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46화 (46/110)

#46.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5)

문이 열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녀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제 그의 입버릇이 된 것 같았다.

세리아나의 손을 잡아 가볍게 당긴 바이샤는 그 손등에 입을 맞춘 후 마치 라젠의 귀족처럼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불편한가?”

“아, 아뇨. 라젠의 방식을 어떻게 아시나 싶어서요.”

“이쪽이 당신에게 더 익숙할 것 같아서 배웠지.”

“아…….”

“완벽하진 않을 거야. 눈동냥으로 배운 거라.”

“아뇨, 완벽해요.”

“내 라누아께선 늘 이렇게 날 칭찬해 주시니 그냥 해주는 말이라도 기쁘군.”

“진담이에요.”

“당신이 늘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렇게 억울하다는 표정 짓지 마. 억울한 건 당신의 단장이 끝날 때까지 방에서 쫓겨난 나라고.”

“그 말 치아린이 들으면 웃는 얼굴로 화낼걸요?”

“그것도 알아. 그래서 이렇게 작게 말하고 있잖아.”

“푸훗.”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바이샤와 카얀, 치아린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바이샤가 세리아나 귓가에 속삭이는 말 또한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세리아나가 뒤편으로 살짝 눈을 돌려 치아린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치아린의 웃는 얼굴이 살벌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의 종은 내게 너무 무섭게 굴어.”

“치아린이 늘 그런 건 아닌걸요. 오늘은 신경 써서 준비한 옷이 소용없어져서 그런 거예요.”

“흠, 그건 반성하지.”

“……거짓말.”

“내 라누아께서 내 속을 꿰뚫어 보시는군. 그래서 당신은 싫었나?”

“……아뇨…….”

“잘 안 들리는데?”

“마,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저희가 제일 마지막에 도착했는데 연회장에 드는 것도 마지막이 되어버리면 안 좋은 소리를 할 거예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돌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바이샤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더 귀여워지니 이길 방법이 없다 싶었다.

바이샤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채 마차를 향해 빠르게 걷고 있는 세리아나의 작은 머리를 내려보며 그의 아내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 마차를 타고 연회가 열리는 펄킨 홀까지 이동한 세리아나는 이제야 긴장이 몰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세리아나 피오르가 아닌 세리아나 쿤 라누아로 처음 라젠의 귀족들 앞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순간 차이툰을 떠나기 전 거울이 보여주었던 바이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이샤에게 일이 생기는 거면 어떻게 하지?’

연회장으로 통하는 문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문 안쪽에서 그녀가 당할 만한 일들은 뻔했다.

오랜 시간 겪어왔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라누아의 홀에서 구어슨 백작을 만났을 땐 힘들었었지만 마음을 다잡은 지금은 분명 예전처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문제는 자신이 아니었다.

‘바이샤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크게 상처받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그가 나처럼 험한 소리를 듣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그에게 쏟아질 날이 선 말 중 대부분은 세리아나 때문에 듣는 말일 것이다.

가짜 왕녀, 왕의 사생아, 천박한 엘라이어의 딸.

그리고 라젠의 왕에게 속아 그런 여자와 결혼한 차이툰의 왕.

“……바이샤, 죄송해요.”

그가 사과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바이샤가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세리아나는 날 선 말들이 남기는 상처가 깊게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이샤가 상처받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혹여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상할까 세리아나는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당신이 듣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듣게 될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흠…… 세리아나? 분명 내가 또다시 사과하면 혼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혼내는 건 이따 방으로 돌아가 하도록 하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문 바로 앞에 선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걱정으로 흐려진 연둣빛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오늘을 끝으로 그의 아내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없게 만들 것이다.

바이샤는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에게 웃어준 후 시종을 향해 눈짓했다.

입장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차이툰의 바이샤 쿤 쿠드라 국왕 전하와 세리아나 쿤 라누아 왕비 전하 입장하십니다!”

쿠드라와 라누아라는 이름에 이미 ‘다스리는 고귀한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지 못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우스꽝스러운 시종의 소개에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바이샤가 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리아나 역시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감에 몸의 근육이 잔뜩 굳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 당신은 나의 라누아다. 누구도 당신을 내려다보지 못하게 해.”

그런 세리아나를 바이샤가 응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크게 심호흡한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말처럼 고개를 들고 허리를 폈다.

그의 곁에 선 자신이 조금이라도 당당해 보이도록, 그녀와 함께 걷는 이 남자가 차이툰의 위대한 쿠드라라는 걸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미리 입장해 있던 차이툰의 다른 귀족들은 그들의 왕과 여왕을 위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대륙회의에 참석한 비리언, 카디마, 놀슨의 귀족과 왕족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나 라젠의 귀족들은 아니었다.

“저것 봐요. ‘그 왕녀’예요.”

“야만족의 옷을 입었어요.”

“망측해라.”

“저게 야만족의 왕…….”

“사람의 목을 딴 다음 그 피를 마신대요.”

“전 피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들었는데요?”

“역시 야만족…….”

호기심과 적대감이 섞인 눈빛들이 쏟아지고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귀로 흘러들어 왔다.

예상했던 말들과 예상치도 못했던 말들이 섞여 화살비가 내리듯 세리아나와 바이샤, 그리고 뒤이어 입장한 치아린과 카얀에게 박혀 왔다.

세리아나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얼토당토않은 말들에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차이툰의 사람들을 괴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이 화가 났고 서글펐다.

‘재미있군.’

세리아나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동안 바이샤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더러운 것을 보는 듯 이맛살을 구기면서도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자신과 그의 아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라젠의 귀족들이 보였다.

