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47화 (47/110)

#47.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6)

눈으로 뒤덮인 대지의 카디마는 대대로 여왕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였다.

차이툰과는 대륙의 정 반대편에 있는지라 백 년 전에도 이렇다 할 교류는 없었던 곳.

그런데 그 여왕이 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바이샤와 세리아나를 살피고 있었다.

“소개를 받고 싶은데?”

“입장했을 때 들었을 텐데?”

“직접 소개하는 것은 다르지. 내가 쿠드라라 부를 수는 없지 않나?”

“사막의 백성이 아닌 자가 불러봐야 아무런 경애도 담겨 있지 않을 테니 그냥 쿠드라라 불러라. 내 이름은 내 라누아께만 허락되어 있으니.”

오늘 처음 보는 사이가 맞을 텐데 제법 날카롭게 오고 가는 대화에 세리아나는 당황했다.

아니, 날이 선 것은 바이샤뿐인 것 같았다.

세리아나는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은 후 주물 잔을 들어 입 안에 술을 털어 넣는 카디마의 여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이분은 라누아라 불러야겠군.”

“당연하다.”

“세리아나 쿤 라누아입니다. 카디마의 여왕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세리아나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미라스의 눈동자에 잠시 호기심과 욕심이 스쳐 지나갔다.

“사막의 여왕께서 이리 아름다울 줄 몰랐군. 한 잔, 어떠신지?”

“카디마의 독주를 초면에 권하다니. 제정신인가?”

“귀한 술이라 함께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하는군.”

미라스가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답했다.

라젠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의 술잔은 아마도 그녀가 직접 가지고 온 것인 듯했다.

가죽 주머니의 뚜껑을 단단히 막고 허리에 찬 그녀가 술잔을 가득 채운 술로 입을 축였다.

“우리 카디마에선 열 살짜리 어린아이도 술을 마시지.”

“체온 유지를 위해서군요.”

“오, 알고 계시는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술을 빚는다고 쓰여 있더군요.”

세리아나의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미라스가 또 한 번 호쾌하게 술잔을 비웠다.

가득 담겼던 술이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다시 술잔을 채우려던 그녀는 빠르게 다가와 그것을 만류하는 일행의 손길에 아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라누아께서 술에 관심을 보이시니 좋은 놈으로 한 동이 보내드리지. 비체라온 궁 어디에 묵으시는가?”

“아, 우리는…….”

“내 라누아께선 술을 즐기지 않는다.”

세리아나의 몸을 가볍게 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긴 바이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경고하는 그 목소리에 미라스가 심술궂은 웃음을 흘렸다.

“언제 시간을 내어 라누아께 술맛을 알려드려야겠군.”

“거절한다.”

“나는 라누아께 청할 생각인데 쿠드라께서 왜 나서시나?”

“내 라누아를 대신해 답한 거다.”

“차이툰에서 라누아와 쿠드라의 영역은 완전히 다르지 않나? 백 년 사이 변화라도 있었던가? 아니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라누아께서도 말을 할 수 있는데 왜 쿠드라가 답을 대신하지?”

점점 높아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굴리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닮았네요.”

“응? 누가?”

음료가 담긴 잔을 가져와 세리아나의 손에 쥐여준 치아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치아린이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카디마의 여왕과 우리 쿠드라께서 성격이 좀…… 닮은 것 같아서요.”

“성격?”

“무언가 빌미를 잡으면 집요하게 그 부분만 물고 늘어져 듣는 사람 속을 뒤집는 성격이요.”

“…….”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면 슬퍼요, 라누아. 전 제 주인께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리아나를 향해 우는 척 눈가를 닦아낸 치아린은 바이샤의 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순진한 주인을 향해 말했다.

“우리의 쿠드라께선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신걸요.”

“쿠드라께선 높은 자리에 계시니 마냥 좋은 사람으로는 있을 수 없어.”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라누아께선 쿠드라를 너무 좋아해서 문제예요.”

요즘 치아린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바이샤를 좋아하는 게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알 리 없는 세리아나는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미라스와 바이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치아린 말처럼…… 조금 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해. 닮은 사람들끼리는 다투는 일이 많다던데 그래서 그런 걸까?’

