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라젠에서 온 사신 (1)
온몸이 땀으로 끈적이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세리아나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잠든 바이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이불 속을 빠져나온 세리아나는 침대 가림막에 걸쳐진 얇은 가운을 몸 위에 걸쳤다.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느끼며 창가로 걸어간 그녀는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과 오아시스를 바라보았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아, 저 때문에 깨셨어요?”
“당신의 온기가 없으니까 잠이 금방 깨더군. 잘 잤나?”
“네.”
언제 깨어난 것인지 그녀 뒤로 다가온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등을 품에 안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 잠깐 사이에 몸이 식었던 것인지 등 뒤에 닿은 바이샤의 체온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세리아나는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보아도 잘생긴 그녀의 남편이 웃는 얼굴로 세리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이 점점 더 더워지네요.”
“사막의 여름은 처음이지? 당신의 몸이 축날까 걱정이군.”
“괜찮아요. 늘 궁 안에서만 지내는걸요.”
“그것도 조만간 끝이니까 문제지.”
쿠드라가 백성들을 육체적으로 단련시켜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면 라누아는 그들의 상처 나고 흐트러진 마음을 지켜내는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그 수단으로 라누아는 일정 시기를 정해 궁 밖으로 나가 직접 백성들과 마주해 그들의 말을 듣는 일을 하곤 했다.
그것을 차이툰의 백성들은 ‘데옴’이라고 불렀다.
세리아나는 아직 야안에게 라누아의 일을 배우고 있어 지금까지는 궁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사막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적응해 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제저녁, 야안으로부터 세리아나의 배움이 빨라 조만간 데옴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를 들은 그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마. 여름이 끝난 이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아.”
“아니요. 지금도 아주 많이 늦었는걸요. 모두가 데옴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때를 정하는 건 당신이야. 그 누구도 당신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어.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좋지만 휘둘리지는 마.”
“그럴게요.”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입고 있는 가운의 끝을 살짝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흘러내린 가운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둥근 어깨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엔 간지럽게 닿았다 떨어지던 입술이 이내 진득하고 농밀한 것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바이샤…… 아침, 아침이에요……!”
“아직 해는 뜨지 않았어.”
“그, 그치만……!”
“아직 부족해.”
대체 무엇이? 세리아나는 부족한 것이 잠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바이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바이샤가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반응하는 몸과 누를 수 없는 신음이 그녀의 질문을 막았다.
지난밤의 흔적을 덮는 열기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바이샤는 열이 올라 흐느적거리는 세리아나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침대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참아 보려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더 자극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걸까?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히고 흐트러진 가운의 허리끈을 빠르게 풀어냈다.
“당신과 보내는 밤은 너무 짧아.”
바이샤는 두 팔 아래 세리아나를 가두듯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홍조가 오른 두 뺨과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 그리고 붉은 입술이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는 그 유혹에 기꺼이 굴복하기로 마음먹고 조급하게 얼굴을 내려 세리아나의 입술을 삼켰다.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을 마음껏 빨아들이다 달콤한 샘을 찾듯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밤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 *
아침 잠결에 바이샤를 배웅하고 다시 잠들었다가 눈을 뜬 세리아나는 해가 중천에 오른 한낮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짧은 우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웠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듯 온몸을 울긋불긋 물들이고 목욕시중을 받는 일이 익숙해졌다.
“어머머, 우리 라누아께선 몸에 꽃이 피어도 고우시네요.”
물론 익숙해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세리아나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눈을 반짝이며 짓궂은 말을 던지는 치아린 덕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얇고 하얀 욕의가 물에 젖어 지난밤, 아니 오늘 새벽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리아나가 부끄러움에 욕조 수면 아래로 얼굴을 숨기고 눈만 빼꼼히 내민 것을 지켜보던 치아린이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푸하하하! 라누아,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우신지! 매일 밤 라누아의 몸 위에 꽃을 덧그리는 쿠드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치아린 그만…….”
“이제 익숙해지실 때도 되었는데 말이지요. 언제까지 이렇게 부끄러워하시려나? 물론 저는 부끄러워하는 라누아의 모습도 아주 많이 좋아한답니다.”
아마 평생? 세리아나는 죽을 때까지 치아린의 놀림에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놀림은 암만 들어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싫어서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애정이 너무 간지러워 웃음이 나오고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세리아나는 그런 간질거림에 익숙해지는 날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세리아나는 욕조 안에서 나와 젖은 욕의를 입은 채 커다란 수건을 몸에 둘렀다.
젖은 천이 살갗에 찰싹 붙어 벗기가 어려웠으므로 우선 그 상태로 물기를 어느 정도 제거한 이후 욕의를 벗는 것이었다.
등 뒤로 묶인 끈을 풀어 욕의를 벗고 다시 깨끗한 수건으로 몸을 꼼꼼하게 닦은 세리아나는 말 없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고마워.”
시녀들은 말이 없었다.
처음엔 지나치게 정중한 그들의 태도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시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못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세리아나는 어려워하던 태도를 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이 자신의 감사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눈을 마주하고 그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워하던 시녀들도 차츰 그녀의 목소리 안에 담긴 진심을 알아주었다.
그 이후 시녀들은 세리아나를 더욱 극진히 섬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라누아를 섬기는 이들의 충성이 깊어진 것이다.
치아린은 그 모습을 보며 과연 자신의 주인이라 탄복했었다.
“적어도 한 접시 이상은 전부 비우시도록 도우라는 쿠드라의 명이 있었습니다.”
“……제일 작은 접시도 괜찮아?”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 모두 조금씩만 준비했어요.”
“고마워.”
