 첫 만남에 미라스의 음주를 만류했던 사내가 그였음을 알아차린 세리아나가 살짝 호기심을 드러내자 바이샤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세리아나의 시선을 돌렸다.
“키륜, 잔소리가 날로 심해지는구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가면 갈수록 딱딱해지고.”
“…….”
“처음 만났을 땐 제법 귀여웠는데 말이야.”
미라스의 입에서 ‘처음’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키륜이라 불린 남자가 작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았음에도 미라스는 별다른 내색 없이 허리에 매단 가죽 주머니의 뚜껑을 열고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제 술잔을 찾는 모양이었다.
“내 잔은?”
“술은 그만두시죠.”
“연회에 술이 빠지면 쓰나.”
툭 하니 말을 던진 미라스가 술이 든 가죽 주머니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 술을 벌컥벌컥 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키륜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리아나는 카디마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륜이라는 남자는 미라스의 신하인 걸까? 신하라고 하기엔 자신의 여왕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너무도 차가웠다.
“차이툰의 쿠드라와 라누아께 대신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연달아 술을 삼키는 미라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키륜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사과해 왔다.
세리아나가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한 바이샤를 대신해 그 인사를 받았다.
“사과는 받아들일 테니 그만 고개를 들라.”
“감사합니다, 라누아.”
세리아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대에 바이샤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왜 화를 냈는지도 모르겠지만 왜 바이샤의 기분이 풀어진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키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바이샤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륜의 사과를 받아 달라는 부탁을 담은 눈빛에 바이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라누아께서 용서하신다니 나 역시도 그리하지.”
“감사합니다, 쿠드라.”
“자제할 줄 모르는 여왕을 섬기느라 고생이 많군.”
“섬겨야 하는 분이니 따를 뿐입니다.”
듣기에 따라 자신이 섬기는 왕에게 상당히 무례할 수도 있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미라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덤덤한 얼굴로 비어버린 가죽 주머니를 허리에 다시 차고 있을 뿐이었다.
“차이툰의 두 왕과 지나치게 오래 한자리에 머물고 계십니다, 미라스 님.”
“내가 내 시간을 어찌 보내든 무엇이 문제라고.”
“사적인 자리가 아니니까요. 차이툰의 두 분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미라스 님을 모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누가 보면 키륜 네가 차이툰의 신하라 생각하겠구나. 내게도 그런 예의를 보여라.”
“미라스 님께서 실수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리 공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귀엽지 않은 녀석.”
“…….”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는 키륜과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미라스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조금은 우스워져 세리아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미라스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입을 열려 했지만 사나운 기세를 숨기지 않는 바이샤와 그녀 앞으로 나서 시야를 막아 버리는 키륜 때문에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순 없었다.
“너희의 여왕을 데려가는 게 좋겠다.”
“……이 무례는 어떤 식으로든 갚겠습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는 것이 그 답이다.”
“네.”
낮게 으르렁거리며 답하는 바이샤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인 키륜이 몸을 돌려 미라스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많은 시선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 중에는 라젠 국왕의 눈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자리에 미라스와 바이샤, 그리고 세리아나가 중심이 되어 모두의 시선을 모으고 있으니 그 눈길이 좋을 리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미라스는 짧게 혀를 차며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미라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키륜도 바이샤와 세리아나를 향해 아주 잠깐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그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나는 미라스의 뒷모습에 세리아나가 긴 한숨을 내쉬던 그때, 그녀를 제외한 세 사람의 눈빛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내가 잘못 보았나?’
‘아닙니다, 분명 라누아를 찾아오겠다 말했습니다.’
‘그 여왕에 그 신하인가요? 감히 우리 라누아께 밀어를 남겨?’
세리아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술을 작게 움직여 대화를 주고받은 그들의 눈동자가 멀리 카디마의 다른 귀족들과 함께 서 있는 키륜의 뒤통수에 닿았다.
‘라누아께 전할까요?’
작게 속삭이는 치아린의 말에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고 있는 바이샤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욕심대로라면 죽는 날까지 이렇게 제 품 안에서 보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바이샤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치아린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라누아께서 원치 않으시면 막되 그 외엔 라누아의 보호를 위해서만 움직여라.’
자신이 나설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림자들도 완벽하게 몸을 숨기고 있고 치아린도 있으니 세리아나가 다칠 리는 없다.
비밀스러운 손님을 맞이하든 안 하든 그 판단은 모두 세리아나가 해야 할 일이었다.
“저 망할 늙은이가…….”
세리아나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지금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계속 그의 아내를 바라보며 눈을 번뜩이는 늙은이를 경계하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바이샤는 카디마의 여왕에게서 몸을 돌려 그녀의 시야에서 세리아나를 감췄다.
제 몸이 크고 세리아나의 몸이 작아 등을 진 자세에선 그녀의 옷자락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카디마의 늙은이가 무슨 제안을 했지?”
“아, 그게…….”
“여기서 말하기 어려운가?”
“…….”
“그런 거라면 나중에 방으로 돌아가 듣지. 하지만 앞으로 저 여자 근처에는 가지 마. 직접 보니 속을 더 알 수 없는 늙은이 같으니까.”
“네.”
바이샤는 아직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세리아나를 품에 안은 채 미라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늙은이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세리아나를 훑는 것이 몹시도 기분이 나빴다.
‘단순한 수집 욕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접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인간이야.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아.’
얼음 여왕이 그의 아내에게 무슨 제안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그에겐 절대로 이롭지 않을 제안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카디마의 여왕은 카디마에 숨겨둔 세작이 정기적으로 올리는 보고서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상대하는 것이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덤벼보라며 웃어주겠지만 여왕이 상대하고자 하는 이가 세리아나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군.’
