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42화 (42/110)

#42.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 (1)

세리아나는 치아린이 만들어 준 차양 아래에 누워 한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오아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젠의 사신단을 쫓아 보낸 지 한 달, 이제는 슬슬 대륙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라젠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라누아, 볕이 뜨거운데 지치지는 않으세요?”

“그냥 앉아만 있는걸. 괜찮아.”

“점점 더 뜨거워질 거예요. 하필 이런 시기에 대륙회의라니. 사막을 건너야 하는데 몸이 상하실까 걱정이에요.”

“눈밭을 걸어 이동해야 하는 나라도 있는데 차이툰의 여름을 핑계로 불평하면 안 돼.”

“그래두요.”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서 있는 시녀 하나에게 시원한 과일주스를 가져오라 손짓한 치아린이 세리아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결 좋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은 세리아나의 목덜미에 흐른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낸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정말 라젠에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렇게 결정했는걸. 그리고 쿠드라도 함께 가자 말해 주셨고.”

“쿠드라의 결정에 라누아께서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지만…… 하아, 라누아. 제발 쿠드라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만두시라니까요!”

“……무조건은 아닌데…….”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이번에도 믿어드릴게요. 뭐, 괜찮아요. 덕분에 그 씹어먹을 종자를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후 치아린과 카얀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바이샤는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세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카얀과 치아린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전해 들은 카얀은 분노했다.

당연하게도 세리아나가 아닌 라젠을 향한 분노였다.

다만 그 옆에 서 있던 치아린의 분노가 어마어마했기에 그는 상대적으로 침착해 보일 수 있었다.

그날 세리아나는 눈빛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자리에 구어슨 백작이 있었다면 치아린의 눈빛에 타 죽었을 것이다.

“치아린?”

“걱정하지 마세요, 라누아. 티 나게 사고 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으응…….”

조금 전 구어슨 백작을 떠올리며 이를 갈던 치아린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티 안 나게 사고를 칠 생각인 거야?’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 세리아나가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치아린을 차이툰에 두고 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지만 라누아의 종을 떼어두고 라누아가 먼 길을 떠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습이 가능한 선에서 사고 쳐줬으면 좋겠는데…….”

“네?”

“아무것도 아니야. 떠날 날짜는 정해졌어?”

“나흘 뒤로 정해졌습니다.”

“내가 따로 준비할 건?”

“건강이요.”

“…….”

“라누아께서 신경 쓰실 건 건강뿐입니다. 여름의 사막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요.”

“……최근엔 활도 다시 잡게 됐는데?”

“밤에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체력은 보통 사람들도 다 가지고 있는 거랍니다.”

바이샤와 살을 맞대는 밤, 드디어 기절하지 않고 관계를 끝낼 수 있었던 세리아나는 일주일 전부터 다시 활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녀를 배려해 본인의 욕망을 있는 힘껏 내리누른 바이샤의 덕도 있었지만 먼 길을 떠나기 전 사냥대회 이전의 체력을 회복한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거기다 쉬는 시간 짬짬이 바이샤에게 활을 배우고 있는 요즘 체력이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세리아나 본인만의 생각이었다.

강골로 태어나 자신과 비슷한 강골들만을 보고 자라난 치아린이 보기에 그녀의 주인은 연약해도 너무 연약한 사람이었다.

“모래바람에 라누아의 몸이 조금이라도 상한다면…… 정말 가만 안 둘 거예요.”

“……누구를?”

“누구든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치아린이 조금 무서웠지만 세리아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라누아의 신실한 종인 치아린이 자신을 다치게 할 리는 없으니까. 거기다 지금 치아린이 생각하는 ‘누구’가 누구인지 짐작이 되어서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라젠에 가면…… 구어슨 백작 같은 자들이 널렸다는 걸 말해줘야 하나?’

귀족뿐만 아니라 왕세자도 그녀를 구어슨 백작처럼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치아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금 궁금했지만 세리아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건 라젠에 도착한 이후로 미뤄두기로 했다.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을 미리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다.

“어머니께 드릴 선물은 준비되었어?”

“네. 특별히 두크란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포함해 두었어요.”

“그건 너무 과해!”

“쿠드라께서 직접 지시하신걸요. 라누아의 목걸이도 완성되었답니다.”