세리아나는 키가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끊임없이 들어오는 작은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널찍한 테이블 위가 가득 차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과일은 후식으로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눈만 움직여 평소 즐겨 먹던 과일을 찾던 세리아나는 본식과 후식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치아린의 목소리에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향신료에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과일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던 탓이었다.
“과일만 드셔선 힘을 못 내세요. 그제도 침대 위에서 기절하셨다면서요.”
“그, 그건 그냥 잠든 거야!”
“쿠드라께서 아직 활을 잡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던데요?”
“……잠든 거라니까…….”
“저는 믿지만 쿠드라께서는 믿지 않으시니까요. 라누아께서도 확신은 없으신 것 같으니 어서 드세요. 드시고 체력을 쌓으셔야 활도 다시 잡으실 수 있는 거잖아요?”
“윽.”
“이 치아린의 소원이 라누아와 함께 활을 잡고 사냥에 나서는 것이랍니다.”
“……얼마 전엔 소원이 건강한 몸으로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거라며?”
“그땐 쿠드라께서 라누아께 새 말을 선물했을 때니까요. 말의 이름도 아직 못 지어주셨죠? 빨리 회복하셔야 말도 타고 활도 잡으실 수 있어요.”
“으응.”
세리아나는 사냥대회 때 자신의 말을 잃은 줄 안다.
누구도 그녀의 말이 바이샤의 화를 사 목이 잘렸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의 상냥하고 다정한 라누아가 상처 입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엄한 말투에 숨겨진 애정을 느끼며 가장 가까운 접시 위로 손을 뻗었다.
아마 치아린에겐 평생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어제보다는 많은 접시를 비우고 후식으로 준비된 달콤한 과일 한 조각까지 전부 삼킨 세리아나는 포만감에 소파 위에 늘어져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야안의 수업은 당분간 미뤄졌어요.”
그런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질하기 시작한 치아린이 입을 열었다.
식사 이후 그날의 일정을 일러주는 것은 라누아의 종인 치아린의 일이었다.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라젠에서 사신이 온다고 합니다. 그 준비를 해야 해요.”
“……뭐?”
“올해부턴 차이툰도 대륙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거든요. 이번 회의 장소가 라젠이라 초청장을 직접 가지고 온다고 연락이 왔어요. 본래라면 그냥 장소와 일시만 알린다고 하는데 우리 차이툰은 올해가 첫 참석이라 특별히 초청장을 보낸다나요?”
세리아나는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려온 고국의 이름에 이제껏 사막의 태양 아래 잊고 지냈던 음울하고 차가운 기억들이 한순간에 떠올라 그녀의 목을 옥죄어 왔다.
“이름만 거창하게 대륙회의지 고만고만한 왕국들이 모여 눈치 게임이나 하는 곳이라더군요. 우리의 쿠드라께서 참석하실 필요는 없지만 이제는 사막 밖의 바람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누라비의 의견을 받아들이셨다고 해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치아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세리아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국왕이 직접 그녀의 출생을 비밀로 하라 명령했으니 라젠에서 온 사신이 그녀의 정체를 바이샤에게 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두려웠다.
애써 잊고 지내던 자신의 거짓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신이 도착하면 먼저 쿠드라께 인사를 올리고 라누아께 찾아올 거예요.”
“나, 나에게?”
“전사가 집을 떠날 땐 반드시 라누아의 축복이 필요하니까요. 쿠드라 역시 사막의 전사시니 그분을 초대할 목적을 찾아오는 사신이 라누아께 허락을 구하는 건 당연하죠. 잊으셨어요?”
“아니…… 기억하고 있어.”
차이툰의 백성들은 전사들이 라누아의 축복을 받지 않고 집을 떠난다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라누아의 축복이 전사들을 바른길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이샤가 사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전사들을 이끌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라누아의 축복을 받지 못해 불안해하는 그들을 달래는 일이었다고 했었다.
전사들에겐 전쟁에 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도 라누아의 축복을 받지 못해 죽어서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더 컸다.
여기서 ‘집’은 말 그대로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장소이기도 했지만 더 크게는 그들의 신인 헬라임의 품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라누아의 축복은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헬라임의 품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도 같았다.
“라누아?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생각을 좀 했어.”
치아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세리아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라누아로서 해야만 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하던 치아린은 짐짓 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고향의 소식을 들으실 수 있겠어요.”
“으, 응.”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라젠과는 전혀 상관없는 차이툰의 라누아로만 존재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치아린은 왕의 그런 결정이 무척이나 매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고 자란 땅과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을 단칼에 끊어내는 것은 독한 마음을 먹고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암만 그들의 쿠드라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치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 방을 나서는 순간 빠르게 움직여 그가 라누아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먼저 파악하리라 다짐했다.
만약 사신이 라젠에서 세리아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배려해 줘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좀 더 개인적인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주변을 물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라누아? 얼굴빛이 나빠지셨어요. 혹시…… 체하신 거예요?”
치아린은 그 잠깐 사이 안색이 더 안 좋아진 세리아나의 얼굴을 확인하고 당장이라도 치료사를 불러올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차이툰에 온 초기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은 날이면 곧잘 체하곤 하던 세리아나였다.
그런 날이면 약을 먹고 하루를 꼬박 굶어야만 체기가 가시는 통에 치아린은 세리아나의 기껏 오른 살이 쑤욱 빠지는 걸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걱정하지 마.”
“라누아.”
“정말이야.”
세리아나는 눈꼬리를 늘어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치아린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손길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치아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사신은 언제 도착해?”
“일주일 정도요.”
“……쿠드라께서 그사이에 마음을 바꾸실 일은 없겠지?”
“네, 쿠드라는 한번 정한 것은 바꾸지 않으시니까요.”
“…….”
“쿠드라께서 라젠에 가는 게 싫으신가요?”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