대륙회의의 공식적인 일정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남은 기간, 세리아나 주변의 경계를 더욱 철저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바이샤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쿠드라께서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우리의 왕께선 본래 무서운 분이시니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멀리서 쿠드라와 라누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자라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서 두르히가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은 다른 나라의 귀족들과 섞여 정보를 모으는 데 여념이 없는 차이툰의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홀의 가장자리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쿠드라 곁에 있을 걸 그랬네요. 쿠드라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으니 얼마나 쾌적하겠어요.”
“무리입니다. 치아린 님 곁에 가면 제 심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뛰니까요.”
“……두르히 님, 제발 부탁하는데 그런 말을 할 때만이라도 그 무표정한 얼굴 좀 어떻게 안 되나요? 말과 얼굴의 온도 차가 너무 심해요.”
“못 들은 척하시면 됩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아니 그런데 언제까지 너한테 님, 님 거리면서 아양을 떨어야 하는 거야?”
“격식 있는 자리에선 격식을 갖추자고 먼저 제안한 건 너였다.”
“……취소. 소름이 돋아서 못 해 먹겠네.”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제대로 하십시오, 자라하 님.”
딱딱한 두르히의 대답에 자라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라옴의 족장인 히아스도 그러했지만 그의 아들인 두르히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봐야 도돌이표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자라하가 조금 전의 주제로 말꼬리를 돌렸다.
“두르히 님이 힘드시다면 저만이라도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요.”
“치아린 님께서 자라하 님과 아눌라 님의 주변 깊게 살피라 하셨다. 중재할 사람이 없는 타국에서 시카와 바라의 후계자들이 싸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역시 무리다.
자라하는 고개를 저었다.
동무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일부를 공유하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이렇게 격식을 갖춰 말하려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는 듯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붙어 있겠다고? 아눌라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이곳에서 싸울 마음은 없어.”
“너는 그럴지 몰라도 아눌라는 모르지. 그리고…… 걸어오는 싸움을 바라의 자라하가 피할 리도 없으니 치아린 님의 말씀처럼 살펴보는 수밖에.”
“아눌라도 시카의 후계자야. 그렇게 멍청한 일을 할 리가 없지.”
두르히의 말에 콧방귀를 뀐 자라하가 홀 안쪽으로 눈을 돌려 라젠의 귀족들과 어울리고 있는 아눌라를 바라보았다.
무슨 속셈인지 평소 이를 갈던 라젠의 귀족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함을 넘어 불길하게 보였다면 과민한 반응일까? 두르히랑 대화하느라 잠시 흥분했던 자라하가 평소의 차가운 표정을 되찾았다.
“이상한데…….”
“무엇이?”
“아눌라. 언제부터 라젠의 귀족들에게 호의를 보였지?”
“평소의 아눌라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긴 하군.”
세리아나에 대한 적개심만큼이나 라젠에 대한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아눌라가 스스로 라젠의 귀족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은 이상했다.
타국의 귀족들과 관계를 다지는 것은 크게는 부족의 후계자가 지닌 의무였고 작게는 유랑부족으로 크고 작은 정보를 모아 살아남았던 시카의 본능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눌라가 시카의 후계자로 그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엔 평소의 행실이 걸렸다.
“아눌라에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동행한다면 기꺼이 움직여 주지.”
“너도 아눌라를 싫어했던가?”
“싫어한다기보다는 생리적인 혐오에 가깝다. 칼 대신 혀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이는 믿을 수 없으니까.”
“그런 소릴 그런 얼굴로 하니 정말 이상하다.”
“……그런 것치고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웃고 있군.”
두르히는 자신만큼이나 냉정한 자라하가 유독 아눌라에게 만큼은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라하와 슈라의 사이가 어떠했는지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 때문에 이번 여행길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차이툰으로 돌아가는 길도 라젠으로 향하는 길만큼 힘들 거라고 생각하니 답지 않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눌라가 라젠의 귀족들 사이에서 얻을 만한 정보라고 하면 라누아에 관한 것이겠군.”
“약점이라도 잡으려 하는 건가? 의미 없는 짓을 잘도 하네.”
헬라임의 제단에 라누아로 오른 이상 그 누구도 세리아나를 흠집 낼 수 없다.
신의 자식에게 감히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라하는 쓸모없는 짓을 하는 아눌라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아눌라가 비위 좋게 웃고 있는 모습만 보아도 속이 뒤틀렸다.
거기다 이 연회장의 반 이상을 채운 라젠의 귀족들은 구역질이 났다.
“따라와. 네 심장이 어떻게 되든 나는 귀찮은 인간들을 피해야겠어.”
“자, 잠깐……!”
“잠깐이고 뭐고. 당장 따라오지 않으면 차이툰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눌라와 찰싹 붙어서 네 신경을 긁어버릴 거야.”
“……제 살을 깎아 먹는 방법으로 날 협박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으로 해석해.”
멀리서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일련의 귀족 무리를 보며 자라하가 이를 갈았다.
귀족 영식으로 보이는 이들의 시선이 공기 중에 드러난 제 피부를 노골적으로 훑고 있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짐승들과 어울릴 생각 없어.”
“……알았으니 그만 잡아당겨라. 치아린 님 앞에 의복을 흐트러트린 채 설 순 없어.”
“움직이면서 정리해.”
자라하와 두르히 사이의 크지 않은 소란을 신경 쓰는 사람은 몇 없었다.
라젠의 귀족들 사이에 끼어 대화를 주고받던 아눌라도 슬쩍 시선을 한번 던졌다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노골적인 감시의 시선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그녀가 드디어 제 목적을 위해 움직일 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