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38화 (38/110)

#38. 라젠에서 온 사신 (4)

“사신들은 고개를 숙여 라누아께 예를 표하라.”

드디어 도착한 라누아의 홀, 가장 높은 자리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세리아나는 시종의 말에 따라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사신들 사이에서 루카르도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자세를 바로잡았다.

라누아로 그 누구보다도 당당해져야 한다.

그녀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앞이었지만 주눅 든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라누아가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모두가 실망하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건 싫었다.

세리아나는 저의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게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라누아의 명이시다.”

팔걸이 위에 올려진 세리아나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인 것을 확인한 치아린이 눈짓하자 다시 한번 홀에 시종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라젠의 사신들을 지켜보며 세리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라젠의 사신단을 대표해 이 파빌리오 구어슨이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 네.”

긴장으로 혀를 씹을 뻔한 실수를 간신히 모면한 세리아나는 구어슨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다가 순식간에 웃는 낯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자신을 하대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간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백작의 얼굴도 좋아 보이는군.”

“왕녀님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라젠의 사신은 호칭을 똑바로 하라!”

구어슨 백작의 가벼운 말투에 치아린이 곧장 날을 세웠다.

정면에서 치아린의 살기를 받은 구어슨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본래부터 담이 작은 사내였다.

치아린뿐만 아니라 라누아의 홀 곳곳에 서 있는 호위전사들의 살기 또한 날아들었으니 그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치아린은 이런 작자가 어떻게 일국의 사신으로, 그것도 그들의 대표로 이 라누아의 홀에 들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치아린, 괜찮아.”

“……알겠습니다.”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있던 치아린이 고개를 숙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간신히 얼굴빛을 되찾은 구어슨 백작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치아린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신의 대표가 되어 라젠을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듯 자신이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야만족들은 그의 세련된 말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저렇듯 날을 세웠다.

구어슨은 도무지 이 야만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가장 상석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막의 태양도 그녀의 하얀 피부는 어찌할 수 없었던지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늘 드레스 아래 숨겨져 있던 목덜미와 둥근 어깨, 손가락으로 찌르면 그 자리에 자국이 남을 듯 뽀얀 팔뚝과 분홍빛으로 물든 손끝이 차례로 그의 눈에 담겼다.

야만족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의복만큼은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세리아나 곁에 선 사나운 눈매를 가진 여인의 경우엔 날씬한 복부를 그대로 드러낸 복식을 하고 있어 더욱 눈이 즐거웠다.

한 나라를 대표해 사신으로 넘어온 자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음흉한 눈빛이 세리아나와 자신의 몸을 훑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치아린의 기세가 사나워지지 않았다면 구어슨은 넋을 놓은 채 계속해서 그녀들의 몸을 훑었을 것이다.

“흠흠, 건강해 보이셔 다행입니다.”

“……내 걱정은 되었으니 그대가 할 일을 하게.”

구어슨 백작의 시선을 세리아나 역시 눈치챘다.

라젠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노골적인 시선이었으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차이툰에선 라누아의 허락이 없으면 쿠드라께서 외출조차 하지 못한다더군요.”

“말을 제대로 골라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백작.”

“하하하, 사내가 여인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것이 너무 놀라워 거르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나 봅니다.”

“백작, 이곳은 차이툰이오. 쿠드라에 대한 무례는 절대 가벼운 죄가 아니니 당장 사과하시오.”

“……허허, 벌써 야만, 아니 차이툰의 사람이 다 되셨군요.”

“백작!”

“네 알겠습니다. 사죄드립니다, 라누아.”

자신에 대한 일이면 어찌어찌 참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구어슨 백작은 그녀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세리아나는 바이샤에 대한 모욕은 아주 작은 것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 사막의 가장 위대하고 강한 전사였고 쿠드라였으며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구어슨 백작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어쨌든 이곳은 야만족의 땅이었으니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저 예쁘기만 한 사생아를 손봐 줄 기회는 조만간 찾아올 테니 이 분노를 오래 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과를 끝낸 후 이제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의 얼굴로 돌아온 구어슨 백작은 정식으로 라누아에게 쿠드라의 라젠 방문을 허락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이번 일과 관련해 바이샤가 따로 전한 말이 없었기에 세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였다.

사신단은 앞서 쿠드라의 홀에서 그리했듯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

주로 라젠의 사치품들로 이루어진 선물들이 라누아의 홀에 쌓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라젠의 물건들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느낄 수 없었다.

세리아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물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들어오던 선물들이 모두 쌓이고 확인이 끝난 선물 목록을 시종에게 넘긴 구어슨이 치아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라누아와 듣는 귀가 없는 곳에서 독대하고 싶습니다.”

“……뭐?”

“불가합니다, 라누아.”

“국왕 전하께서 사랑하는 따님께 개인적으로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치아린은 세리아나가 아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구어슨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 공간의 주인은 라누아인데 그녀의 종인 자신을 바라보며 발칙한 요구를 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그녀의 주인을 음흉한 눈빛으로 훑던 사내였다.

그런 돼먹지 못한 자와 소중한 라누아를 단둘만 놓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치아린, 주변을 물러 줄 수 있을까?”

“라누아!”

“국왕 전하…… 아니 아, 버지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다 하니 들어야 할 것 같아.”

아버지라는 단어를 내뱉는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입 안에서 몰아치는 것 같았다.

세리아나는 그런 감각을 가까스로 삼키며 치아린을 바라보았다.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치아린의 눈빛에 조금이지만 힘을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부탁해.”

“……알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치아린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찔러 오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구어슨 백작을 노려본 치아린이 신호하자 구어슨 백작을 제외한 나머지 사신들이 라누아의 홀을 벗어났다.

