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두 번째 오아시스(4)
라옴-디세나. 세리아나는 야안에게 배웠던 단어의 뜻을 떠올렸다.
“신의 흔적?”
“야안에게 제대로 배웠군.”
바이샤는 이제껏 안고 있던 세리아나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축축하고 미끈한 바닥이 맨발바닥에 닿자 세리아나가 몸을 살짝 움츠렸다.
차가운 기운에 놀라 몸을 가볍게 떠는 그녀의 모습에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허리를 가볍게 안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저 아래의 오아시스가 라누아의 눈물이라면 여긴 사막을 건너던 헬라임의 지팡이 끝이 닿았던 자리라고 하더군.”
헬라임이 이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했던 것은 단 두 걸음이었다고 한다.
한 발을 움직이고 지팡이를 짚고 다시 또 한 발을 움직이는 동안 이 메마른 사막을 모두 건넌 헬라임은 바다를 건너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름이…….”
“땅에 내려온 두 자식이 걱정되어 내려온 길이었다 전해지지. 고작 두 걸음 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지만.”
전설에는 아래쪽의 오아시스가 이 사막의 첫 번째 오아시스라고 했지만 바이샤는 사실 라옴-디세나가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의 물줄기 중 하나가 땅속 물길을 통해 아래로 내려와 고인 것이겠지.
사막의 모든 전설을 믿기엔 이 땅 위의 신의 흔적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남아 있는 이야기들은 너무 오래되어 믿음직스러운 부분이 없었다.
신의 아들이라 불리며 그 전설을 이용하기 위해 세리아나를 라누아로 받아들이기까지 한 바이샤다.
전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믿을 리 없다는 소리였다.
‘이용할 수 있다면 신의 이름도 이용해야겠지.’
그는 쿠드라이고 이 차이툰의 하나뿐인 왕이었다.
부모는 어린 자식에게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 진짜 신이 아래를 살피고 있더라도 이 정도 불경함은 얼마든지 용서하시리라.
그렇게 다소 무책임한 생각을 한 바이샤는 넋을 놓은 채 라옴-디세나를 살피고 있는 세리아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크란’의 푸른빛이 그녀의 새하얀 피부 위에서 일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흠씬 풍기고 있었다.
“세리아나?”
“정말,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곳이지. 확실히.”
“물이 어떻게 저렇게 파랗고 투명하죠?”
“두크란 때문이야.”
“두크란?”
그제야 세리아나의 시선이 바이샤에게 닿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동굴 벽도 벽이지만 저기 호수 바닥을 자세히 살펴봐.”
“저건, 아까 수로의 벽에 있던…….”
“그래, 저 푸른빛을 내는 돌이 두크란이야. 정화 작용을 하지. 짐승을 쫓는 건 덤이고.”
세리아나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잠시 풀어낸 바이샤는 허리를 숙여 발치에 떨어진 작은 두크란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던 세리아나는 바닥에 깔린 둥글고 시커먼 돌들 사이사이 푸른빛을 내는 작은 돌멩이들 전부가 두크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크란은 오직 라옴-디세나에서만 찾을 수 있지. 여기서 보기엔 흔해 보이지만 나름 귀한 보석이야.”
세리아나의 한쪽 손 위에 방금 주워 든 두크란을 올려준 바이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옛 라젠에서는 두크란을 블루워터라고 불렀다던데 요즘도 그리 부르나?”
“……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브, 블루워, 워터요?”
블루워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의 이름이었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블루워터 하나를 팔면 제법 큰 영지의 모든 영지민이 2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유하게 지내고도 남을 만큼의 금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어찌나 귀한지 라젠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왕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블루워터를 찾았다.
그러나 귀한 만큼 블루워터는 구하기 힘든 보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넓은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 것이 전부 블루워터라니…….
세리아나는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푸른빛의 보석을 보며 살짝 몸을 굳혔다.
