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43화 (43/110)

#43.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2)

빛나는 거울을 보며 세리아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거울은 언제나 제멋대로 빛날 뿐 그녀가 원한다고 해서 답해주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왜 자신이 원하는 이 순간에 거울이 그를 비춰주는 걸까?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신경이 쓰였다.

“아!”

거울 속 바이샤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이전보다 더욱 흐릿해진 풍경 가운데 서 있는 바이샤는 사납게 웃고 있었다.

화가 난 걸까? 대체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한 거지?

세리아나는 흐릿한 주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거울 너머 얼핏 익숙한 무언가가 비치는 듯했다.

“라젠의…… 궁?”

그녀가 익숙하다 여긴 것은 다르미안 왕가의 문양이었다.

아마도 깃발로 보이는 것에 그러진 문양을 확인한 세리아나는 그가 서 있는 장소가 주로 연회가 열리는 펄킨 홀이 아닐까 짐작했다.

“바이샤가 펄킨 홀에 왜? ……아! 대륙회의!”

거울 너머의 시간을 알아차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울이 비추는 것은 오로지 바이샤뿐이었기에 그를 만나기 전까진 거울 너머의 시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차이툰에 와 처음으로 거울이 비춰준 풍경은 그 시간을 겪고 난 이후에야 알아차린 것에 불과했다.

“어째서일까?”

때마침 빛난 거울이 왜 하필이면 라젠에 있는 바이샤를 비춰주는 것일까? 마치 거울이 무언가를 경고해 주는 것 같았다.

“바이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거야?”

거울에게 물었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성난 얼굴로 서 있던 바이샤가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따로 훈련받지 않은 그녀가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발 알려줘. 바이샤에게…… 그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거니?”

그리고 그 순간 거울이 빛을 잃었다.

너무 짧았다.

평소 거울이 바이샤를 비춰주던 시간에 비해 본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만 빛난 거울을 세리아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넓은 지붕과 사방이 트인 마차를 끄는 낙타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 마차 안에 앉은 세리아나는 날아오는 모래를 막기 위해 쳐진 얇은 천 너머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출한 구성으로 라젠을 떠났을 때와는 다르게 대규모의 인원으로 라젠으로 향하는 여정은 조금 더딘 편이었다.

물론 그 기간까지 계산해 떠난 길이었지만 세리아나는 조금씩 체력이 떨어져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속도를 늦추라고 할까요?”

“지금도 나 때문에 많이 늦어졌어. 속도를 좀 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고 쿠드라께 전해주지 않을래?”

“내 라누아께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계시는군.”

“쿠드라.”

어느새 다가온 바이샤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움직이고 있는 말 위에서 마차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마치 평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쿠션에 기대어 있던 세리아나가 몸을 반쯤 세워 그런 바이샤를 맞아주었다.

“괜찮은가?”

“네. 저는 괜찮아요.”

그녀 곁으로 다가가 앉은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몸을 당겨 자신의 몸에 기대도록 했다.

마차 끝에 걸터앉아 있던 치아린은 어느새 자리를 벗어나 사라진 후였다.

세리아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쿠션에 기대듯 누운 바이샤가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건 버릇인가?”

“정말 괜찮은 거예요.”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조금 더 편히 기대어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잡은 후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괜히 같이 가자고 했군.”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전 기뻐요.”

“……이틀 정도만 더 움직이면 국경에 닿을 거야. 거기서부턴 기온이 변하니 조금만 참아.”

“네에.”

한숨을 내쉬듯 대답하며 기대어 오는 세리아나를 바이샤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 기대에 눈을 감은 세리아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어쩐지 눈에 박혔다.

조금 전 같이 있을 수 있어 기쁘다는 세리아나의 말에 바이샤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가슴 한쪽이 쿵 하니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낯선 감각에 세리아나의 말이 더해져 여운이 길게 남았다.

“당신은 이것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

어느새 잠들어 버린 세리아나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잠든 그녀의 얕은 숨이 그의 살갗에 닿아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이샤는 잠든 세리아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그녀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잠들어도 좋을 시간이었다.

해가 진 후 바이샤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세리아나는 시종들이 천막을 설치하는 동안 잠시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이동하는 동안 마차 안에만 머무른 탓에 이럴 때 조금이라도 움직여 줘야만 했다.

사방이 트인 모래사막은 고요했다.

구름 한 점 지나지 않는 하늘 위엔 별이 가득해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어지러웠다.

“아로도 함께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 여행에 아로는 함께하지 못했다.

영역을 정해 평생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다른 새들과 같이 아로는 비행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다.

그 탓에 사막을 횡단하는 것도 무리였고 라젠의 기후가 사막의 새에겐 그리 좋지 못할 것이라는 충고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행거리가 짧은 것은 세리아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였지만 바이샤가 반대했다.

사막의 사냥꾼을 약하게 키우면 안 된다는 세리아나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이유 때문이었다.

“아로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누아께서 키우고 있다는 쿠락의 이름이 아로인가 보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구?”

“라옴의 두르히가 라누아께 인사를 올립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혼자 계시기에…… 밤의 사막은 차이툰의 영토라기보다는 짐승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라누아의 종과 함께 움직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고, 고마워. 두르히……라고 했지? 이만 일어나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대의 아비에 대해선 치아린에게 들은 적이 있어.”

“좋은 말은 아니었겠군요.”

“응?”

“제 아버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 중에 좋은 말을 전하는 이는 없으니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한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지양하라 말씀 올렸지만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셨던지라.”

“저기…….”

