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36화 (36/110)

#36. 라젠에서 온 사신 (2)

그녀가 싫다고 말해도 바이샤가 하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쿠드라와 라누아의 영역은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이번 사신의 방문 목적이 라누아의 허락을 얻어야지만 완료되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쿠드라의 영역이었다.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데옴’을 마음대로 막을 수 없듯 세리아나 역시 그가 라젠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누가 사신으로 오는 거야?”

걱정과 의아함이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치아린에게 고개를 저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인 세리아나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라젠의 국왕이 보낸 사신이 바이샤에게 세리아나의 비밀을 발설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안심하자. 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구어슨 백작이라는 자가 사신단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세리아나는 움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자다.

라젠에 있을 적 어머니에게 끌려가듯 참석했던 파티에서 늘 그녀의 곁을 맴돌던 그의 탁한 눈동자가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거기다 구어슨 백작은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세리아나를 샀던 늙은 후작과 마지막까지 경쟁하던 그녀의 남편 후보 중 하나였다.

그때 후작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내어놓지 않았다면 세리아나는 구어슨 백작의 루비 광산에 팔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 호위로는 일전에 저희에게 포획된 적이 있었던 기사 몇의 이름이 올라와 있더군요.”

“뭐?”

이어서 들려온 치아린의 말에 세리아나의 몸이 얼어붙었다.

루카드로가 떠오른 탓이었다.

세리아나는 술에 취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그를 기억한다.

피오르 백작가에선 적어도 그런 취급을 당하진 않았었다.

무슨 벌레를 본 것처럼 피하거나 무시하던 것이 루카르도가 세리아나에게 했던 짓의 전부였다.

그러나 전쟁포로로 지낸 몇 개월의 시간은 그를 망쳐 놓기에 충분했다.

망가진 것인지 아니면 눌러놓았던 본성이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야만족의 신부로 팔려 가는 세리아나를 조롱했고 비난했다.

그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망을 드러내려 했었다.

‘바이샤가 아니었다면 그날 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세리아나는 이제 밤에 일어날 수 있는 남녀 사이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일이 더 끔찍하게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루카르도가 오지는 않을 거야. 그때 거기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들었으니까.’

그날 바이샤가 테라스 밖으로 던져버린 루카르도는 떨어지며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한 번 걸렸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 떨어지며 다행히 목이 부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술에 취했던 탓에 제대로 착지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엘라이어가 신부 대기실로 들어와 세리아나가 묻지 않은 것까지 전부 알려준 덕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세리아나는 루카르도에 대한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치아린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웃어야 했다.

“내가 따로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

“라누아께서 따로 준비하실 것은 없습니다. 라누아의 귀한 시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려야 해요.”

고작 사신일 뿐이었다.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고향 땅에서 오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오래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치아린은 사신 대표의 이름을 듣고 세리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한 후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그들에 관한 호의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안부 인사를 나눌 시간은커녕 저의 주인과 사적인 그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치아린의 예민한 촉이 그 구어슨 백작이라는 남자와 세리아나를 단둘이 둬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라누아, 오늘은 궁 밖으로 한번 나가보시겠어요?”

“응?”

“차이툰의 백성들이 어떻게 노래하고 춤추는지 확인할 기회랍니다.”

오늘 해가 질 무렵 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배움터에서 작은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치아린은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주인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축제라곤 하지만 그리 거창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저 차이툰의 아이들이 이제껏 배운 차이툰 전통의 춤과 노래를 부모와 친지들에게 보이는 자리였을 뿐이다.

그러나 치아린은 그 축제가 그 어떤 곳보다도 활기차고 웃음이 넘치는 장소라고 믿고 있었다.

“다른 부족의 아이들도 섞여 있는 배움터라 각 부족의 전통춤을 한자리에서 전부 볼 기회랍니다.”

“쿠드라께선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 나만 놀러 나가는 건…….”

“세상에 라누아!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건가요!”

“오해라니?”

