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39화 (39/110)

#39. 라젠에서 온 사신 (5)

살기로 번뜩이는 치아린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쥬드가 입을 열었다.

“라누아의 고향에서 온 사신입니다. 라누아의 마음이 다칠까 염려스럽습니다.”

“라누아께 비밀로 하면…….”

“라누아의 종께서 그분께 비밀을 만드시면 안 됩니다.”

“하아, 그건 그렇군.”

사신을 죽인 후의 일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세리아나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만약 세리아나가 사신에 관한 일을 묻는다면? 자신은 거짓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라누아의 종으로 인생과 영혼을 바친 이가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 천박한 눈빛을 한 자가 어떻게 사신단의 대표가 될 수 있지? 거기다 라누아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했잖아. 내 라누아께서 그런 놈과 친분이 있을 리 없는데?’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 사신단의 대표라는 놈과 그녀의 주인이 아주 더러운 일로 얽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구어슨 백작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라누아와 자신을 위아래로 훑던 눈, 치아린은 다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쿠드라께 보고는?”

“치료사가 라누아를 살핀 후 그 결과와 함께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가지.”

“네? 하지만 치아린 님은…….”

“라누아 곁은 쥬드 네가 지켜.”

“알겠습니다.”

마침 진료를 마치고 나온 치료사가 세리아나의 상태를 알려왔다.

무언가 정신적인 압박을 받은 듯 피로가 상당히 쌓여 있다는 그의 말에 치아린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피로가 쌓인 것만으로 저리 쓰러지시나?”

“정신적인 압박을 지속해서 받아 오신 것 같습니다. 그간 참고 참으신 듯한데 그게 한꺼번에 터진 거죠. 수면향을 피우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깨어나시는 대로 약재를 달여 올리겠습니다.”

“부탁하지.”

“네.”

치료사가 물러간 후 치아린은 방 안으로 들어가 깊게 잠든 세리아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하얗게 질려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쥬드.”

“네.”

“내가 나간 이후로 그 누구도 이 방 안에 들어선 안 된다.”

“시녀들도 막을까요?”

“그래. 깨어나 누구를 찾으시기 전까진 이대로 푹 주무시게 해.”

“알겠습니다.”

잠든 세리아나의 몸 위로 얇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준 치아린이 방을 나와 쿠드라의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늘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기다란 그림자를 땅에 드리웠다.

그리고 중앙정원으로 난 긴 복도를 걷는 치아린의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 위로 그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 * *

세리아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에 둘러싸인 꿈. 하얀 가면 위엔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가면을 쓴 사람들은 모두 세리아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가짜 왕녀!’

‘그를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겠지!’

‘천박한 엘라이어의 딸!’

‘사랑하는 남자를 속이는 기분은 어때?’

‘가짜 주제에!’

‘분수도 모르는 것!’

형체 없는 말들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날아와 꽂혔다.

세리아나는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그 모진 말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교로 입술을 딱 붙이기라도 한 듯 그 어떤 말도 뱉어낼 수 없었다.

‘그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버림받을 거야!’

‘화를 내겠지!’

‘당장 떠나라 소리 지를 거야!’

‘가여운 세리아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욕심내다 결국 벌을 받는구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쇠사슬이 되어 세리아나의 몸을 옥죄어 왔다.

소리 없이 지른 비명이 눈물이 되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수많은 물방울이 바닥에 고이고 이내 점점 차올라 세리아나의 몸을 삼켰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살려 달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

자기가 흘린 눈물에 익사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를 순 없었다.

거짓말쟁이, 가짜 왕녀, 왕의 사생아, 천박한 엘라이어의 딸 세리아나. 그게 전부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감히 바이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사방을 가득 채운 눈물이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마치 거대한 바위에 깔린 사람처럼 세리아나는 신음했다.

살고자 움직이려 했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 있어도 되는 걸까?’

나의 죄는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세리아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의 끝이 바이샤에게 닿았다.

그에게 버림받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비난 또한 감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싫어!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버림받고 싶지 않아! 바이샤! 나를 제발……!’

무거운 눈물 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던 세리아나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대로 삶을 놓아버리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바이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매달리고 싶었다.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 용서해 달라 그의 앞에 엎드려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고 어두운 눈물 속으로 침몰하던 세리아나에게 그 목소리는 빛처럼 다가왔다.

구원의 빛이 이리 따스할까? 세리아나는 제 발목을 휘감는 진득한 어둠을 뿌리치고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세리아나!”

“흐읍!”

급하게 들이쉰 숨이 폐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손을 허우적거렸다.

눈물 속으로 침몰하던 감각이 남아서일까?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세리아나!”

“흡, 바, 바이샤…… 허억…….”

“그래 나야.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어.”

세리아나는 자신을 끌어안은 바이샤의 품에 매달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몸을 잡아당기던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등을 도닥이는 부드러운 손길과 몸을 감싼 따뜻한 온기에 꿈속에선 끝끝내 내뱉을 수 없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럽고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이샤는 아무 말 없이 세리아나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리아나의 이마에 잘게 입을 맞추며 절박하게 매달려 오는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쉬이……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바이, 바이샤…….”

