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4)
대륙회의는 총 사흘에 걸쳐 진행된다.
첫날에는 연회가 열리고 둘째 날에는 친목을 위한 사냥대회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각국의 왕들만이 모여 대륙에 정세를 의논하는 것이었다.
거창한 듯 아닌 듯한 이 회의에 차이툰의 왕이 참석하는 것은 거의 백 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 회의를 앞둔 날, 라젠의 모든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상석에 앉은 라젠의 왕은 시종장을 닦달하고 있었다.
“그 야만족들이 얌전히 미아노 궁으로 들어갔단 말이지?”
“네, 네. 전하.”
“나중에 그곳이 어떤 용도의 궁인지 알고 나면 그 야만족의 왕이 어떤 얼굴을 할지 참 기대되는군! 하하하!”
무슨 이유에선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답하는 시종장의 모습에 라젠의 국왕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야만족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접 마중을 나가 그 모습을 지켜볼 것을……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작 야만족 따위를 맞아주려 이 라젠의 위대한 국왕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왕녀’가 함께이지 않습니까?“
그런 그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터번 후작이었다.
몇 대째 왕실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있는 그는 귀족들 사이에서 제법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국경의 군사와 기사들이 차이툰에 대패하며 현재 터번 후작의 발언권은 이전보다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내 허락도 없이 어찌 감히 말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젠 야만족의 왕비인 것을요. 묻는다면 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왕녀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성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이번에 함께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한 번 더 단속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전하…….”
“그만, 그것이 사실을 고할 용기를 가진 물건이던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성정이라면 입을 꾹 다물었을 테니 터번 후작은 걱정하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왕을 따라 웃음을 터트린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터번 후작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대답과 다르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상태였다.
‘그 왕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발품을 팔면 그 미노아 궁이 어떤 용도의 궁인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최근에서야 그 용도를 바꾸었다는 변명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겠군.’
국경지대에서 직접 차이툰의 전사들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터번 후작은 바이샤가 싸우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병사들을 앞에 세우는 라젠과 다르게 차이툰은 그들의 왕이 가장 앞에 서서 강한 전사들을 이끌고 나왔었다.
그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그의 병사들 몇의 머리가 한꺼번에 떨어졌던 것을 터번 후작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자는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돼. 그러기 위해선 왕녀가 반쪽짜리라는 것을 들켜선 안 된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야겠어.’
라젠의 기사들은 용맹했다.
터번 후작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부심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차이툰의 전사들은 라젠의 기사들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들이었다.
포로로 잡혀 잠깐이나마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던 그는 아직도 그들을 야만족이라 무시하는 다른 귀족들과 왕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왕의 그릇이 아닌 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내 죄다.’
과거로 돌아가 주인을 결정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오노반 왕자를 택하고 싶었다.
겁이 많은 남자였으니 그의 경고에 적어도 지금의 왕처럼 무사태평하게 웃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주인을 선택했으니 그 결과도 내가 책임을 져야겠지.’
터번 후작은 그의 왕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만 하지 않기를 바라며 유쾌하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미노아 궁에 시종들을 들이진 않았겠지?”
“네,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그래 그 야만족 놈의 표정은 어떠하더냐?”
“……그, 그것이…….”
“어서 말해봐라.”
“……기,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뭐?”
시종장의 말에 다르미안 왕이 의아한 듯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기뻐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야만족의 왕이 얼굴을 구겼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던 그는 생각도 못 한 반응에 양미간을 모아 인상을 쓰며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대신 이 상황을 설명해 주기를 원하는 그의 눈빛에 귀족들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왜 고민을 하십니까, 전하.”
“오오, 밀라니안 후작! 그대는 그 야만족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고 있나?”
“뻔한 것이지요.”
“뻔하다?”
“네, 그 야만족은 미아노 궁이 폐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손님 궁의 방 한 개도 아니고 궁 하나를 통째로 내어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가?”
“그렇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그자는 제 아내가 ‘가짜’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천치가 아닙니까. 하하하.”
“맞는군, 그래 그거야. 하하하! 밀라니안 후작! 그대는 정말 총명하군!”
“과찬이십니다.”
