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41화 (41/110)

#41. 라젠에서 온 사신 (7)

갑작스러운 살기에 세 사람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전쟁터에서나 느껴 볼 법한 진득한 살기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치아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바이샤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님을 쟈캄은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치아린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자신이 목격한 사신 대표가 보였던 언행을 모조리 고해바쳤다.

“쿠드라. ‘일단’ 살려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기억하시죠?”

“……기억하니 조용히 해.”

“넵.”

혹시라도 바이샤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재빨리 입을 열었던 쟈캄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아주 마음에 안 들어.”

“…….”

“카얀, 연회는 취소다.”

“네.”

“그리고 쟈캄.”

“네.”

“너는 돌아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끝마쳐라.”

“더 깊게 들어갑니까?”

“그래, 이번 일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알아내.”

“네, 알겠습니다.”

쟈캄은 그것이 곧 살생부가 되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것 역시 시카의 누라비에겐 들켜선 안 될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카얀이나 치아린과 다르게 이것이 세리아나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누라비라면 분명 적극적으로 이용하리라는 사실도.

쟈캄은 그가 섬기는 왕과 여왕을 위해 제 수하들을 조금 더 다그쳐야겠다고 다짐하며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서둘러 제 방을 빠져나와 도착한 라누아의 방 안에서 그는 악몽에 신음하고 있는 세리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이샤는 눈물을 쉽게 그치지 못하는 세리아나를 토닥이며 그간 그녀가 했을 마음고생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바이샤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낸 세리아나는 기력이 다해 더는 눈물을 쏟아낼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때쯤 간신히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도 남지 않은 탓에 축 늘어져 바이샤의 가슴에 기댄 세리아나가 히끅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낸 바이샤는 미소를 띤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했나?”

“……네.”

“목이 잠겼군.”

몸을 일으킨 바이샤가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차가운 물을 집어 건넸다.

달게만 느껴지는 물을 삼키고 긴 한숨을 내쉰 세리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세리아나.”

“네.”

“내 얼굴은 계속 안 볼 생각인가?”

“…….”

“당신은 나의 아내이고 이 차이툰의 라누아다. 내 앞에서도 고개 숙일 필요가 없는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소리야.”

한 손으로 세리아나의 턱을 잡아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 바이샤가 눈을 맞춰 왔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 속에 세리아나가 담겨 있었다.

“다시는 나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한다면 그자의 목을 쳐.”

“네?”

“힘들다면 내게 말해. 당신을 대신해 내가 그자의 목을 쳐버릴 테니.”

“바이샤…….”

“타인의 악의를 인내하지 마. 당신에겐 힘이 있고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어.”

“……네.”

바이샤는 그의 아내가 그 힘을 남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착하기만 한 그의 아내라면 자신이 지닌 힘의 반의반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만큼 자신이 보여주면 된다.

그의 아내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려줄 힘이 바이샤에게는 있었다.

“당신이 차이툰의 라누아라는 걸 잊지 마.”

“그럴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엄한 표정을 푼 바이샤가 미소지었다.

이제야 진짜 부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뭐랄까…… 어째서인지 가슴속이 간질거렸다.

가끔 세리아나의 미소를 볼 때마다 이렇게 조금씩 가슴 한쪽 구석이 간질거리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처럼 가슴 전체가 술렁이고 간질거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이샤는 이것이 무언가의 신호가 아닐까? 아주 잠시 생각하다 이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이 방을 눈물로 채울 것처럼 서럽게 울어대던 세리아나가 다시 웃는 것이 기뻐 그러는 것이다.

바이샤는 그의 가슴이 보내는 신호를 그렇게 해석했다.

세리아나는 그런 바이샤의 얼굴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그의 웃는 얼굴이 좋아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아낸 탓에 눈가가 짓물러 화끈거렸다. 엉엉 소리를 내어 울어버린 탓에 목도 조금 아파 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이리 가볍게 웃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바이샤의 얼굴을 보며 말없이 웃고만 있던 세리아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의 품을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처음엔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던 바이샤는 이내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세리아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앞으로 그에겐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이것 또한 그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찾아 시선을 움직이던 세리아나가 조심스럽게 협탁의 가장 위 서랍을 열었다.

치아린이라면 분명 이곳에 넣어뒀을 것이다.

그녀의 그런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그곳에서 세리아나는 구어슨 백작이 전한 라젠 국왕의 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어슨 백작의 소름 끼치는 시선이 다시 떠올랐다.

세리아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생각을 떨쳐버린 후 떨리는 손끝으로 그것을 집어 들고 바이샤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건 뭐지?”

“국왕 전하, 아니 라젠의 국왕이 구어슨 백작을 통해 제게 전한 편지예요.”

“흐음.”

씰이 뜯긴 편지를 받아 펼친 바이샤의 얼굴이 구겨졌다.

종이와 잉크만으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재주를 라젠의 국왕이 가지고 있을 줄 몰랐던 탓이었다.

“함께 오라?”

“……비밀이 지켜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인 거 같아요. 당신이 라젠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 거짓말이 들통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요.”

“멍청한 남자로군.”

“…….”

“……음, 라젠의 왕을 멍청하다고 말해 기분이…… 나쁜가?”