라젠 국왕의 왕관에 박힌 블루워터보다도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에 보석을 떨어트리기라도 할까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 이렇게 귀한 게 어째서…….”
“여전히 귀한 취급을 받나 보군.”
“귀한 정도가 아니에요. 국왕 전하도 왕관에 하나, 반지에 하나 박힌 것이 가진 것의 전부인걸요! 다른 귀족들은 엄두도 못 낸다고 들었어요.”
욕심 많은 라젠의 왕이었으니 분명 아무도 모르게 소유한 블루워터가 더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보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세리아나가 보기에도 순도가 높은 이곳의 블루워터에 비할 물건은 절대로 아니었다.
한 나라의 왕이 그러할진대 귀족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이 돈을 싸 들고 구하려 노력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푸른빛의 보석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곳을 알게 된다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뭘 그렇게 걱정하지?”
“여, 여기를 아는 사람이 많나요?”
“아예 없지는 않아. 그러나 정확한 장소를 아는 것은 나, 그리고 당신뿐이지.”
큰 공훈을 세운 전사들에게 두크란을 상으로 내리는 것은 차이툰의 전통이었고 그 덕분에 사막의 백성들은 그들의 왕이 많은 두크란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옴-디세나는 성역이었고 바위산에 접근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기였기 때문에 광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욕심 많은 이들이 이곳을 알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거지?”
“……네.”
“걱정하지 마. 이곳의 비밀은 이 사막에 헬라임의 자식들이 차이툰을 세운 이래 단 한 번도 밖으로 새어나간 적이 없으니까.”
“그런가요?”
“그래. 오죽하면 내가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공을 세운 전사들에게 포상을 내리려 채굴꾼 짓까지 직접 했을까.”
“바이샤가 직접이요?”
“누굴 데려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 공을 세운 녀석들이 많은 건 좋은데 그놈들 몫을 전부 챙기려니 번거롭더군. 그래서 당분간은 전쟁은 안 할 생각이야. 또 공을 세운 녀석들이 생기면 온종일 여기 벽을 파내야 하거든.”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이는 바이샤의 모습에 긴장이 풀린 세리아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산처럼 거대하게 보이는 그녀의 남편이 벽을 파내고 파낸 흙더미 사이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훗.”
“뭘 상상하고 웃는 거야?”
“아무것도요.”
“수상해.”
“흠흠, 정말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았어요.”
“라누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믿어드리지.”
미심쩍어하면서도 웃고 있는 세리아나를 따라 미소지은 바이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여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거죠?”
“맞아.”
“그런데 수로랑 이어진 곳이 보이지 않네요?”
“그건 반대편에 있어. 아무리 당신과 나라도 이곳에 몸을 담그는 건 금지되어 있어서 보여줄 수 없는 게 안타깝군. 꽤 볼만하거든.”
“수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볼 수 있지 않나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질문하는 세리아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바이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해. 수로는 이 바위산의 가장 험한 길을 따라 만들어졌거든.”
“라옴-디세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구요?”
“그런 셈이지.”
“바이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직접 가봤거든.”
“네?”
“어린 시절에 궁금해서 딱 한 번. 꽤 힘들더군.”
열 살이었나 열한 살이었나? 아버지를 따라 바위산을 들락거리던 시절이었다.
아직 길을 완전히 익히지 못해 라옴-디세나를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그때, 어린 호기심에 수로의 시작점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해져 몰래 궁을 빠져나왔었다.
오아시스를 헤엄쳐 건너편으로 건너간 이후 수로를 찾고 그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또래보다 몸집이 크고 힘도 좋았던 그는 바위산의 초입만 해도 아주 가벼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바위산의 중반에 이르고 점점 험악해지는 산세를 따라 오르는 동안 발바닥이 까져 피가 흐르고, 넘어지고 구르는 동안 온몸에 생채기가 생겨났다.