일국의 왕도 쉽게 가지지 못하는 블루워터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를 고작 백작 부인에게 줄 선물로 준비하는 것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두크란의 출처를 두고 소란이 생길지도 몰라.”

“지킬 수 없는 것을 자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만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다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있어야 그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겠어요?”

대륙회의에 동행하기로 한 후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 어머니를 이곳 차이툰으로 모셔 오고 싶다고 부탁했다.

엘라이어는 세리아나가 라젠에 남기고 온 마지막이자 유일한 미련이었다.

그녀는 이번 방문을 겸해 엘라이어를 차이툰으로 데려오며 라젠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어낼 생각이었다.

“그건…… 그래, 어머니는 화려한 걸 좋아하시니까.”

“네,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응. 쿠드라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

“감사하다 말을 꺼낸 순간 화내실걸요? 라누아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실 테니까요.”

“그래도 해야 해. 정말로 감사한걸.”

“정 그러시다면 말 대신 먼저 입이라도 맞춰 드리세요. 지금까지 먼저 해보신 적은 없으시죠?”

장난스러운 치아린의 말투에 세리아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은 늘 바이샤였다.

그녀가 부끄러움이 많아 먼저 손을 뻗지 못하는 탓도 있었지만 일단 바이샤의 손이 닿으면 열이 올라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그건 좀…….”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거죠?”

“……그런 것도 있지만…….”

첫 번째 이유는 부끄러움이지만 두 번째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라젠에서 들어온 그 어미에 그 딸이라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만약 자신이 먼저 바이샤에게 손을 뻗는다면 음탕한 여인이라 손가락질하던 그들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라누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라젠에 돌아갈 걸 생각하니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져서 그래.”

“그럼 안 가시면 될 텐데.”

“이미 정한 거야.”

“그냥 해본 소리예요. 그만 들어가실까요? 한낮의 태양은 그늘이라고 해도 버티기 어려워요.”

“응.”

치아린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나는 불쾌하게 달라붙는 라젠의 기억을 털어버렸다.

이후 떠날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세리아나와 바이샤,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것이 조금 문제가 되었지만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세 부족의 후계자들을 일행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며 시간은 흘러갔고 드디어 오아시스를 떠나 라젠으로 향하는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말이 일행이지 볼모라고 보시면 돼요. 자리를 비운 동안 허튼짓을 하면 후계자의 목을 치겠다는 경고죠.”

세리아나의 잠자리를 정리하며 치아린이 말했다.

“세 부족이라고 하면…… 바라와 라옴, 그리고 시카인가?”

“네. 차이툰에 엎드리기 전 사막에서 가장 큰 규모를 유지했던 부족들이죠. 그 세 부족장이면 두 분이 안 계셔도 다른 작은 부족들을 충분히 경계할 수 있을 거예요.”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몇의 목줄을 잡아 다수의 약한 이들을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무척이나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어딘지 그 말을 듣는 세리아나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불편해 보이는 이유를 치아린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아눌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응.”

“걱정하지 마세요, 라누아. 제가 지척에 붙어 있고 쿠드라께서 함께 움직이실 거니까요. 뒷수습해 줄 아비가 없는 곳에서 일을 저지를 만큼 아눌라는 멍청하지 않아요.”

“그러면 좋겠지만…….”

사막의 모든 오아시스에 씨앗을 뿌리고 돌아온 후 아눌라는 시카의 거주 구역에만 머무르며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아눌라가 포기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세리아나는 그것이 불안했다.

꼭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었다.

“바라의 자라하와 라옴의 두르히도 있으니 충분히 경계할 수 있어요.“

“두르히?”

“아, 두르히는 아직 못 만나 보셨죠? 라옴의 족장인 히아신의 첫째예요. 본능을 우선하는 아비와 다르게 이성을 우선하는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남자죠.”

“라옴의 사람들은 만나 본 적이 없어.”

“세 부족 중 가장 과격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부족이에요.”

라옴은 유랑을 택했던 시카와 정착을 택한 바라, 두 부족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부족이었다.

그들이 사막에서 살아남고자 선택한 것은 ‘약탈’. 푸른색 모자를 쓰고 사막의 여러 부족을 약탈하며 살아온 그들은 한때는 사막의 악몽으로 불리며 여러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줬었다.

“과격하기는 한데 뒤끝은 없는 부족이에요. 칼이 부러지고 쿠드라 앞에 무릎을 꿇은 후부턴 제일 손이 안 가는 부족이 되었거든요.”