억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차마 쿠드라에 대한 불경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 치아린은 입을 꾹 다물고 가슴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녀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세리아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라누아, 모든 사내는 자기 여인 앞에선 성실한 척을 하는 법이랍니다.”

“성실한 척? 바이샤가?”

그가 왜 성실한 척을 한다는 것일까? 바이샤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쿠드라였다.

그런 그가 일부러 그런 척을 할 리 없었다.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가 치아린을 향해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할 때는 하는 분이지만 그 할 때가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순순히 일을 안 해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저와 카얀이 그분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은 말이 가슴에 쌓였으나 치아린은 차마 마음속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바이샤를 세상에 다시없을 성군이라 믿고 있는 세리아나의 환상을 깨부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후환이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분 앞에선 세상의 모든 비밀이 의미가 없어지니까.’

괜히 울컥한 마음에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시달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후일 있을 데옴의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세요.”

웃는 얼굴로 말을 돌리는 치아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리아나가 잠시 생각한 후 그러겠다고 답했다.

구어슨 백작의 방문은 그녀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누구보다도 완벽한 라누아로 바이샤 곁에 서는 일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해. 나는 그러기 위해서 이 사막에 온 거니까.’

걱정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해.”

차이툰에 온 이후, 공식적인 첫 번째 외출이었다.

시녀들에게 세리아나의 치장을 맡기고 방을 나온 치아린은 쥬드를 불러 그들의 주인이 외출할 것이라 알리고 다른 호위들을 준비시킬 것을 명령했다.

차이툰 안에서 그들의 라누아에게 위해를 끼칠 사람들은 없을 테지만 모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가마는 어떻게 할까요?”

결혼식 날 가마에서 떨어질 뻔한 경험을 한 이후 세리아나는 가마를 타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동안은 궁 안에서 멀리 나갈 일이 없어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낙타를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감히 라누아의 가마에 손을 댄 악타르는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작정하고 움직인 것인지 악타르뿐만 아니라 그의 누이마저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눌라.”

치아린이 이를 갈았다.

그녀 역시 카얀과 마찬가지로 악타르의 배후로 시카의 아눌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해 주변의 경계만을 신경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누라비의 첫 번째 자식만 아니었더라도 목을 꺾어버렸을 텐데.”

차이툰의 귀족으로 태어난 치아린은 쿠드라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부족원들에게 죄를 물어 벌을 내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차이툰의 귀족으로 나고 자랐다는 것은 곧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긴 백성이라는 뜻이었고 그것은 사막의 통합 이후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어떤 부족의 높은 지위를 가진 인간이라 하더라도 차이툰의 일반 백성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고 차이툰의 귀족을 상대한다 하면 한 수 물러서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사막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다면 그런 특권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은 존재하는 특권이었고 치아린은 차이툰의 귀족임과 동시에 라누아의 종으로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치아린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주인인 세리아나뿐이었다.

그것은 곧 사막의 백성들이 신으로 섬기는 여왕의 바로 다음가는 힘을 가진 이가 바로 치아린이라는 뜻과 같았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진 치아린도 뚜렷한 증거 없이 누군가의 첫 번째 자식을 해칠 수는 없었다.

거기다 그냥 첫 번째 자식도 아니고 한 부족의 족장이 가장 사랑하는 후계자가 아닌가. 바이샤가 사막을 통일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는 각 부족 간의 경계가 선명했으니 그런 후계자를 확실한 증거도 없이 건드려 좋을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너무 조용한데?”

사냥대회에서 있었던 일의 책임을 물어 젖은 땅이 마르기 전까지 사막의 모든 오아시스에 씨앗을 뿌리는 벌을 받은 아눌라였다.

가까스로 그 일을 전부 마치고 돌아온 아눌라는 지금까지 시카의 영역 안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럴 때 방심하면 꼭 일이 터지던데…… 좀 더 주의해서 살피라고 해야겠어.”