목에서 단내가 나다 못해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식수로 사용되는 수로를 더럽힐 수 없다는 생각에 암만 목이 말라도 수로에 손을 뻗어 목을 축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목이 마르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하는 동안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로를 따라 걸은 것은 오기였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구르며 결국 수로의 시작에 닿았을 때 감격할 시간도 감탄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뻗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를 찾아 똑같이 수로를 거슬러 올라온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을 아찔한 순간이었었다.
“아버지께 야단맞고 동시에 칭찬도 받았지.”
“혼난 건 이해했는데…… 칭찬이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 원하던 장소에 닿았으니까.”
“아…….”
세리아나는 작게 감탄했다.
전대 쿠드라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어린 아들 앞에서 얼마나 엄격하고 자애로운 아비였을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리고 시도했더라도 세리아나의 어미라면 분명…….
‘……상상하지 말자.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인걸.’
그랬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용기를 내는 것조차 허락을 받을 수 없는 환경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만약을 상상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리아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을 빠르게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세리아나?”
“아, 그게…… 그래서 거기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작은 폭포야. 물길을 따라 가끔 부서진 두크란 조각도 흘러나온다고 하더군. 처음 수로를 만든 사람은 거기서 흘러나온 두크란 근처로 짐승이 다가오지 않는 것을 보고 수로 벽 안쪽에 그것을 박아넣을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말을 돌리는 것이 빤한 세리아나의 모습을 바이샤는 모르는 척해 주었다.
세리아나는 그의 그런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수로의 시작에 있다는 폭포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멋질 것 같아요.”
“멋지지. 어때? 당신이 원한다면 다음번 산책은…….”
“아뇨,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대답이 너무 빠른데?”
“이곳도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운걸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어렸다고는 하지만 바이샤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도착한 장소라고 했다.
그의 어린 시절보다도 체력이 한참은 모자란 것이 분명한 자신이 도전할 길은 아니었다.
세리아나는 이곳에 올 때처럼 자신을 안고 폭포를 찾아갈 듯 말을 꺼내는 바이샤의 말을 빠르게 가로막았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하지 않나요?”
미심쩍은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바이샤의 시선을 피하며 세리아나가 질문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쿠드라와 라누아, 두 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쯤 궁 안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간식 시간이군.”
“……배를 꺼트리러 나온 산책이었잖아요. 또……먹어요?”
“약은 이제 안 먹어도 된다지만 살은 좀 더 찌워야 해.”
“…….”
“한 번에 먹는 양을 늘릴 수는 없으니 먹는 횟수를 늘릴 수밖에.”
“……그럼 오늘은 활을 만지게 해주세요.”
그녀를 살찌우겠다는 의지로 불타는 바이샤를 보며 도망갈 길이 없음을 확인한 세리아나는 간식 시간을 피해 보려 노력하는 대신 다른 것을 부탁해 보기로 했다.
크나큰 발전이었다.
아직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어렵기는 했지만 이렇게 틈을 노려 부탁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니까.
그러나 아직은 바이샤가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리아나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진하게 입을 맞추며 슬쩍 한쪽 입꼬리를 당겨 미소지었다.
“활을 잡을 기운을 내게 양보하는 건?”
“……그, 그건…….”
“오늘 밤, 기절하지 않으면 내일부턴 내가 직접 활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지.”
“정……말이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손등에 머물러 있던 입술을 점점 더 위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잘게 떨어지는 입맞춤이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응? 세리아나? 허락해 줘.”
“……정말 활을 다루는 법을…… 알려 주시는 거죠?”
“치아린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 되어주지.”
“그럼…….”
“허락하는 건가?”
“……네.”
“좋아, 그럼 당장 돌아가지.”
수줍게 고개를 숙인 세리아나의 어깨에 입을 맞춘 바이샤는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는 것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던지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은 세리아나가 수줍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바이샤의 얼굴에 만족감과 조급함이 뒤엉킨 미소가 짙게 자리를 잡았다.
“꽉 잡아. 빠르게 움직일 테니.”
“……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답하는 세리아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확인한 바이샤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아주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걸음이었다.