가장 충실한 신하처럼 보이지만 믿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시카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바라와는 다르게 단순한 라옴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들이라 믿음이 갔다.

‘영감탱이가 하는 말마다 신경을 긁는 게 짜증 나지만.’

부족의 성격 탓인지 라옴의 부족장인 히아신은 저보다 강한 것은 숭배하고 약한 것은 무시하는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치아린은 충분히 강한 전사였지만 히아신에 비하면 그다지 무력이 강한 편이 아니었던지라 그에게 종종 무시를 당하곤 했다.

‘애초에 영감탱이보다 강한 사람은 카얀이나 쿠드라뿐인데!’

얼마 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난 히아신이 저를 말라깽이 꼬맹이라 불렀던 것을 떠올린 치아린이 이를 갈았다.

웃는 얼굴로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늙은이를 생각하니 혈압이 올라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라누아, 라옴의 히아신을 만나게 되면 그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야 해요. 아셨죠?”

“응?”

“정말 그런 영감탱이 밑에서 두르히 같은 아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아니 두르히 녀석도 좀 이상한 놈이긴 한데…… 영감탱이보다야 백만 배는 나아!”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치아린에게서 시선을 돌린 세리아나는 눈앞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두크란으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가 담겨 있는 상자였다.

‘좋아하시겠지?’

라젠의 왕녀로 바이샤의 아내가 되어 사막으로 떠나던 날까지 자신을 붙잡고 억지를 부리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낳고 키워준 어미인데 어째서 그녀가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일까?

세리아나는 바이샤가 준비해 준 이 선물이면 그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막연히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내일이면 이 오아시스를 떠나 다시 라젠으로 향한다.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았다.

“쿠드라께선 오늘 밤 오지 않으실 거예요.”

“아…….”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사막을 건너는 건 체력이 필요한 일이라구요. 오늘 밤까지 쿠드라께서 드시면 라누아께서 힘들어지세요.”

“그…… 정도는 아니야.”

“쿠드라께 감사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신 다음 날, 점심때가 지나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던 분께서 말씀하시면 그분의 종인 저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할 말이 많은 듯한 치아린의 눈빛에 세리아나가 민망함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조언대로 가지고 있는 용기를 모두 짜내 먼저 입을 맞추고 난 이후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어느 정도 체력을 길러둔 탓에 기절하는 일은 없었지만 기절하지 않은 덕분에 밤이 더더욱 길어져 다음 날 눈뜨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러니 어서 이리 와 누우세요. 오늘은 꿈도 꾸지 말고 푹 주무셔야 해요.”

“고마워 치아린.”

“별말씀을요. 혹시 몰라 드리는 말씀이지만 쿠드라께서 창문을 넘으려 하시면 안 된다고 하세요.”

“…….”

“……그냥 제가 쿠드라께 말씀드릴게요. 절대로 창문을 넘지 마시라고.”

치아린은 자신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세리아나의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아나의 모든 점이 좋았지만 단 하나 바이샤에게 무조건 퍼주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불만이었다.

“저는 쿠드라께 가보겠습니다. 아로도 일찍 사냥을 나가 조용하니 주무세요.”

“정말로 쿠드라께 가려고?”

“라누아의 안전과 건강 앞에 제가 허튼소리를 하던가요?”

“…….”

“주무세요 라누아.”

“……응.”

단단히 각오를 다진 얼굴로 치아린이 방을 빠져나간 이후 세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심하게 잠자리를 살펴준 치아린에겐 미안했지만 오늘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 내려온 세리아나는 거울 앞으로 가 앉았다.

사냥대회 전 빛을 냈던 거울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그를 비춰주지 않았다.

불규칙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의 주기는 가지고 있었던 거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 주기가 일그러질 수 있는 걸까?

“너도 이곳에 와 변한 거니?”

차갑고 매끄러운 거울의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린 세리아나가 중얼거렸다.

오늘도 보름달이 떠오른 밤이었다.

기적처럼, 마법처럼 다시 빛나줄 수는 없을까?

그런 기도를 담아 거울을 쓸던 세리아나는 조금씩, 천천히 미약하게 빛을 내기 시작하는 거울을 보며 몸을 굳혔다.

정말 그녀의 기도에 거울이 응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점차 그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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