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48화 (48/110)

#48.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7)

“이리 놀랄 것까지야.”

“……무슨 답을 듣고 싶으신 건가요?”

“딱히? 이제껏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몸이 약한 왕녀. 거기에 숨겨진 속사정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지.”

세리아나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라젠의 왕은 ‘몸이 약해’ 이제껏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왕녀’가 차이툰의 왕비가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왕실 사정에 무지한 천민들도 믿지 않을 거짓말로 주변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

실로 멍청한 ‘수작질’이었다.

“라누아께서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지 않아도 내일이면 전부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아시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입이 아주 가벼워서 말이야.”

안다.

그래서 세리아나도 라젠으로 오기 전 자신의 거짓을 바이샤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빠른 템포의 곡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올랐던 열이 단번에 식어 내리는 느낌에 세리아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는 것을 쿠드라가 모를 리는 없고.”

“…….”

“뭐 알더라도 라누아를 내칠 것 같지는 않으니…… 나는 그냥 제안만 던져두기로 할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카디마로 오시는 게 어떠한가?”

“무슨……?”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름다운 것을 아끼거든. 근래에 라누아만큼 아름다운 분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꼭 내 궁에 모시고 싶군. 아주 오래도록.”

미라스를 조심하라던 바이샤의 말이 떠올랐다.

이 얼음 여왕은 자신의 컬렉션에 세리아나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제안에 세리아나가 당황한 것을 알아차린 듯 미라스가 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어떨지는 몰라도 사생아를 왕녀라 속여 시집보낸 것에 나중에라도 쿠드라가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당장 따지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땐 고민 말고 카디마로 오시게. 내 라누아를 아주 귀하게 모시지.”

미라스가 웃는 얼굴로 세리아나에게 제안을 하는 동안 바이샤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저 미친 늙은이가 제 아내를 낚아채 춤을 추고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춤이 끝나기 전에 라누아를 모셨다간 라누아께도 좋지 못하니 참으십시오.”

“알고 있다.”

“……네.”

이런 말을 제 주인에게 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것을 빼앗긴 열 살 어린아이처럼 부루퉁한 얼굴이다.

카얀은 그렇게 생각하며 또 한 명,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을 달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치아린. 상대는 카디마의 여왕이야.”

“알고 있어요, 내 사랑. 그래서 지금 참고 있잖아요?”

자신은 보지도 않고 미라스를 노려보는 치아린의 모습에 카얀이 한숨을 삼켰다.

상대가 왕족이 아니었다면 무슨 사고를 쳐도 진작에 쳤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버터나이프는 어디에서 가져온 거야.”

“혹시 몰라 챙겼죠. 지금이 그 혹시 모를 상황인 거 같은데 카얀, 내 사랑. 당신 생각은 어때요?”

“치아린, 제발…….”

“저 망할 여자가 라누아의 허리를 더듬잖아요, 지금!”

“본래 그런 춤이야.”

“본래 그런 춤이 어디 있어요! 쿠드라! 이번 한 번은 쿠드라의 명을 따를 테니 지금 속에 쌓아 두신 것을 이 치아린에게 명하세요!”

“제법 구미가 당기는군.”

“쿠드라, 주변의 눈도 조금은 의식하셔야 합니다.”

“내 라누아께서 저 미친 늙은이 때문에 넘어질 뻔하셨다.”

“그걸 카디마의 여왕께서 잡아주지 않으셨습니까.”

“내 라누아의 손을 지나치게 오래 잡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하아…… 모르겠습니다. 두 분 알아서 하시길.”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카얀은 왕의 안색을 살피는 차이툰의 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특별히 아낀다는 걸 차이툰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 얼음 여왕이 치근덕거리는 꼴을 보며 이쪽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도 피곤하시겠군.”

카얀은 춤이 절정에 오를수록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카디마의 여왕이 세리아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입술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으련만 이상할 정도로 이쪽을 등진 자세로 춤추기를 고수하는 여왕 덕분에 카얀은 두 사람, 정확히는 미라스가 세리아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카디마에 심어둔 이들과 연락을 해봐야겠군.”

감이 좋지 않았다.

라젠보다도 먼저 심어둔 카디마의 세작은 자리를 충분히 잡았으니 궁 안의 사정도 충분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쿠드라 보셨어요? 저 여자가 지금 라누아의 등을 손으로 쓸었어요!”

“소독이 필요하겠어. 오늘 밤도 욕조 가득 두크란을 채워둬라.”

……일단 지금은 카디마에 심어둔 세작보다 이쪽이 문제였다.

“카디마 여왕의 손길에 두크란의 정화가 필요할 만큼의 불결한 것이 묻어나지는 않습니다.”

한숨이 섞인 말을 뱉은 카얀은 왜 아직도 곡이 끝나지 않는 것일까? 생각하며 죄 없는 궁정악사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제 주인과 연인을 원망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쿠드라. 연회는 즐기고 계십니까?”

설상가상, 곡도 끝나지 않았는데 존재만으로도 바이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이가 웃는 낯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바이샤가 살기를 거둔 틈을 노려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설마 이 자리에선 자신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움직인 것일까? 카얀은 진심으로 저 머저리 같은 사내를 연회장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바이샤의 얼굴을 살폈다.

“구어슨 백작……인가?”

“기억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대를 잊을 수 있을 리 없지.”

카얀은 마음속으로 헬라임의 이름을 부르며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주인이 저 눈치 없고 모자란 남자의 목을 뽑지 않게 해달라 기도했다.

다른 자리에서라면 상관없겠지만 여기는 다른 나라의 왕족도 함께하고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라젠의 귀족을 죽였다간 뒤처리가 귀찮아진다.

카얀은 제발 그의 주인에게 인내가 남아 있기를 기도했다.