몇몇 남자들은 세리아나를 보며 침을 삼켰고 몇몇 여자들은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냈다.

‘제대로 썩었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잠깐 들렀던 과거에는 세리아나 외엔 별달리 관심을 끄는 것이 없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보니 확실하게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의 국경이 그다지도 쉽게 무너진 이유를, 그리고 차이툰의 요구에 저항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이유를.

이들은 투쟁을 몰랐다.

명예를 몰랐고 고귀함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저열함이 쌓여 인간의 형상을 한다면 이 라젠의 귀족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라젠의 궁에 처음 발을 디밀었을 때 맡았던 비릿하고 불쾌한 냄새가 다시 그의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 세리아나를 이용해 나를 속이려 했다? 내 자존심이 상하려 하는군.’

세리아나가 털어놓은 비밀들과 그가 따로 조사한 내용을 복기하며 라젠에 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던 바이샤는 계획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따로 나서지 않아도 이 나라는 자멸할 것이다.

그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그의 아내가 최대한 차갑게 자신의 고향에서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어머니만 모시고 가면 된다고 했던가?’

솔직히 그 어미도 탐탁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어린 딸을 이용하는 어미는 솔직히 어미라 불릴 자격도 없다고 바이샤는 생각하고 있었다.

방치 역시 학대였다.

그리고 차이툰에서는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이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내 라누아께서 원하시니 오겠다 하면 막지는 않겠지만…….’

세리아나를 위해 그 어미에게 선물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바이샤는 그녀의 어머니가 순순히 차이툰으로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쟈캄의 조사에 따르면 엘라이어 피오르의 관심사는 오로지 ‘라젠의 왕비’ 자리뿐이었다.

‘절절하게 원하는 것치고는 독한 방법은 쓰지 않는 것이 의외긴 해.’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왕비 자리를 얻기 위해 한다는 짓이 고작 끊임없이 왕의 잠자리를 데우고 그의 사생아로 압박하는 것뿐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세리아나.”

“네.”

“당신의 어머니는 언제 만나기로 했지?”

“내일 사냥대회 때 제 천막에서 뵙고 싶다고 서신을 전했어요. 아직 답은 받지 못했지만…… 아마 오실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인사를 드리고 싶군.”

“정말요?”

“당신의 어머니니까.”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바이샤의 말에 눈을 반짝이던 세리아나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제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라젠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거예요.”

“그게 왜?”

얼굴 가득 걱정이 가득한 세리아나와 다르게 바이샤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걱정되지 않으세요?”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사실이 밝혀졌을 때 걱정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네?”

“속인 건 그쪽인데 왜 속고 이용당한 우리가 걱정해야 하지?”

“……아!”

작지만 큰 깨달음이었다.

거짓이 밝혀지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라젠 왕의 협박만을 걱정하느라 이 사기극의 피해자가 바이샤라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당신이 진짜 왕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수습을 걱정해야 하는 건 저쪽이니까.”

“네.”

“내일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나도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 전해줘.”

“꼭 그럴게요.”

솔직히 어머니가 바이샤를 반겨줄지 세리아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이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 소개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용서해 주었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차이툰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알려주면 어머니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나라의 여왕이 그녀의 딸이었으니 대리만족을 느낄지도 몰랐다.

“일단 오늘은 여기에 집중해. 우리가 시선을 꽤 끈 것 같거든.”

카얀이 챙겨 온 음료로 목을 축이며 바이샤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곁눈질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그의 눈빛에 흠칫 몸을 떨며 빠르게 눈을 돌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쪽에 있는 게 카디마의 여왕인 것 같군.”

“카디마라면 얼음으로 둘러싸인 왕국이죠?”

“그래, 저기 봐. 머리카락이 검지? 차이툰 외에 검은 머리는 카디마뿐이야.”

“아……!”

엘라이어를 따라 라젠의 모든 연회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세리아나는 카디마의 여왕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 때문에 모든 연회에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던 세리아나가 유일하게 참석할 수 없었던 연회가 바로 이 대륙회의 전날의 연회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누가 보아도 왕가의 것이었다.

그녀가 다르미안이 아닌 피오르라는 이름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 사생아를 자랑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라젠의 왕은 엘라이어와 세리아나의 참석을 금지했다.

엘라이어가 암만 떼를 써도 왕은 뜻을 거두지 않았다.

스스로 조롱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 때문이라고 화를 많이 내셨지.’

백작 부자가 연회에 참석한 동안 주인이 없는 저택에서 세리아나는 술에 취한 어머니를 상대해야만 했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폭언은 있었다.

세리아나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투정을 시작으로 왕의 딸로 태어났으면 그 어미를 왕비로 만들어 줘야 한다는 억지도 들어줘야만 했다.

‘……좋은 기억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세리아나는 흐려지지 않는 기억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 자리는 실수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괜히 과거에 사로잡혀 우울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세리아나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바이샤는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듯 거리를 벌린 다른 사람들을 헤치고 성큼 다가오는 이의 한쪽 손엔 주물로 만든 술잔이 들려 있었고 어깨엔 하얀 늑대의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차이툰의 쿠드라인가…… 백 년 만에 사막을 넘어왔군.”

“카디마의 얼음 여왕인가?”

“그 고루한 별명을 듣는 것도 백 년 만이군. 미라스 엘 갈로딘이다. 그냥 미라스라고 불러.”

검은 머리카락과 핏기 없는 하얀 얼굴, 그리고 옅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가느다란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이샤만큼이나 키가 큰 여인은 차가운 눈빛과 다르게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세리아나와 바이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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