미라스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바이샤를 상대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세리아나는 카디마의 얼음 여왕이 그녀의 상상보다도 더 강한 사람일 것이라 짐작했다.

“사막의 왕께선 꽤나 혈기가 넘치시는군.”

“얼음 여왕께선 처음 만나는 이를 도발하는 우습지도 않은 취미가 있으시고.”

“나는 꽤나 즐겁다만?”

“고약한 늙은이로군. 그런 취미로 허한 마음을 달래시나?”

그 순간 여유롭기만 하던 미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 바이샤의 입꼬리가 올라간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대들이 우리를 아는 만큼 우리도 그대들을 알고 있지.”

“……늙은이를 놀라게 하는 몹쓸 재주를 가지고 있군.”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미라스가 이죽거렸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와 동년배로 보이는 그녀를 그가 왜 늙은이라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카디마에선 나이를 셈하는 법이 다른 걸까? 새로운 종류의 의문이 피어오를 때쯤 드디어 라젠의 왕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 전하 드십니다!”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왕비와 그의 자식들이 따랐다.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모습의 왕족들을 보며 세리아나는 자꾸만 그들을 외면하려는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누구도 그녀를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하라는 바이샤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나는 차이툰의 라누아야.’

라젠에서 그녀가 무엇이었든 지금 그녀는 바이샤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세리아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선 안 됐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소. 준비한 것은 얼마 되지 않으나 머무는 동안 충분히 즐기다 가시길 바라오.”

거짓말이다.

펄킨 홀을 가득 채운 사치품은 어지간한 예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다 준비한 음식들의 수준만 보아도 라젠의 왕이 이번 대륙회의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해 주었다.

이런 과시는 다른 나라에서도 줄곧 해오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펄킨 홀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확인하며 만족스럽게 미소지은 라젠의 왕이 홀의 가장 상석에 있는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제 식솔들을 부리는 사람처럼 제 주위에 세운 라젠의 왕은 궁정 악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왕족의 입장과 함께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 홀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첫 춤은 라젠의 왕세자와 왕녀가 선보였다.

“고약한 취미군.”

왕비를 시녀처럼 제 곁에 세우고 왕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라젠의 왕을 바라보던 바이샤가 말했다.

홀 안의 모든 사람을 제 아랫사람처럼 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 목소리가 조금 사나워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얼굴을 살폈다.

“차이툰의 쿠드라는 처음 보는 꼴이겠군.”

“저걸 참아 주고 있는 건가?”

“제 땅에서 주인 행세를 좀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도 순번을 돌아가며 하는 회의라 매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야.”

“참 쓸데없는 짓을 하고들 있군. 백 년 사이에 없어질 법도 한 회의인데 말이지.”

“이것으로 대륙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네.”

“평화? 내 눈엔 얕은 수작질로 밖에는 안 보이는군.”

“정치에는 가끔 그 빤한 수작질도 필요한 법이야.”

“마음에 안 들어.”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미라스의 말투에 바이샤가 툴툴거리며 답했다.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세리아나는 미라스가 궁금해졌다.

분명 외모는 바이샤와 동년배 혹은 그보다 어려 보였는데 말하는 것만 들어서는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노인과 같았다.

“차이툰의 라누아께서 내게 관심이 있으신가?”

“……네?”

“빤히 바라보시기에. 어떤가? 나와 춤추지 않을 텐가?”

마침 곡이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왕세자와 왕녀의 춤이 끝났으니 이제는 손님들이 춤을 선보일 순서였다.

세리아나는 에스코트를 청하듯 손을 내민 미라스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라누아께선 나와 춤추실 테니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꺼져라.”

“늙은이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는 게 어떠한지?”

“필요할 때만 늙은이 행세로군.”

“사고가 유연하다 여겨 주시게. 그건 그렇고, 어떠신가 라누아?”

“청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첫 춤은 쿠드라와 함께하고 싶어요.”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전부 나일 테니 다른 사람이나 찾아봐.”

세리아나의 손과 허리를 감싸고 홀 가운데로 나가며 미라스를 흘겨본 바이샤가 느릿한 음악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리드에 그의 손과 가슴에 제 손을 올린 세리아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런 얼굴이지?”

“춤에도 능숙하셔서요.”

“내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거든.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

“네?”