평소처럼 툭 하니 말을 뱉었던 바이샤가 뒤늦게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입장에선 찢어 죽일 놈이었지만 세리아나에겐 어쨌든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리아나는 별다른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게는…… 타인보다도 더 먼 분이신걸요.”

그래서 바이샤에게 진실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비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면 그녀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리아나에게 라젠에 유일하게 남은 미련은 어머니뿐이었다.

평소 세리아나를 어찌 대했든 간에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낳아 키워준 어머니였다.

유일한 혈연이라 부를 수 있는 어머니를 세리아나는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당신은 어쩌고 싶지? 함께 가고 싶나?”

“저는…… 모르겠어요. 어떤 게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사실 세리아나가 차이툰에 남는 것이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도 맞는 답이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를 숨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이샤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세리아나를 품 안에 숨기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누아로 그와 함께 차이툰의 모든 일을 살펴야 하는 세리아나에게 그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라젠의 왕녀를 라누아로 맞이하기로 결심했을 때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만약 세리아나가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저 신과 모습만 똑같은 연약하고 제 주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래, 그랬다면 그는 기꺼이 세리아나를 품에 보듬어 안았을 것이다.

품에 꼭 끌어안고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을 막아주고 자신의 등 뒤에 숨어 안전한 길만을 걷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 바이샤는 이제 그와 함께 모진 바람을 맞을 수 있는 라누아를 원했다. 그리고 세리아나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의 라누아는 아름답고 똑똑했으며 용감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막을 제대로 볼 줄 알았다.

무작정 두려워하지 않고 묻어두고 아름다운 것만 취하려 하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사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땅을 사랑하고 있었다.

바이샤는 앞으로의 세리아나가 더욱 궁금해졌다. 동시에 기대하게 되었다. 그의 여왕은 사막의 어디까지를 볼 수 있을까?

세리아나와 함께라면 아직 자신도 다 보지 못한 사막의 전부를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함께 가지.”

어디든 함께하고 싶었다. 척박한 땅을 함께 걸으며 모든 것을 함께 보고 나누고 싶었다.

그의 그런 생각이 세리아나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라젠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서워요. 그곳의 사람들이 저를 어찌 부르고 바라보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바이샤가 제 곁에 있어 줄 거잖아요. 당신 곁에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버텨낼 수 있어요.”

구어슨 백작의 소름 끼치는 눈빛이 떠올랐다. 루카르도의 술 냄새가 가득했던 불쾌한 숨이 피부에 닿는 것 같았다.

자신을 동정하고 비웃던 루미어스 왕녀와 더러운 것을 보듯 경멸하던 자이로 왕세자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세리아나는 그것들이 여전히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도 그녀는 견뎌낼 것이다.

바이샤가 그녀를 용서해 줬으니까. 용서하고 다시 라누아라고 불러줬으니까. 그의 라누아로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견뎌내리라 세리아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좋은 각오지만 그렇게 생사를 걸듯 말할 필요는 없어.”

“네?”

“누가 당신을 예전처럼 바라본다면 이렇게 말해. ‘어디 감히 차이툰의 라누아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거냐!’라고.”

“그, 그건…….”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괜찮아.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그래도 돼.”

세리아나로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바이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겨 침대 위에 다시 누운 세리아나가 놀라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진담이니까.”

장난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허리에 감은 손에 힘을 줬다.

세리아나의 고백은 생각보다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알아보라 지시한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배신감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중요했던 것은 ‘왕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 아내의 거짓말보다도 그녀가 이용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

‘감히 나를 속인 것도 모자라 나의 라누아를 협박했겠다?’

결과적으론 그에게 잘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바이샤는 라젠의 국왕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를 기만한 대가는 비쌀 것이다.

거기에 그의 아내를 노렸다던 두 귀족은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이샤?”

“구어슨 백작, 그자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아…….”

“분명 그자를 만나고 쓰러졌다고 들었어.”

“그, 그게…….”

이름을 꺼낸 것만으로도 세리아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지켜본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분명 아주 좋지 못한, 치아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더럽게 엮인 인연이 분명했다.

하긴 돈을 주고 아내를 사려 한 자와 엮였다면 더럽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좋지 못한 말을 들은 게 분명하니까.”

“죄송해요.”

“한 번만 더 죄송하다고 말하면 혼내줄 거야.”

“…….”

정해졌다.

알베토 후작이라는 자는 적당히 손봐 주겠지만 구어슨 백작이라는 놈은 반드시 그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

치아린도 그 역할을 탐내겠지만 바이샤는 그 역할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치아린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역할을 두고 정당한 결투라도 벌일 것이다. 물론 승리자는 그일 테지만.

‘차이툰의 모래에 그자의 더러운 피를 뿌릴 필요는 없지.’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가 취소되었다는 것은 이미 전달되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구어슨 백작이라는 자는 분명 손님 대접도 받지 못한 것에 화를 내고 있을 것이다. 속으로 그들을 예의도 모르는 야만인이라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에게 내어줄 물 한 모금도 아까웠지만 이 사막에 쓰레기를 버릴 순 없으니 어쨌든 살려서 최대한 빠르게 라젠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내일 당장 쫓아내라 말해야겠군.’

한 나라를 대표해 온 사신을 박대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런 자를 이 차이툰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이샤는 시끄러운 쥐새끼를 닮은 구어슨 백작을 빠르게 치워 버릴 생각을 하며 라젠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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