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라젠에서 온 사신 (3)
세리아나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로가 그녀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쪼았다.
날카로운 부리는 세리아나의 손끝에 그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고 닿았다 떨어졌다.
그 덕분에 정신을 차린 세리아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로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아야만 했다.
그 거짓말 덕분에 세리아나는 바이샤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도착했습니다, 라누아.”
목적지에 도착한 낙타가 무릎을 접어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아린의 도움을 받아 땅 위로 내려온 세리아나는 여전히 낙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아로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렴, 아로.”
그녀의 인사를 기다렸던 것인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개를 펼친 아로가 어두워지고 있는 동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깐 제자리에 멈춰서 그 모습을 눈으로 좇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어둠 속, 수많은 횃불이 공터를 밝히고 있었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공터를 지나 그녀를 위해 마련된 상석에 오른 세리아나는 많은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침묵 탓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세리아나가 많은 이들의 눈빛에 당황한 사이, 치아린이 다가와 그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다들 라누아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 어떤 말을 해야 해?”
“아무 말이나요. 어떤 말을 하셔도 저들은 기뻐할 겁니다.”
치아린이 웃는 얼굴로 뒤로 물러난 후 세리아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기대가 가득한 이들의 눈빛을 마주하니 심장이 떨려 왔다.
“내가…… 그대들의 시간을 빼앗은 것이 아닐까 걱정이야.”
“아니에요! 라누아가 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세리아나의 인사에 촘촘히 땋은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올려 묶은 작은 아이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이 배움터의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한 아이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가 세리아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감사와 기쁨이 뒤섞인 아이들의 목소리로 공터가 금세 가득 찼다.
“그대들의 춤이 보고 싶어 들린 것이니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
“제가 제일 먼저 춤을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내가 먼저야! 라누아, 바라의 춤은 한 번도 보지 못하셨지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야! 바라의 춤은 제일 마지막이야! 라누아께는 차이툰의 춤을 먼저 보여드려야 해!”
“둘 다 조용히 해! 시카의 춤이 최고니까 그것부터 보셔야 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경계가 아직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보이는 것인지 어느새 부족별로 나뉜 아이들이 서로 먼저 춤을 보이겠다 다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자신이 괜한 분란을 일으킨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 세리아나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녀석들! 라누아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다툼이라니! 너희들 얼굴을 라누아께서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축복을 내리지 않으면 어쩌려고!”
아이들의 소란을 단숨에 정리한 것은 한 여인이었다.
다른 사막의 여인들보다 기골이 장대한 그 여인의 호통에 아이들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안 돼요! 용서해 주세요, 라누아! 안 싸울게요!”
“네, 흑, 안 싸울게요! 축복해 주세요.”
“아, 안 싸워요, 으아아앙.”
사막의 아이들은 대다수 제 부모나 나이 많은 형제처럼 뛰어난 사막의 전사가 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라누아의 축복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전사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울먹이기 시작한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이 세리아나의 살갗에 콕콕 박히기 시작했다.
“나카! 라누아께서 곤란해하시잖아! 그렇게 겁을 주면 어떻게 해!”
“어머, 치아린 님. 겁먹으셨습니까?”
“내가 아니라 아이들을 말하는 거야!”
“제 기억으로 치아린 님도 종종 이 아이들처럼 겁을 먹곤 하셨는데 아닌가요?”
“나카!”
치아린의 얼굴이 붉어 보이는 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횃불 탓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의 그런 모습에 아이들이 하나둘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감정의 전환이 무척이나 빠른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세리아나가 치아린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치아린?”
“아, 라누아. 저분은 이 배움터의 스승인 나카입니다.”
“처음 인사 올립니다, 라누아. 이 배움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가워. 그런데 치아린과는……잘 알고 있는 사이야?”
“영광스럽게도 라누아의 종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답니다.”
“세상에…… 치아린의 스승님이구나!”
깜짝 놀란 세리아나가 나카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치아린처럼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그 위에 가죽 보호대를 착용한 그녀는 세리아나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여인들보다도 강인해 보였다.
단단한 팔뚝의 근육과 자잘하게 남은 상처들이 그녀가 훌륭한 사막의 전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는 그리 거창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끼질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요.”
“나카처럼 도끼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쿠드라뿐이랍니다, 라누아.”
“도끼?”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카가 웃는 얼굴로 허리 뒤에 차고 있던 자신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횃불을 받아 날카롭게 번뜩이는 커다란 도끼날과 짙은 색으로 번들거리는 도낏자루가 세리아나의 눈에 들어왔다.
“저 무식하게 큰 걸 한 손으로 다루라니. 하다못해 크기라도 좀 줄여 주든가.”
“도끼질을 가르치지 못할 거면 저 말투만이라도 고치도록 해야 했는데…… 제 실수랍니다.”
“야안과 똑같은 말 하지 마.”
“두 사람씩이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정말로 한탄스럽답니다. 제 아래에 있을 때 볼기짝이라도 때려 고쳐야 했는데.”
“그 손에 맞으면 죽어! 난 카얀과 최대한 늦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니까 내 엉덩이를 노리는 짓은 그만둬, 나카!”
……웃고 있는데 무섭다.
세리아나는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웃는 얼굴로 치아린을 바라보고 있는 나카의 모습에 살짝 몸을 떨었다.
분명 치아린을 가르치며 볼기짝을 때리는 것 외에는 전부 해봤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 음악 대신 나카와 치아린의 목소리만 들려오는 거지?”
그때 바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환청을 들은 것일까 고민했던 세리아나는 공터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그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쿠드라!”