늘 그랬듯 왕의 입맛에 맞춘 답을 내어놓는 밀라니안 후작의 모습에 몇몇 귀족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밀라니안 후작의 작위가 조만간 공작으로 상승한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도는 탓에 평소처럼 왕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의 모습이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욕심 많은 돼지 놈이…….’
‘내가 먼저 엘라이어의 딸을 보내자 말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밀라니안 후작으로 갈아타야 하나?’
그의 작위가 상승한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는 소문이 아니었다.
라젠의 왕녀를 신부로 요구하는 차이툰의 무례함을 ‘그’ 엘라이어의 딸로 해결한 공을 왕이 높이 사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소문이었다.
왕뿐만 아니라 왕비 또한 자신의 사랑스러운 루미어스 왕녀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눈엣가시 같던 사생아를 치우는 방법을 제시한 밀라니안 후작에게 호의를 보였다.
거기다 이번 대륙회의가 끝나면 라젠에 처음으로 ‘공작’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왕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소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다들 밀라니안 후작의 총명함을 반의반만 따라가도 좋으련만.”
“그리 띄워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곧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밀라니안 후작.”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 터번 후작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저 돼지를 닮은 여우의 기름칠한 혀가 자신의 검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것 같았다.
“오늘 저녁 연회는 잘 준비되고 있나?”
“네.”
“그냥 잘한 거로는 부족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 명하신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샹들리에를 보면 놀슨뿐만 아니라 비리언이나 카디마의 것들도 놀라 두 눈을 크게 뜰 테니까요.”
“잘됐군!”
라젠의 국왕은 시종장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놀슨에서 열린 대륙회의에 참석했을 때 깨알만 한 블루워터가 빼곡하게 박힌 술잔을 자랑하던 놀슨 왕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블루워터를 구할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샹들리에를 만들 만큼의 블루워터는 대륙을 통째로 뒤집어도 구할 수 없습니다.”
“알아, 알고 있으니 내 포기한 것이 아닌가!”
터번 후작의 말에 왕의 미간이 구겨졌다.
터번 후작이 라젠 왕실에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사내인데다 기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저 먼 지방으로 쫓아버렸을 것이다.
라젠의 왕은 터번 후작에게서 눈을 돌려 밀라니안 후작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그에게 공작의 작위를 두고 터번 후작을 누르라 명할 것이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으나 그간 밀라니안 후작이 이렇다 할 공적을 세우지 못해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귀족들을 선동하라 해야겠어. 작위를 강등하든 지방으로 쫓든 저 얄미운 놈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도록.’
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블루워터를 떠올렸다.
블루워터로 만든 샹들리에 하나면 죽을 때까지 다른 나라 왕들의 배를 아프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돈은 얼마든지 들일 수 있었으나 구할 수 있는 블루워터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화려하게 준비하게. 비리언이든 카디마든 놀슨이든! 우리 라젠이 이 대륙에서 가장 부강하다는 걸 보여줘!”
“네!”
“전하, 차이툰은…….”
“그딴 야만족은 연회장의 문만 보아도 놀라 나자빠질 텐데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다시 왕을 따라 귀족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머릿속이 해맑은 자들이었다.
* * *
느지막하게 잠에서 깬 세리아나는 치아린과 시녀들에게 몸을 맡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초저녁, 욕실에서 시작된 일이 침대로 이어지고 다음 날 해가 뜨는 걸 보고 기절하듯 잠든 후유증 때문이었다.
덕분에 연회장에서 만나게 될 라젠의 귀족들과 왕족들에 대한 걱정은 떠올릴 수 없었지만 그것이 다른 한 사람에겐 좋은 일이 아닌 듯싶었다.
“정말 쿠드라 때문에!”
“으응? 치아린? 방금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 부탁을 드렸는데 라누아의 온몸에 꽃을 피워 놓으신 그분을 원망하고 있었던 건 절대! 아니니까요! 라누아가 좋아서 자제가 안 되신다는데! 제가! 무슨! 불평을! 하겠어요!”
“미, 미안…….”
“아니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그분 덕분에 미리 준비해 둔 옷이 전부 쓸모없어져서 차선책을 선택하는 바람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생각해 두었던 모든 것을 전부 다시 결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라누아께선 아름다우시니까 전! 아무런! 불만도! 없어요!”