“그래. 나야.”

“미안해요, 미안…… 흑, 미안해요.”

이 작은 몸 어디에 이렇게 많은 눈물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바이샤는 쉽게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세리아나가 울음에 먹힌 목소리로 사과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이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아니, 아니에요…… 내가, 내가 당신을 속였어요.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세리아나…….”

악몽의 여운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세리아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사과했다.

이대로 두면 탈진할 것이 분명했다.

바이샤는 굳은 얼굴로 입구에 서 있는 치아린에게 수면향을 더욱 강하게 피울 것을 지시하며 울고 있는 세리아나를 안고 침대 위에 누웠다.

“쿠드라…….”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지금은 참아, 치아린.”

“……네.”

“라누아 곁엔 내가 있을 테니 물러가도 좋다.”

바이샤의 명령에 치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불안정한 주인의 상태를 눈치챘으니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이 더 이상할 뻔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치아린이 방을 빠져나가고 어느새 다시 잠에 빠진 세리아나의 볼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낸 바이샤는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깊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세리아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또다시 많은 눈물을 쏟아내겠지.

“전부 쏟아내, 세리아나. 내가 모두 받아줄 테니.”

다정한 말이 세리아나의 잠든 얼굴 위에 떨어졌다.

온기를 담은 말이 그녀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리아나가 잠에서 깨어난 건 달이 지고 새벽 별마저 정상에서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가던 무렵이었다.

뻑뻑해진 두 눈을 비벼 간신히 눈을 뜬 세리아나는 자신이 바이샤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더운 여름밤이었지만 싫지 않은 따뜻한 온기가 가슴에 스며들어 세리아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났나?”

“……네.”

“눈물은 그쳤군.”

“아……!”

그 순간 세리아나는 잠들기 전 자신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울었고, 울면서 그를 속였다 고백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러지?”

“저, 저는…….”

“세리아나?”

도망치듯 바이샤의 품 안을 벗어난 세리아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간신히 벗어났던 악몽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그녀의 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마, 말해야 해.’

그녀가 라젠 국왕의 명령을 따르든 말든 바이샤는 대륙회의를 위해 라젠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리아나 위니 다르미안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 뻔했다.

국왕은 그녀에게 비밀을 강요했지만 라젠의 다른 사람들의 입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국왕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가 금지한 일들이 성행하고 있다는 걸 그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는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말’에 ‘비밀’이라는 말이 붙으면 마른 짚을 태우는 불꽃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바이샤가 라젠에 가게 된다면 그는 무조건 그녀의 비밀을, 세리아나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 뻔했다.

달콤한 꿈은 끝났다.

세리아나는 그 끝을 자신의 입으로 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어미와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국왕의 협박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여기서 더 바이샤를 기만할 수는 없었다.

잠깐의 행복을 위해 한 이기적인 선택의 책임을 이제는 짊어져야만 했다.

“마, 말씀드릴 게…… 있어요. 꼬, 꼭 말씀……드려야 해요.”

“무엇을?”

“저는…… 사실 저는…….”

무서웠다.

세리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바이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 고백으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이고 그 죄 또한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보다도 두려운 것은 이제 더는 바이샤의 곁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거울 너머로 그를 지켜보던 때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의 품 안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한지 알지 못했을 테니까.

적어도 그랬다면…… 그것들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이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는…….”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뇨, 아니에요. 꼭…… 꼭 말씀드려야 해요. 그래야 해요.”

세리아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국왕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어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을, 고국을 배신한다는 생각은 잠깐이었다.

자신은 어차피 그들에게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적어도…… 적어도 거짓말쟁이는 되고 싶지 않았다.

바이샤의 기억 속에 거짓말쟁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바이샤, 아니 쿠드라.”

“…….”

“저는…… 쿠드라께 큰 죄를 지었어요.”

호흡이 가빠 오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쿠드라를 속였습니다.”

“세리아나.”

“저는…… 라젠의 왕녀가 아닙니다.”

세리아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 엎드려 죄인의 자세를 취했다.

차이툰의 죄인이 취하는 자세였다.

세리아나는 아주 잠깐 침대 위가 아니라 바닥에 내려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미 엎드린 이상 바이샤 앞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제 진짜 이름은 세리아나…… 피오르. 다르미안 국왕이 아닌 엘라이어 피오르의 딸이에요.”

자신을 피오르 백작가의 여식이 아닌 오직 어미의 자식으로만 소개한 것은 그것 말고는 그녀에게 허락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사생아라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자신을 어미의 부정으로 태어난 아비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이라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피오르 백작가의 이름도 숨기고 싶었다.

그저 태어나고 자랄 장소를 빌렸을 뿐 그녀는 그 차갑고 어두운 저택 안에서 단 한 순간도 백작가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비참했다.

그것 외에는 자신을 소개할 말이 없어서.

그리고 부끄러웠다.

이런 자신이 이제껏 바이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고귀한 이로 칭송받았다는 것이.

세리아나는 그런 마음을 내리누르며 엎드린 채로 바이샤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녀의, 라젠의 거짓말이 탄로 난 지금 이 순간 세리아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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