“쿠드라께선 어쩐 일이십니까?”
“내 라누아께서 배움터의 축제를 보러 갔다 하기에 찾아왔지.”
“일은 다 하고 오신 겁니까?”
“……나카, 여전히 근육이 보기 좋군.”
“말 돌리는 솜씨는 여전하십니다, 쿠드라.”
“하하하.”
나카의 어깨를 두드리고 상석에 오른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허리를 팔로 감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 저도 모르게 바이샤의 품을 파고들 듯 앉아 버린 세리아나의 얼굴이 뒤늦게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언제 시작하지?”
“라누아를 뵙고 말을 나눈 것이 처음이라 들떠 잊고 있었군요.”
“내 라누아께선 처음이시니 기대도 크실 거야. 어서 시작해.”
“라누아를 실망하게 할 순 없지요. 자 얘들아! 시작하자! 쿠드라와 라누아를 모셨으니 네놈들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야지!”
“네!”
“네!”
“네!”
아이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다시금 공터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곧이어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북소리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낮게 둥둥거리는 소리와 높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어우러져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옛 차이툰의 것이군.”
“어떤 춤인가요?”
“전사들이 전투에 나서기 전 추는 춤이지. 값진 승리와 명예로운 죽음을 기원하는 거야.”
나무로 만든 가짜 창과 검을 나눠 든 아이들이 교차하듯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쿠드라도…… 저 춤을 추시나요?”
“얼마 전까진 그랬지. 저건 가장 강한 전사들만 출 수 있는 춤이니까. 보고 싶어?”
“네, 조금…….”
분명 멋있을 것이다.
저 아이들의 움직임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바이샤가 춤을 춘다면 분명 자신은 넋을 놓고 바라보겠지. 아이들을 바라보던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바이샤를 바라보았다.
“어쩐다…… 난 이제 안 춰도 되거든.”
“어째서요?”
“내 라누아께서 나를 축복할 테니까. 당신의 축복을 직접 받을 수 있는 난 누구보다도 영광된 승리와 명예로운 죽음을 약속받은 거나 다름이 없지.”
“아…….”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바이샤가 춤을 추고 있는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리아나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횃불 아래 빛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짜의 축복도 당신에게 힘이 될까요?’
차마 밖으로 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세리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공터를 가득 채운 북소리는 그녀의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북소리 대신 불길함에 빠르게 뛰고 있는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한동안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라젠의 사신이 차이툰에 도착했다.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세리아나는 무겁게만 느껴지는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며 쿠드라의 홀에 사신이 들었다는 치아린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쿠드라께 인사를 올린 후 바로 나를 만나러 오는 거야?”
“절차상…… 네,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라누아?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나는 괜찮아.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잖아.”
“뒤로 미루겠다고 하시면 얼마든지 미룰 수 있습니다. 라누아의 건강이 먼저인걸요.”
“고마워, 치아린. 하지만 정말 괜찮아.”
세리아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애써 미소지으며 치아린을 안심시켰다.
자신이 가짜이기는 하지만 라누아의 의무를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최소한의 속죄였다.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는 시녀들이 들고 있는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매가 없는 기다란 붉은 드레스 위로 황금빛 장신구들이 더해졌다.
소매를 대신해 금사를 엮어 만든 숄이 둘리고 마찬가지로 금사를 엮어 만든 허리띠가 세리아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옥죄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양쪽 손목엔 십여 개의 가느다란 링 팔찌를 끼고 귀에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귀걸이를 걸었다.
두크란, 다른 이름으로 블루워터라 불리는 귀한 보석으로 만든 귀걸이였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큰 두크란을 본 세리아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곁에서 시중을 들던 치아린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쿠드라께서 라누아를 위해 만들라 직접 지시하신 거예요.”
“너무, 커.”
“실은 그 귀걸이 한 쌍이 본래는 한 덩어리였어요. 그만한 크기를 귀에 달았다간 라누아의 연약한 귓불이 상할 거라는 말에 간신히 타협하신 거랍니다.”
“세상에…….”
“남은 것은 목걸이로 만들어지는 중이에요.”
너무 과분했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귀걸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귀한 블루워터를 고작 귀걸이로 만들어 걸기엔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세리아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치아린은 연둣빛 싱그러운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며 그녀가 감동했다 여기는 듯 보였다.
세리아나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느슨하게 땋아 내리며 치아린이 말을 이어갔다.
“본래라면 귀걸이와 목걸이를 함께 착용하는 게 좋겠지만요. 쿠드라께서 만들어지는 즉시 라누아께 올리라 하시는 바람에 귀걸이만 먼저 준비하게 되었어요.”
치아린은 가늘게 뽑은 황금을 몇 번이고 꼬아 만든 관을 단정하게 땋아 정리한 세리아나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관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단장을 끝마친 세리아나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붉은색과 황금빛을 온몸에 두른 그녀의 주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에도 쉽사리 묻히지 않는 세리아나의 미모가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났다.
“사신들이 라누아의 홀에 들었습니다.”
제 주인의 모습에 감탄하는 사이 벌써 시간이 그리 흐른 것인지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치아린은 긴장한 듯 굳어 있는 세리아나의 곁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그래.”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잊고 지냈던 차가운 시선들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젠에 있을 땐 늘 자신을 쫓아다니던 눈빛들이었다.
‘그땐 어떻게 버텼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차이툰에 와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동안 견디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 차가운 눈빛에 겁먹어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세리아나는 볼 안쪽 살을 세게 깨물며 절대 차이툰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라누아의 홀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