“소란한 연회지요?”

“그렇군.”

“매번 대륙회의 때마다 이런 연회가 벌어진답니다. 조만간 차이툰의 순서도 돌아오겠군요. 아직 차이툰의 연회를 본 적이 없는지라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라젠의 사신단 일행을 연회도 없이 쫓아버린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분명한 구어슨 백작의 말에 바이샤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런 바이샤의 모습에 제 속을 들킨 것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 구어슨 백작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흠흠, 그나저나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라누아의 옷 말입니다. 너무 과해서요.”

구어슨 백작의 눈이 홀 가운데서 춤추고 있는 세리아나를 훑어내렸다.

타이트한 상의 아래 드러난 몸의 부드러운 곡선과 움직일 때마다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허리를 노골적으로 훑는 그 모습에 치아린이 다시 버터나이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카얀이 제때에 말리지 않았다면 분명 구어슨 백작의 경동맥을 노리며 날아갔을 것이다.

“무희들이나 입을 법한 옷이 아닙니까? 음흉한 눈으로 보는 사내들도 많이 있습니다. 쿠드라께서 단속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 물론 저는 그런 사내가 아닙니다, 하하하.”

라젠에서 여인은 홀로 설 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혼 전에는 아비의 소유였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남편이 죽는다면 아들의 법을 따르는 그런 존재.

그래서 구어슨 백작의 말은 라젠의 귀족들 사이에선 평범한 인사치레와 같은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구어슨 백작이 말을 건넨 상대가 라젠의 누군가가 아닌 차이툰의 쿠드라, 바이샤라는 점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 그야 당연히…….”

“내 라누아께서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에 내가 왜 ‘단속’해야 하나?”

“아니, 그것이…… 주변 시선이란 게…….”

“우습지도 않군.”

음악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이샤는 구어슨 백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세리아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무엇에 놀란 것인지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라누아께선 원하시는 대로 옷을 고르실 것이고 그 옷을 입고 어디든 걸음 하실 것이다. 그런 라누아를 음흉하게 훑는 눈이 있다면 그 눈알을 뽑아버리는 것이 옳지 않나? 그쪽이 더 쉽기도 하고 말이야.”

“……네, 네?”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이 죄인가 아니면 여인의 옷차림에 이유를 두고 희롱하는 것이 죄인가?”

길게만 느껴지던 연주가 끝났다.

미라스와 마주 보고 마무리 인사를 하는 세리아나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잠깐 구어슨 백작 곁에 멈춰선 바이샤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니 눈알 간수 잘해. 당장 뽑아버리고 싶은 걸 참아주는 중이니.”

“히익!”

바이샤의 마지막 작은 목소리는 구어슨 백작의 귀에만 닿았다.

순식간에 몸을 짓누른 짙은 살기에 구어슨 백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저앉지 않은 것은 용한 일이었으나 실금을 한 듯 그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이샤는 그의 그런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성큼 발을 옮겼다.

탐나는 보석을 바라보는 듯 눈을 반짝이는 빌어먹을 늙은이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아내를 구해야만 했다.

“내 라누아 곁에서 떨어져. 망할 늙은이!”

“쿠드라께서 뿔이 잔뜩 나셨군.”

바이샤가 내민 손을 잡고 그의 곁에 선 세리아나는 잔뜩 긴장해 굳어 있던 몸이 이제야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스의 제안에 세리아나는 끝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 차이툰을 떠나 카디마로 향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바이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사랑은 하고자 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고 하지 않겠다 막아도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문제였으나 그녀는 바이샤에게 라누아로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이다.

존중과 배려는 사랑이 아니다.

바이샤를 사랑하는 세리아나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바이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난…….’

차이툰은 일부일처의 국가다.

이혼은 허락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세리아나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비켜줄 필요도, 떠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기쁨을 알아버린 세리아나가 바이샤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고통을 선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세리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바이샤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닿은 부드러운 손길과 상반되는 사나운 미소지으며 미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저 늙은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원인 제공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적대하기에 충분했다.

“내 라누아께 무슨 짓을 한 거지?”

“춤을 췄을 뿐이네만?”

“그 목을 비틀어야만 제대로 된 말을 할 텐가?”

“무섭기도 하여라. 나는 그냥 라누아를 위해 간단한 제안을 하나 했을 뿐이야. 비밀도 아니니 정 궁금하면 라누아께 직접 물어보시게.”

카디마의 여왕과 차이툰의 왕 사이의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느낀 것인지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쏠려 있었다.

그 눈빛에 불편함을 느끼며 고개를 든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거친 얼굴을 한 바이샤가 거기에 있었다.

‘바이샤의 이런 얼굴 처음 봐……. 그런데 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

지금은 코앞에 닥친 이 상황을 고민하고 새로 떠오른 의문을 해결해야 했다.

아무리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바이샤가 자신을 해할 리 없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세리아나는 날카로워진 주변의 공기를 신경 쓰지 않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바이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후 지금 이 모습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거울! 그래, 거울이 보여준 모습이야!’

차이툰을 떠나던 날 그녀를 잠 못 이루게 했던 장면이었다.

혹시나 바이샤에게 문제라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 계속해서 걱정했었다.

하지만 거울이 보여준 순간이 지금이라면…… 이젠 안심해도 될 것이다.

적어도 바이샤를 향해 다른 이의 칼끝이 향해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다행이다.’

세리아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누군가 바이샤를 향해 칼을 겨눈 것도 아니었고 험한 말을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카디마의 여왕이 제 마음대로 세리아나와 춤을 춰 화가 난 것뿐이다.

고작 춤 한 번에 바이샤가 이만큼 화를 내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 무슨 계획이 있을 거라 믿으며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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