이를 악물고 웃고 있는 치아린의 검은 눈동자에 불길이 일어나는 듯한 착각에 세리아나는 단박에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럴 때 치아린은 정말 무서웠다.
그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나도 좋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치아린이 화를 내지 않았더라도 부끄러워서 절대로 말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입조심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세리아나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잠깐 조는 사이 그녀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잠옷을 언제 갈아입었더라? 그 과정이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치아린은 정말로 굉장해.’
그녀의 솜씨에 탄복하며 입고 있는 옷을 손끝으로 매만진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연회가 공적인 자리인 만큼 세리아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금사로 빽빽하게 수를 놓은 목까지 올라오는 타이트한 반팔 상의와 아래로 갈수록 폭이 줄어드는 얇고 부드러운 붉은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바지였다.
그리고 두껍고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댄 붉은 신발 위에도 금사로 화려하게 수를 놓아 보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세리아나의 양쪽 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린 시녀들이 황금을 가늘게 뽑아 만든 여러 개의 링 팔찌를 끼웠다.
이미 착용한 귀걸이가 세리아나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 관을 쓰실 거예요.”
장신구까지 모두 작용하고 커다란 거울 앞의 의자에 앉자 치아린이 납작한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세리아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관이었다.
팔찌만큼이나 가느다랗게 뽑아낸 황금을 여러 겹 꼬아 만든 관엔 푸른색과 투명한 색의 보석이 구슬처럼 꿰여 있었다.
“……설마 그거……?”
“네, 두크란과 다이아몬드예요.”
“……너무 화려한 게 아닐까?”
“본래 입고 걸치실 옷에는 이것보다 큰 두크란이 박혀 있었어요! 거기다 뒤에 늘어진 베일 전체에 두크란을 박아 빛나도록 디자인했는데! 가슴골이 드러나는 옷이라 오늘 못 입는걸요! 귀걸이와 함께 목걸이도 준비했는데! 아까워 죽겠어요! 이게 다 쿠드라 때문이라구요!”
치아린의 원망이 다시 바이샤로 향했다.
너무 화려하다며 관은 쓰지 않겠다 말하려던 세리아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관을 올리기 쉽도록 머리를 살짝 숙였다.
이럴 땐 가만히 치아린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정말 얼마나 기대했는데! 혹시나 완성 못 할까 봐 마음 졸여가며 힘들게 준비한 옷이었는데!”
“이, 이 옷도 예뻐.”
“라누아께서 입으셨는데 안 예쁠 리가 없죠! 그치만! 그 옷이 정말 예뻤는데!”
“……돌아가서 꼭 입을게.”
“꼭 입어주셔야 해요?”
“응, 약속해.”
성기게 땋아 뒤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린 머리카락이 황금관에 엉키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쓴 치아린이 물러났다.
조금 전 세리아나의 약속 때문인지 그 표정이 밝아 보였다.
“장담하는데 오늘 연회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은 라누아이실 거예요.”
“치아린은 내게 칭찬이 너무 후해.”
“두고 보시라니까요”
장담하는 치아린의 손을 잡으며 일어난 세리아나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화려한 붉은색의 옷과 복숭앗빛으로 물든 두 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리아나 피오르의 병자처럼 보이던 희멀건 얼굴과 무채색의 드레스는 이제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세리아나 쿤 라누아, 차이툰의 여왕이었다.
“쿠드라께선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가자.”
“네.”
세리아나와 함께 아침까지 침대 위에서 미적거리던 바이샤는 잔뜩 화가 난 치아린에게 쫓겨났다.
평소라면 짓궂은 농담으로 치아린의 속을 뒤집으며 버텼을 테지만 세리아나의 하얀 몸 위에 빼곡하게 들어찬 붉은 자국들이 그를 순한 양처럼 만들었다.
‘바이샤 조금 귀여웠는데…… 말하면 실례겠지?’
문 앞에 멈춰 선 세리아나가 작게 키득거리자 치아린이 고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살짝 접어 작은 소리로 웃고 있는 그녀가 행복해 보여 치아린의 입가에도 웃음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