“매일 밤 확인시켜 주고 있잖아.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오늘 밤부터 다시 확인시켜 줄 생각은 있는데…… 어때?”

짓궂은 그의 말에 세리아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 정말 다행이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던 바이샤는 두 사람 곁을 파트너와 함께 스쳐 지나간 미라스를 보며 얼굴을 살짝 구겼다.

“저 여자를 조심해.”

“네? 누구……? 아, 카디마의 여왕이요?”

“예쁘고 반짝이는 걸 보면 환장하는 성미라고 하더군. 그래서 또 다른 별명이 까마귀 여왕이야.”

“농담이시죠?”

“그 소문이 얼음 땅을 넘어 사막에 닿을 만큼 아주 유명해. 예쁘고 반짝이기만 하면 그게 보석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컬렉션에 추가한다더군.”

바이샤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세리아나에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

“늙은이의 욕심은 무서운 법이야. 조심해.”

“네, 그럴게요. 그런데 바이샤, 카디마의 여왕을 왜 늙은이라고 부르세요?”

그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미라스를 늙은이라 부르는 바이샤의 태도도 이상했지만 그를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미라스의 태도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게 궁금했나?”

“제 눈에는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걸요.”

세리아나의 눈이 홀 가운데서 춤추고 있는 미라스에게 가서 닿았다.

“저 여자 몇 살로 보여?”

“바이샤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정도로 보여요.”

“올해로 오십이야.”

“네?”

음악에 맞춰 살짝 바이샤에게서 멀어졌다 회전하며 가까워진 세리아나가 경악했다.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하얗고 맑은 피부를 가진 미라스가 자신의 어머니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의 여왕뿐만 아니라 카디마의 여왕은 대대로 늙지 않는 저주를 받는다더군. 무엇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지는 그들만 알겠지.”

“늙지 않는 게 저주가 되나요?”

젊음과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어째서 저주인 걸까? 얻을 수만 있다면 천금이 아깝지 않을 축복일 것이다.

“저주가 맞아. 카디마의 여왕들은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자신이 진심으로 간절하게 원하는 단 한 가지를 얻을 수 없거든.”

“아…….”

“그래서 카디마의 여왕들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싸워야 했고 데워지지 않는 마음을 갈구해야 했어. 거기다 그들의 신은 잔인하게도 그들에게 체념과 포기를 선물하지 않았지.”

“……저주가 맞네요.”

세리아나는 그것이 왜 저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를 죽는 날까지 쫓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절망과 갈망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큰 고통일 것이라는 건 세리아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동정하지는 마. 어쨌든 그녀는 카디마의 여왕이니까.”

“네.”

미라스를 가엾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녀는 카디마의 여왕이며 카디마의 주인이었으니까. 그것을 이해한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당부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음악이 끝났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홀 중앙을 벗어나려 걸음을 옮기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미라스가 세리아나의 손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보기 드물게 당황한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다음 음악이 시작됐다.

“차이툰의 쿠드라께선 눈매가 사나운 편이시군.”

“…….”

이미 음악이 시작된 데다 사람이 가장 붐비는 홀 가운데 자리를 잡은 탓에 세리아나를 데려오지 못한 바이샤의 눈빛이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본 미라스가 능숙하게 남성의 스텝을 밟으며 세리아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용서하시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라누아와 춤 한번 추지 못하고 연회가 끝날 것 같았거든.”

“왜 저와……?”

“라누아가 마음에 들어서.”

“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혹, 쿠드라가 나에 대해 무어라 말한 것이 있는가?”

“특별하게는…….”

“라누아께선 거짓말을 못 하는 분이시로군.”

좀 전의 곡보다 박자가 빠른 곡이었다.

세리아나는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미라스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라누아께선 라젠의 왕녀라지? 그런데 난 왜 라누아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일까?”

“그, 그건…….”

“전대의 왕비, 그러니까 왕녀의 조모를 내 직접 본 적이 있거든. 그녀와 똑 닮은 분이시니 분명 다르미안 왕가의 핏줄은 맞을 터인데…… 왜일까?”

순간 세리아나의 스텝이 엉켰다.

넘어질 뻔한 그녀의 몸을 받아 춤의 연장인 듯 몸을 회전시킨 미라스는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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