아눌라 곁에 붙여둔 감시자에게 추가로 내릴 명령을 떠올린 치아린이 몸을 돌려 라누아의 방 안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주인은 웃는 것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어떤 것도 제 주인의 미소를 앗아가게 두지 않으리라. 치아린은 그렇게 다짐하며 외출 준비를 끝낸 세리아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라누아.”

치아린의 말에 세리아나가 미소지었다.

치아린이 반드시 지키겠다고 맹세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하늘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동쪽의 하늘이 어둡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궁을 나선 세리아나는 가마 대신 준비된 낙타에 올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시종이 든 길고 커다란 양산이 아직 남아 있는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고 있어 움직이는 것이 그리 힘겹지는 않았다.

“라누아,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헬라임의 축복을! 라누아, 이쪽을 봐주세요!”

곳곳에 횃불을 밝힌 길 위에서 마주치는 백성들은 웃는 얼굴로 세리아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귀족이 길을 나서면 허리를 접어 땅을 바라보는 라젠의 백성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었다.

세리아나는 어미의 품에 안겨 활짝 웃는 얼굴로 양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수줍은 손 인사에 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떠세요, 라누아?”

“다들 이렇게 나를 반겨줄 줄 몰랐어. 꼭 꿈을 꾸는 것 같아.”

생각해 보면 처음 차이툰에 왔을 때도 백성들은 꽃을 뿌리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결혼식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라누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를 향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그들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모두가 라누아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면 어쩌지?”

“그럴 리가요. 저희가 기다려 온 라누아이신걸요. 실망할 리 없어요.”

느긋하게 움직이는 낙타의 등 위에 앉은 세리아나는 낙타의 고삐를 쥔 치아린의 대답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바이샤뿐만이 아니라 치아린과 차이툰의 모든 백성을 속이고 있었다.

점점 더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저를 향해 환호하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저들이 말하는 고귀한 사람이 아닌데…….’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세리아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한없이 치우치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그간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던 죗값을 한꺼번에 돌려받는 것만 같았다.

“삐이-”

그때였다.

새의 날갯짓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나는 익숙한 새의 울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작고 까만 새 한 마리가 세리아나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아로.”

그녀의 부름을 들은 아로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와 세리아나가 올라탄 낙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세리아나가 보호 장갑을 착용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낙타의 머리를 선택한 것이었다.

작은 불청객 덕분에 낙타가 귀찮은 듯 귀를 팔락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푹 쉬었니?”

상처를 회복한 아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커다란 창을 통해 세리아나의 방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사막의 야행성 맹금류인 쿠락답게 밖을 나갔다 돌아올 때면 작은 쥐나 도마뱀 등을 날카롭고 튼튼한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을 때가 많았다.

세리아나는 늘 그런 아로를 칭찬했지만 바이샤는 달랐다.

[내가 아는 쿠락은 제 몸보다 서너 배는 더 큰 왕모래도마뱀도 혼자 잡을 수 있는 사냥꾼인데…… 너는 아닌가 보군?]

그의 가벼운 도발을 알아들은 영리한 새는 그날부터 저의 용맹함을 증명하려는 듯 평소 사냥하던 모래쥐보다 더 큰 사냥감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았던 탓에 요즘 아로의 사냥 성공률은 최악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세리아나는 오늘 사냥에 나서기 전 자신을 찾아온 아로의 부리 끝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시무룩해 보이는 작고 검은 새를 위로했다.

“오늘은 성공할 거야.”

“삐이, 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아로가 꽁지깃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나는 유독 아로 앞에서만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지는 바이샤를 떠올렸다.

만약 오늘도 사냥에 실패한다면 바이샤는 분명 짓궂은 얼굴로 아로를 놀려먹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오늘도 아로가 사냥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그녀의 작은 새를 위한 작은 거짓말을 미리 생각해 두려다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그를 속이고 있다는 무거운 죄책감은 그녀를 절로 소심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세리아나는 차이툰의 라누아가 아니라 늘 주눅 들어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라젠의 백작 영애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