사신들이 떠난 후 치아린 또한 라누아의 홀을 떠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호위전사들은 안전을 위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세리아나의 명이 떨어진 그 순간부터 그들은 눈과 귀를 닫았을 테니까. 물론 그 상태로 대기하다가도 세리아나에게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달려 나와 그녀를 보호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 말하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너무 가깝지 않다면…….”

“감사합니다, 왕녀님.”

일부러 ‘왕녀’라는 호칭으로 세리아나를 부르는 구어슨의 눈매가 야비하게 휘어졌다.

남의 약점을 잡고 즐기는 사람의 전형적인 얼굴에 세리아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만, 거기까지요, 백작.”

“하지만…….”

“더 다가온다면 나의 호위전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듯 떨리는 세리아나의 목소리에 구어슨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원하신다면 멈추지요.”

대략 다섯 걸음.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포함한다면 여덟 걸음 정도의 거리에 멈춰 선 구어슨 백작의 음흉한 눈이 세리아나의 드러난 팔과 어깨를 다시 훑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역겨운 시선에 세리아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

“알베토 후작, 그 늙은이의 침실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면 가끔 찾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구어슨 백작은 진심으로 아까워하고 있었다.

제대로 서지도 않는 아랫도리의 만족을 위해 모든 짓을 동원하고 있는 늙은이가 요즘 들어 관음증의 증세를 보인다는 소식을 후작가의 주치의를 통해 몰래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젊은 첩 하나와 남창 하나를 엮어 매일 밤 자신의 침실에서 난잡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만약 세리아나가 다이아몬드 광산에 팔려 알베토 후작과 결혼했다면 후작이 좋아할 만한 미끼를 풀어 그의 침실에서 세리아나와 즐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구어슨 백작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그것이 내게 전할 말입니까?”

“뭐 겸사겸사 전하는 제 마음이지요. 야만족과 밤이 만족스럽지 않으시다면…… 어떠십니까? 오늘 밤 제가 왕녀님의 침실을 찾아가는 건?”

“이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세리아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입맛을 다신 구어슨 백작이 입고 있는 상의의 안쪽을 뒤져 얇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라젠 국왕의 인장이 실링 된 편지였다.

그것을 세리아나에게 넘긴 구어슨이 웃는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나 편지 안의 내용을 살피라 고갯짓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라젠의 국왕이 보낸 메시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세리아나의 손끝이 떨렸다.

구어슨 백작이 얌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세리아나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실링을 뜯어내 내용을 살폈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녀가 가짜 왕녀라는 것을 끝까지 숨기라는 협박과 이번 대륙회의에 쿠드라와 함께 라젠을 찾으라는 명령이었다.

“확인하셨습니까?”

“……백작은 전하께서 무슨 말을 전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는 않습니다. 저야 국왕 전하와 각별한 사이가 아닙니까?”

구어슨 백작은 작위를 높이기 위해 최근 가문 소유의 금광 하나를 국왕에게 선물한 상태였다.

그 덕분에 국왕의 신임을 잔뜩 얻게 된 그는 이번 사신단 또한 같은 이유로 자원했다.

이번 일을 마치면 단승작위일 테지만 지금보다 더 높은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세리아나가 국왕의 명을 거부할 리 없으니 그녀가 라젠으로 돌아온다면 그 공 또한 그에게 돌아오리라.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와의 하룻밤쯤은 선물 받아도 되지 않을까? 야만족의 땅도 아니고 라젠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음흉한 기대를 하며 미소지었다.

“라누아의 허락까지 얻었으니 곧 라젠에서 두 분을 뵐 수 있겠군요.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하하하.”

“…….”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지요. 쿠드라께서 연회를 베풀어 준다 하시니 그때 또 뵙겠습니다.”

세리아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구어슨 백작은 몸을 돌려 라누아의 홀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세리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이지 않는 끈적한 거미줄이 온몸을 휘감은 듯 숨이 막혀 왔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이제야 완전히 벗어났다 믿었는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절망은 생각보다 버티기 어려웠다.

세리아나는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적어도 여기에서 울어선 안 되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눈이 존재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보호의 눈길조차 감당할 수 없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라누아?”

사신이 물러갔음에도 저를 부르지 않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치아린이 라누아의 홀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의자 위에 앉아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세리아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세리아나 곁에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혹시 그자가 라누아께 무슨 짓이라도 했나요?”

“치아린…….”

“네, 라누아. 당신의 성실한 종 치아린입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라누아.”

“그것보다는 쉬고 싶어.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네, 라누아 모시겠습니다. 이 치아린에게 기대세요.”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리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치아린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세리아나를 부축했다.

예법에는 조금 어긋난 일이었지만 걷는 동안 시녀들을 불러 그녀의 몸에 걸친 관과 장신구를 모두 제거한 치아린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침대로 세리아나를 옮겼다.

실신하듯 침대 위에 쓰러진 세리아나의 발에서 신발을 벗겨낸 치아린은 서둘러 치료사를 불러들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치료사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세리아나를 살피는 사이 잠시 방을 빠져나온 그녀가 곧장 쥬드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

“네.”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쥬드는 모두가 라누아의 홀을 빠져나간 이후 있었던 일들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리아나의 뜻에 따라 일부러 소리를 듣지 않은 데다 입술 움직임으로 그 대화를 실수로라도 알게 될까 봐 시선을 관리했던 탓에 세리아나의 상태가 저리 변한 정확한 이유는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 변태같이 생긴 놈이 감히 내 라누아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죄송합니다, 치아린 님. 제가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했는데.”

“……죽여 버릴까?”

그렇게 말하는 치아린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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