“나중에 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일이 생긴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은 쓸데없고 소모적인 잡담이고 남은 절반 중에 또 절반은 자랑이나 조롱이 섞인 말인지라 라누아께서 듣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그건 너무…….”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저나 라옴의 다른 이가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정말로 무시하셔도 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비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하는 두르히를 보며 세리아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비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아들이라는 소리를 치아린에게 듣기는 했지만 히아신을 아직 만나 보지 못해 이 정도일 거라 짐작도 못 했던 탓이었다.

거기다 그 아들이 치아린과 똑같은 충고를 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니…… 대체 히아신이라는 남자는 어떤 성격을 가진 남자이기에 이렇게 아들이 나서서 이런 충고를 해주는 것일까?

경계를 살짝 푼 세리아나가 두르히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차이툰의 사람들처럼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그는 탄탄한 몸 위에 큰 도마뱀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키는 대충…… 바이샤보다 한 뼘 정도 작으려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로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과 두껍고 짙은 눈썹이 진한 인상을 만들고 암녹색의 눈동자가 더해져 이지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여정이 힘들지는 않아?”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 사막의 사내가 아니죠. 육체적으로는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는 힘들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될까?”

“힘들다기보다는 피곤합니다.”

자신의 아비에 대해 말할 때부터 눈치챈 사실이지만 두르히는 둘러 말하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예의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법한 질문에도 지나치게 솔직하게 답해 오는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세리아나는 다시 그에게 질문했다.

“왜인지 물어도 될까?”

“그냥 물어보시면 됩니다.”

“으응, 그럼…… 물어볼게.”

“자라하와 아눌라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세리아나의 몸이 굳어 버렸다.

왜 여기서 그 두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면 승패라도 날 텐데 둘 다 입으로만 싸워대서요.”

“아…….”

“그런 싸움 방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비와 성격이 반대이기는 해도 두르히 역시 라옴의 일원이었다.

서로의 신경만 건드리고 갉아내는 싸움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부족의 후계자들은 각각 다른 천막에서 지내지 않아?”

“이동할 때는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고생이…… 많겠네.”

“네, 정말 많습니다.”

두르히는 정말로 솔직하게 답했다.

사막의 태양을 버티며 이동에 필요한 체력을 신경 써야 할 시간에 자라하와 아눌라,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하는 것은 정말로 고된 일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 묻지는 않으시는군요.”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아십니까?”

“슈라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만…….”

아는 것은 ‘슈라’가 아눌라의 사촌이고 그녀의 사인이 낙마라는 것뿐. 그 사인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기에 세리아나는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답할 수 없었다.

“짐작만 하고 계시는 거군요.”

“내가 모든 걸 알 수는 없으니까.”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아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당사자는 죽었고 자라하에겐 상처일 테니까. 그리고 아눌라는…….”

“말하지 않을 테죠.”

슈라의 죽음에 아눌라가 관련되어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치아린도 그렇게 확신하며 그녀에게 말해주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쿠드라의 이름으로 끝이 난 사건이었기에 아무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일부러 알아낼 생각은 없어.”

“그러시다면 저도 이만 말을 아끼겠습니다.”

세리아나가 물어본다면 무엇이든 답할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처럼 굴던 두르히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그 모습에 두르히가 저를 라누아로, 충실히 섬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세리아나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막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 치아린 님이 오고 있네요.”

“응? 어디에?”

“저쪽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동안 생각보다 먼 거리를 걸어온 것인지 세리아나는 일행들이 머무는 장소에서 꽤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횃불을 밝히기는 했지만 먼 거리에 있는 데다 그의 말처럼 치아린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면 빛을 등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밤중에 빛을 등져 시커먼 그림자가 내린 얼굴을 이 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세리아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두르히는 눈이 아주 좋은가 봐?”

“사막의 전사들은 대부분 눈이 좋죠. 하지만 지금 제 경우는 사랑의 힘입니다.”

“……응?”

“사랑의 힘. 모르십니까?”

솔직한 걸 넘어서서 뻔뻔하기까지 한 그의 대답에 세리아나는 멍한 얼굴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모르진 않지만…….”

“제가 치아린 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치아린을 바라보고 있는 두르히를 향해 세리아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치아린에겐 카얀이 있어!”

“압니다.”

“하, 하지만 방금 치아린을…….”

“제 사랑은 제 것일 뿐. 치아린 님이 누구를 사랑하든 상관없습니다.”

“…….”

“제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분께 그런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으니까요. 애초에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요.”

짝사랑을 저리 당당히 고백할 수도 있는 거구나. 세리아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은 걱정스러워졌다.

치아린과 카얀 사이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두르히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세리아나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치아린에게는 비밀로 할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백할 생각이야?”

“이미 고백했고 차였습니다.”

“응?”

“과연 제가 반한 분답게 칼같이 자르시더군요. 그 모습에 또 반했지만요. 뭐,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제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치아린 님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시죠. 그러니 라누아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상한 사람이다.

입으로는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중인데 그 얼굴이 너무 담담해서 세리아나는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맞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차였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구나.’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인간관계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거기다 다른 사람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가십으로 소화하는 사교계를 겪어온 세리아나가 보기에 두르히는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치아린이 세리아나를 찾아왔다.

그녀의 곁에 두르히가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멀어지는 그에게 치아린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두르히와 인사를 나누셨군요. 어떠셨어요?”

“……이상한 사람이었어.”

“제대로 보셨네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할 일은 제대로 하는 녀석이니까요.”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세리아나는 두르히에 대해 그렇게 정리하고 완성된 천막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바이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은 구별하기 어려웠으나 그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사랑의 힘이라는 거 정말로 있는 거였네.”

“라누아?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으응, 그냥 혼잣말이야.”

세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치아린을 향해 환히 웃어 보인 후 바이샤를 향해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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